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건 고작 핑계인 이유
왕관이 주는 무게 중 하나는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업무량이다.
타이틀을 얻게 되면, 누군가의 강요가 더 이상은 필요 없다. 타이틀에 걸맞은 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되니까 말이다. 온전한 자의로 A부터 z까지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새벽까지 일하기를 2주가 되었다. 반전이리만큼 감사한 것은 이 고된 일이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만큼 즐거운 일을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열심, 성숙과 성장이라는 강박이 있는 내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지더라.
직장에서 (당연히) 다 마치지 못한 일, 내일 해야 할 일, 그리고 그다음 주에 있을 일까지 어떻게 하면 잘 해낼까 하는 고민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 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읽을 여유도, 사랑하는 남편과 눈을 깊게 마주칠 시간이 없었다. 남편을 만나면 업무 과정에서 생긴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나누고는 했지만, 그건 쌍방을 위한 대화가 아니었다. 단지 나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을 뿐. 업무로 인해 가시지 않은 여운으로 남편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 저녁을 해결하고 샤워한 후 어떻게든 일 하나라도 더 빨리 끝내놔야 했으니까.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더 급했을 뿐이고, 남편은 당연스레 늘 옆에 있는 잡힌 물고기(추후 남편과 우스갯소리로 했던 이야기다) 였기에 더 그랬나 보다.
얼핏 아빠가 생각나기도 했다. 일에 시달려 가정에게 다정하지 못했던 아빠. 나는 어쩜 아빠를 이리 빼다 박았나 살짝 자책했지만, 별 수 없었고 아직 우리 사이 별일은 없었으니 딱히 내가 달리 행동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남편에게 소홀해도 될만한 타당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쁠 시즌이니까. 다 감당해 내야하니까.
그러다 어제는 살짝 우울하고 건조해졌다. 남편과의 친밀함이 전과 다른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남편과 매일 출퇴근을 같이 하고 맛있는 걸 같이 먹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문득 우리 사이에 알 수 없는 얇은 막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그래, 벽은 아니고 막 딱 그 정도. 그리고 곧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생각이 확장되었다.
남편에게 툭툭 털어놓았다.
여보, 우리 전처럼 친밀하지 않은 관계를 보니 갑자기 하나님이 생각나. 여보랑 내가 아무리 함께 살고 평생 서로를 떠나지 않아도, 더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니 서로 건조해지는 것처럼 말이야. 하나님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늘 내 곁에 계시겠지만, 하나님과 매일매일 대화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도어색해지고 마음이 허전해지고 그런 것 같아!
유레카처럼 이야기했다. 당신의 설교에 작은 인사이트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왠 걸.
남편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단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다. 자신이 나를 사랑하고 늘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의 크기와는 비할 수도 없이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클 것이라고. 아니 사실 얼마나 큰 지 상상도 안된다고. 사실 지난 2주간 정신없이 바쁜 아내에게 속이 좀 상했다고 하더라. 쳇 나한텐 관심도 없고! 하는 마음에.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써주고 사랑해 주길 원했는데, 웬걸 자기 일만 도와달라고 잔뜩 시키고 눈길조차 안 주는 게 현타가 왔다고 했다. 나는 그냥 아내 옆에 있는 액세서리 인가 싶었다고.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 마음.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해 내신 그분의 성품이 경이롭다고.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는 참 많이 놀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아내의 애정으로 살아가는 남편인 건 알았는데 막상 직접적인 말로 듣지 못하니 그냥저냥 괜찮겠거니 했구나.
자꾸 생각할수록 미안해졌다. 나의 상황에 모든 힘을 싣느라 결국 내가 가장 중요한 날을 살았던 것이 남편에게 정말 미안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귀하게 대해주지 못할 때 나는 정말 속상하다.
엉엉 울며 여보를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했더니 토닥토닥이며 미안해말고 사랑만 더 해달라는 남편이다.
어젯밤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둘 만의 정서적 친밀함에 마음 한편에 불이 켜지고 은은한 온기가 돌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우리 부부는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되고 긍휼히 여기게 된다. 너 한 발 오고 나 한 발 와서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결혼생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서로가 하나님을 향해 한 발 성큼 내딛는 것이야말로 은혜구나,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배웠다.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알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일 중심으로, 나의 열심을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참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매일 매일의 관계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기를.
왕관의 무게는 견디는 게 아니다.
그 왕관 내려놓고 주님께 대신 짊어달라 기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