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벽 앞에서 말(言)을 잃어버린 한 여자가 있다.
육체라는 벽 앞에서 시력(目)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다르지만 엄격히 따지면 같은 벽 앞에서 상처받은 두 영혼의 짧은 치유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한강의 '희랍어 시간'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을 이런 말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비단 혈연으로 뭉친 가정뿐만 아니라 개개의 인간 행복의 조건을 놓고 볼 때도 건강. 금전적 조건. 대인관계. 가족문제 등등등 어느 하나만이라도 어긋나도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각양각색인 불행의 조건도 그렇지만 그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동적으로 말하는 것이 사랑, 자비와 같은 인간들끼리의 긍정적 감정을 지닌 채로 연대하는 것을 최고로 꼽는다.
오늘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극한의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이 어떻게 연대하여 불행을 극복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제목 '희랍어 시간'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17살에 독일로 이민을 떠나 이미 모국어가 익숙함에도 다시금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익혀야 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 자연스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공부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게 되었고 서른이 넘어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아카데미에서 생계를 위해 희랍어를 가리키게 되었다. 반면 여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실어증을 겪고 되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접한 불어를 배우다 다시금 말을 찾게 된 기억으로 삶의 무게에 지쳐 다시금 실어증을 앓게 돼 즈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주 낯선 언어인 희랍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렇게 남녀를 엮어주는 희랍어.
이미 사라져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언어인 희랍어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삶을 규정지은 것은 바로 그 죽은 언어로 사유하고 글을 남겼던 죽은 사람 플라톤이었다.
산사람을 괴롭히는 관념이 모두 죽은 언어와 죽은 사람에게서 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그 핵심 포인트를 알고 시작하는 게 '희랍어 시간' 읽기의 사전 작업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사실 인간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의 답이기에 줄거리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의 문제와 극복의 방법이 핵심이다 할 것이다)
각자의 사정은 앞에서 소개했고 이 주인공들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둘의 상처는 그들의 핸디캡으로 인한 것으로 여자는 실어증 때문에 이혼한 전 남편에게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겼으며 일주일에 한 번 볼 수 있었던 접견권도 아이의 이민으로 인해 잃을 예정이다.
남자는 독일에서 독일인과 인도인의 혼혈 여성과 사귀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앓았던 병으로 인해 청력을 잃은 사람이었다.
청력을 잃은 사람과 시력을 잃어가다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의 남자.
둘은 나중에 함께 할 때 대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자에게 독순술을 통해 배운 것으로 말을 할 연습을 할 것을 제안하나 여자에게 폭력을 당하며 실연당하게 된다.
이들은(남자와 독일 여자) 그런 핸디캡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헤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둘은 부모의 죽음으로부터도 상처를 받았다.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남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부모의 부재는 삶을 지탱 하주는 든든한 버팀목의 부재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실어증과 시력저하가 겹쳐진 이들의 상태로는 더욱 힘든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생계를 위해(여자도 문학을 전공한 이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한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당장의 생계가 막막했다) 서로 희랍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건물로 들어선 여자는 건물에 갇힌 작은 새를 발견하고는 밖으로 나아가게 돕고자 하다 남자가 오는 것을 알고 그냥 교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건물 지하에 내려가던 남자는 새를 발견하고 돕기 위해 안 좋은 눈으로 플래시를 켜고 접근하다 놀란 새에게 머리를 받히게 되고 이내 계단 아래도 굴러떨어지게 된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외치다 이내 걱정되었던 여자가 돌아와 남자를 도와주게 된다. 병원에 갔다 늦은 시간이라 안경을 새로 구하지 못해 집까지 오게 되고 말 없는 여자에게 남자는 그간의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토로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묵묵히 밤새 듣던 여자도 마음을 열게 된다.
그날 아침 다시 방문한 여자는 지금 밖에는 굵은 장맛비가 내리기에 남자가 함께 나가기는 곤란할 것 같으니 안경 처방전을 주면 자신이 안경을 새로 사 오겠다고 한다.(말을 잃은 그녀는 손가락에 글씨를 써가며 의사소통을 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 둘은 깊은 포옹과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입속에서 말이 꿈틀 거리며 소설은 끝난다.
우선 이 둘의 삶이 힘든 이유를 보아야 할 것이다.
각자의 삶에서 현재를 즐기는 '카르페 디엠'을 하면 되는 의외로 단순한 우리의 삶.
하지만 여러 가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받는다.
'실어증'증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도, 낯선 동양의 사람들 이방인으로 하대하는 것도 모두 선입견이오 편견이다.
그 선입견과 편견은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형이상학적 취향으로 만들어진 허상 때문일 것이다. 그 헛된 관념을 심어준 이가 누구인가?
현실 세계를 이데아에 모사된 세계라 단정 지어버린 플라톤 일 것이다.
이 논리로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던가? 물론 현재도 진행형이다.
완벽에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결여된 열등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을 잃은 여자와 눈(目)의 기능이 퇴화되다 마침내 맹인이 될 운명의 남자(30대 중반에 시력을 잃게 될 것으로 의사는 단정 지었다)는 모두 열등한 존재로 고통받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타인이란 자신들을 꺼려 하는 존재들임에도 살기 위해 언어라는 것이 필요했다. 언어라는 것이 본래 타인의 세계(언어 자체도 타인이 만든 것이며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존재하니 언어라는 것은 구할 이상이 타인에 의해 그 필요가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자크 데리다의 철학적 사유 참조 )에 들어가는 필요악인데 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희랍어를 배우고 가리키며 인연이 되었다.(이런 모순적 상황에서 삶의 비극이 시작되고 그 역설적 상황에서 극복되는 열쇠가 있기도 하다-노자의 사유가 와닿는 점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희랍어라는 것이 현재는 사용하지 않은 죽은 언어이다.
그리고 희랍어의 중요성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수천 년간 인류를 좌지우지했던 플라톤의 존재로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낙향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영향으로 그의 저술은 아랍권에 남게 되었고 12세기가 되어서 아베로에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해서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남았다면 아마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그리스도교의 내세 중심적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인공인 두 인물을 힘들게 하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만들어준 플라톤의 언어인 희랍어를 통해 인간적 연대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부조리 극복에 대한 인간의 의지로 싸워 이기기는 극단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상황(할 수도 없다)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과 자비로 연대하며 극적으로 희망적 상황으로 전진함은 결국 관념을 이기는 것은 선(善) 한 의지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읽든 결과적으로 작가 한강과 서로 무언의 대화를 하며 삶의 고통 또는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함께 찾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단순히 줄거리를 가지고 플롯의 즐거움 찾는 읽기가 아닌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는 여정 속에서 여행 안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 대한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