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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Aug 20. 2023

사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으로 달라지는 인생

 나는 늘 나의 일에 책임을 다한다. 책 잡히기 싫은 마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다는 강박, 완벽하게 해낸 후 내게 주어질 타이틀에 대한 욕심이 두루두루 섞여있으니 열심을 다할 수밖에.


그래서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자기 일을 다 해내지 않을까? 그럴 거면 하지 말던가. 그래, 어쨌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나 또한 실수를 꽤나 많이 하니 백번양보해서 일처리를 완벽하게 못할 수는 있다. 실수 당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임감 없이 변명만 해대는 태도라면 이제는 아웃이다.


최근 내게 아웃당한 직원이 꽤나 많았다. 물론 티는 내지 못하는 쫄보 소심이 관리자라서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자기 할 일을 짜증 내며 내게 미루는 사람,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 열 마디 이십 마디 늘 변명거리가 많은 사람, 욱 하는 감정 내게 쓰레기 버리듯 던져버리는 사람. 진짜 지긋지긋하고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으련다. 그들의 속사정을 몰라준 대인배 다움이 부족했다면 모를까.


 그중 한 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인데, 어느 날부터는 내게 지적을 들으면 은근슬쩍 나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셨다. 네가 완벽주의자라 내가 힘들다, 이곳은 그 정도의 수준이 못되니 기준을 낮춰라. 그분을 최대한 배려하고 아낀다고 했던 시절이 무용지물이었구나 싶었고 전체를 이끌어가야 하는 내게 그 말은 정말 쓰디썼다. 나 때문에 모두가 힘들다는 죄책감을 심어주는 그분의 워딩. 한참 걸렸던 것 같다. 이 정도 쓴소리와 이 정도 강도의 업무는 전체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알고 보면 맡은 일을 가장 느리게 (심지어는 안 하거나), 심지어 홀로 해내지 못하는 분은 다름 아닌 그분이었으니 그의 비판은 타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효야, 당신의 쓴소리.


그래서인지 그분의 공격은 날로 강해졌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나이 부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고 강조 또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무슨 부심으로 이런 말을 툭툭 뱉으시는가 의문이었지만 일단 본인이 그런 의도는 아니라고 하시니 믿어드렸다. 힘들어서 그러신 거겠거니.


그러나 힘든 건 누구에게나 매한가지인 것을.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데 그날따라 유독 바쁜 날이었다. 머리가 미쳐 빙빙 돌아가는데 해결해야 할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 머리에 스팀이 꽉 차서 이제 버튼만 누르면 쒸익 - 증기가 솟구치기 일보직전. 다행히 참아내고 필요한 말만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해하고 협력해 달라고. 들어주어 고맙다고.

 그분에게도 전달해야 할 사항이라 이야기를 간결히 시작했는데, 역시나. 네가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갑자기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벙 쪄서 듣고 있는데 거기서 내 약점을 들먹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잠잠해진 줄 알았던 스팀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댔다. 이 상황과는 상관없는 말, 이 문맥과는 맞지 않는 말을 갖다 대며 우리 직원들은 그래도 되지만, 관리자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결국 나를 비난하는 말이 다시 돌아왔다.


 당장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과는 더는 일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그 좋은 통찰력으로 그 사람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괴롭히고 깎아내리다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우니 남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버리는 일은 정말이지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그날 저녁, 새벽, 다음날 아침. 또 하루가 지난 다음 날 하루종일 분이 가시지를 않더라. 차라리 지금 무슨 자격으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단호하게 대처했다면 분노보다는 후회로 시간을 보냈겠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홱 뒤돌아 가버린 내가 어찌 보면 잘했다 싶으면서도 이런 바보 맹초! 싶은 거다.


분에 사로잡히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그 사람의 또 다른 부족함이었다. 이것도 제대로 안따르고, 이것도 똑바로 못하면서 지금 나한테 그런 말을 한다고? 당장 내보내고 싶었다. 내 눈 밖에 나버린 당신에게 정말 매섭게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분노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 좋은 통찰력으로 그를 타락시킬 백만 가지의 방법을 추격하듯 찾아내는 나의 모습을 무엇으로 잠잠케 하나 싶었다.


