1946년 스웨덴의 한림원에서는 그 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헤르만 헤세로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1946년 노벨문학상 선정 사유 中 스웨덴 한림원
위 선정 사유에 가장 적합한 작품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등 많은 작품이 떠오르지만 개인적으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수레바퀴 아래서'가 가장 이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데미안'은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 성장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했고, '싯다르타'에서는 석가모니의 삶의 통해 그것을 극복하는 자세에 대한 정도(正道)를 제시했으며, '유리알 유희'는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이상향을 그려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비극을 통해 성장통을 관통하여 전통적인 인도주의의 이상에 대한 영감을 어떻게 불어 넣었는가에 대해서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라는 자전적 인물을 통해 그가 극복하지 못한 좌절에서 기성세대가 우리 아이들에게 수레바퀴 아래 깔린 달팽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떤 자세와 배려를 통해 건강한 성장을 이끌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이 책을 읽음에 있어 1903년에 쓰인 책의 나이가 120여 살이 넘었지만 책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이 하나같이 대한민국이라는 학벌사회에선 작금의 현실로써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그 어떤 인류사의 사회 보다 심각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현재의 우리 현실에서도 문제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우선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대로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성장하면서 느낀 좌절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다.
선교사인 부친과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어머니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유년 시절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바람과 기대 속에 성장하여 헤세는 마침내 마울브론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문학과 그림 그리고 철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헤세는 최고로 절제된 생활을 요하는 수도원의 수도승 같은 신학교의 학생이라는 신분에 쉽게 적응할 리가 만무하였다. 계속되는 방황 속에 퇴학 조치를 당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시계공장의 견습생, 서점상의 견습원을 전전하다 우울증으로 인하여 자살기도로 이어지는 등 혹독한 성장통을 겪게 된다.
이를 소설이라는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작품인 것이다.
우선 줄거리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자.
20세기 초 독일 평범한 가정의 외아들인 한스 기벤라트.
지금의 우리로 따지면 중학교에 해당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당시 있는 집 자제로 태어났다면 인문계 고등학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 진학하여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은 중학교 정도를 졸업하고 공장의 견습생이나 상점. 관청 등에 사환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이었다.
평소 공부에 적잖은 재능이 있는 한스 기벤라트는 신체적으로는 건장하지 못한 편이어서 기능공이 되는 일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다. 여유롭지 못한 집안 출신으로 수재 소리를 듣는 학생들은 교회에서 지원하는 신학교를 지원하여 합격하면 경제적 부담 없이 공부하여 목사나 신학자로서의 기회가 주어지기에 벼랑 끝에 선 각오로 공부하여 주(州)에서 차석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된다.
그렇게 주어진 방학 동안 아버지는 물론이요. 마을 학교의 교장선생님, 목사, 주변 이웃들까지도 모든 부러움과 기대를 한껏 받게 되자 한스는 우월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처음 한 학기는 차석 입학자라는 기대에 부응하나 점차 성장통을 느끼며 공부와 멀어지게 된다.
특히, 같은 기숙사를 쓰던 힌딩어의 갑작스러운 사고사와 반항기 가득한 헤르만 하일러와의 교제로 인하여 한스의 학업에 대한 열의와 성과는 점점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신학교에서 교장선생은 물론이오 모든 교사들로부터 기대받던 한스는 점점 문제아가 되어가다 결국 다음 학기에는 구제불능의 학생으로 낙인찍혀 쫓겨나다시피 집으로 보내지게 된다.
신학교에서 돌아온 후 중학교 시절 친구들의 조롱 속에 마을 언저리를 산책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신학교에서의 실패와 아버지의 실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살을 결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색 속에서 자신이 어린 날 잃고 지냈던 감성을 되찾게 되고, 사과 수확철 활기 넘치는 이웃들의 웃음 속에서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 한스는 마을의 플라이크 아저씨의 조카딸인 엠마 성숙한 용모에 반하여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욕정에 새로운 생기(生氣)를 얻어 대장간의 견습생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마저 일게 된다.
하지만 2년의 견습 생활을 거쳐 정식 대장장이가 된 친구 아우구스트의 첫 월급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요일에 만든 자리에 참석하던 중 그날 아침 엠마가 자신의 집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된 육체노동을 이틀을 하고 역시나 만만치 않음에 실망하였지만 엠마 사이의 교제와도 같은 현실에 용기를 내었던 그는 다시금 현실에 좌절하게 된다. 한스는 엠마가 자신에게 키스를 한 것이 그저 재미로 농락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많은 술을 먹게 되고, 다음날 죽은 몸만 발견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는다. 이는 주인공 한스의 삶을 통해 성숙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기존 세대가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문제 제기의 효과를 극으로 끌어올림을 위한 것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수레바퀴 아래서'는 20세기 초 각자의 사회적 여건에 따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해진 삶의 길만을 갈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부조리한 삶에 대한 르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는 글을 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회적 특혜를 받은 이들이었고 물론 우리가 문호라고 칭하는 위대한 작가들은 하나같이 왕족, 귀족 아니면 모든 문헌적 정보를 독점하다시피 한 고급 종교사제 계층으로 한정되었던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연법적 권리보다는 사회적 신분으로 덧씌워진 굴레가 휠씬 크기에 헤르만 헤세는 거의 모든 인류가 태어나면서 주어진 신분에 따른 수레바퀴 아래서 고통받는 존재라 여기었던 것이다.
이 수레바퀴 아래서 고통받거나 달팽이처럼 짓 밝히는 것이 스스로 나태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득권층에서 강요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의 말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교의 교장이 한스에게 하는 다음의 내용이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中
이는 신학교 공부에 더욱 매진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보장하는 삶을 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한스 너 역시 다른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처럼 삶의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된다는 충고를 가장한 협박인 것이다.
신학교의 무료교육과 이를 이수한 후 목사나 신학자로서의 보장된 삶이란 결국 똑똑한 어린 인재들을 교회라는 거푸집에 맞는 인간으로 세뇌 후 개조하여 다시금 교회권력의 유지와 창출에 소모시키는 순환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인간 강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후 유럽 사회는 1.2차 세계대전과 이념 대립 그리고 자연 파괴라는 미증유 사건들을 연이어 겪으면서 진정한 인간적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전면적 재사유에 들어가게 된다. 뒤이어 사회적으로 수레바퀴 아래 인간이 치이는 일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많은 제도적 보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헤르만 헤세의 문제 제기로 인해 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수많은 지성들의 이와 같은 반성과 비판이 도약의 디딤돌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충분히 어려운 일들을 다른 어느 국가보다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성과 각성의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아직도 경쟁적 성장과정에서 훈장처럼 얻어지는 졸업장과 자격증에 거의 모두가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우리의 현실에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역량 부족이라는 고질병을 되돌아보며 왜 우리는 스스로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달팽이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새로 진화할 수 없을까 하는 씁쓸한 자책을 하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한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