불현듯 생각나기도 했다. 반면교사로 삼았던 주변인들의 흥분된 모습들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고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나도 별반 다르지 않네. 그나마 이런 생각들이 내게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달까.

분노의 불길은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은 저녁. 퇴근 후 무심코 보던 드라마에서 문득 하나님이 내게 한 가지 말씀을 던져주시더라.


분노를 품지는 마.

그만해.


이래서 저래서의 설명은 없었다. 분이 날 수는 있어도 품지는 말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이었다.


넵.


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평안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인가 싶었다. 하나님 대체 왜요, 저 너무 분해요, 못 참겠어요 못 참겠다고요 계속 중얼대던 내게 침묵하시는 것만 같았는데.


스치듯 생각나게 하신 그 말씀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바로 화는 날 수는 있다는 공감과 함께 그럼에도 그 분을 품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는 사자가 분노에 휩싸인 나를 보고 기뻐하며 찾아올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마귀에게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드라마에서 나온 분노하는 이에게 악귀가 즐거워하며 찾아가는 장면이 내게 충격이기도 했다. 어쨌든 하나님 주신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이런.


끝이 아니었다. 그분을 보니 다시 짜증이 나고, 싫어지고 말 섞기조차 싫었다. 난 당신과 일하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결단은 바뀌지 않았구나.


물론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그분을 외면하면 할수록 내 마음 바닥에 내려앉은 닻 같은 묵직한 게 점점 무거워지는 듯했으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아야겠구나. 이모티콘 웃음 웃음 단 두 개를 붙여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도 또 다른 결단이 필요했다. ^^ 이까짓 특수기호가 뭐라고.


땀이 흐르고 몸이 축 늘어지는 금요일. 남편의 설교날인데 도저히 갈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때마침 시작한 생리에 배는 사르르 아파오고, 일주일의 피로는 이때다 싶어 내게 달려들고. 결국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이럴 수가 오늘도 또 탕탕 저격을 당해버렸다. (우리 남편 목사님은 나를 전담하는 저격수의 사명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살인 그 자체에 국한된 의미가 아닌 일상 세밀한 곳까지 두루 미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말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의 일주일을 순식간에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는가 아니면 분노를 참지 못해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썼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였다. 하나님의 뜻을 치열하게 묻지도 않았고, 그저 분노에 휩싸여 공룡처럼 여기저기 불을 내뿜은 게 다였구나.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우리의 첫 시작이 바로 이와 같다고 했다.

용서받은 죄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게 맞지만.


맞아 사실 나는 내가 손가락질하던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죄인일 뿐이었지. 내가 바로 소망 없고 선한 것 하나 없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였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치를 떨게 한 이전 상사의 모습이 내게 그대로 있었다는 것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보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알게 하셨다. 나의 출발선은 소름 돋을 정도로 그 사람과 같은 지점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반응과 결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아 나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러니 내게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로구나. 내가 순종했다고 내가 충성되이 해냈다고 기뻐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 나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공로이기 때문에.


나는 성취와 인정욕구가 강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잘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이런 성향이라면  하나님이 나로 인해 당연히 높임 받으셔야 할 것을 그동안 어쩌면 내가 가로채려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 저녁에는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참으로 평안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셨음을 온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평안하고 감사하고 기쁜 마음.


그 분과는 당분간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의 존재가 그분에게는 자기 방어를 불러일으키는 버튼과도 같을 수 있으니까. 나 또한 그분을 더 세심하게 배려하고 존중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말씀과 은혜로 씻기워진 지금 뒤를 돌아보니 왜 그리도 화를 냈을까, 뭐가 그리 중요한 문제라고 힘을 뺐을까 싶다.


내가 뭐라고.

약점 좀 쥐고 흔들리면 뭐가 크게 달라진다고.


나는 강박이 있고 성격이 다혈질이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잘난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를 품어 사랑하는 자라 불러주셨는걸. 잘못된 길로 가도 이리 와라, 단호히 다정히 불러주시는 나의 하나님이 든든히 계신 것을.



사진출처_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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