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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어

엄마 나이 세 살, 부끄러운 과거를 공개합니다.

29 임용 합격, 30에 결혼, 서른다섯에 아이를 낳았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나이에 좋은 직장과 남편, 그리고 아이를 얻었다.
모든 것은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준비된 엄마라고 생각했다.


내 전공은 유아특수교육이다. 나는 경기도에서 10명 정도의 신규교사를 채용하는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학교에서도 교사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대담한 성격으로 스마트폰이 없을 때에도 배낭을 메고 두 달 동안 배낭여행을 했고, 전문대를 입학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범대 유아특수교육과에 편입했다.


사실 특수교육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동생 덕분에 특수교육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과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생각했기에 큰 뜻 없이 유아특수교육에 편입했다.


그렇게 임용이 되고 난 뒤에는 세상이 노력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착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에도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남편도 나와 같은 교사라서 우리는 방학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


남편과 하와이에서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우리는 한 해마다 여행을 다녔다. 한두 번 여행을 다니고 난 뒤에는 둘 다 여행에 푹 빠져  어쩌다 딩크족으로 5년을 보냈다.


그러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우리는 그동안 미뤄온 숙제를 하듯 임신을 계획했고, 아이는 단번에 찾아왔다.


 아이를 가졌을 때에도 나는 크게 입덧으로 고생하지 않았고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 근무한 덕분에 힘들지 않은 임신시기와 순산을 거쳐 출산했다.




나는 20대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책은 늘 나에게 멘토와 같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의지하기보다 나 홀로 힘든 일이 있으면 끙끙 앓던 성격이었다.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몰랐는데 책은 나에게 마치 다정한 엄마,아빠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준 책, 그리고 내게 적금과 예금이 어떻게 다른 건지 알려준 책,  내가 넓은 세상을 두 발로 다니는 방법도 모두 책에서 배웠기에 나는 육아도 책으로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갈 것만 같은 내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이가 돌이 될 때쯤 나는 서울 유명한 대학병원의 소아신경과 의사에게 "발달이 조금 느린 것뿐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발달이 조금 느린 것뿐이다... 그건 내가 학부모에게 해왔던 말인데..


내 아들은 출산 후 3개월 때부터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다른 아기들은 사람을 보면 방긋방긋 잘도 웃는데, 우리 아기는 잘 웃지 않았다.


100일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몸의 중심에 힘이 없어서 자꾸만 의자에 떨어져 100일 사진을 찍던 날 속상하던 기억밖에 없다. 그때 우리 아들 사진을 보면 온통 우는 모습뿐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 눈빛은 불안했고, 나는 발달 책과는 다른 우리 아이의 모습을 보며 초조해졌다.


6개월이 지나도 10개월이 지나도 아이는 엄마를 찾거나 다른 사람을 특별히 낯가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때의 난 밤마다 불안한 마음을 친구들과 아기엄마,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며 "내 아이가 이상해요. 좀 봐주세요"라고 호소했던 것 같다. 그때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면 "그래, 맞아. 니 아이 이상해."라는 말보다는 이상하지 않은 걸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누구나 다 그렇다고. 내 아이도 그렇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너무 부끄럽다. 내 아이가 자폐가 있는 장애아이라고 생각했었고, 아이를 보는 순간들이 고통이었다.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의 미래를 내 마음대로 정해놓고 누구보다 사랑해 주어야 할 내가, 특수교사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소중한 존재였던 아들에게 내뱉은 감정들은 원망, 충격, 부정등의 나쁜 감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6~7개월부터 아이에게 엄마로서가 아닌 특수교사로서 대했다. 아이를 앉혀놓고 엄마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자폐아동에게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알려진 ABA 책을 곁에 두고 혼자 아이를 가르쳤다. aba란 "모든 행동은 학습된다"는 원리 아래 아동의 환경을 계획해 주고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도록 하며 발달의 변화를 가져오는 치료법이다.  


나는 그 시절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정말 열심히 하니 번 아웃이 왔다. 하루종일 언어자극을 주고 매일 다른 곳을 경험시켜 주느라 나는 나를 돌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수면시간이 4시간 이상을 넘지 못했고 일상에 의욕이 없어졌다. 매일 밤 임신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의미 없는 후회만 가득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가 특수교사라는 이유만으로 내 마음대로 아들을 진단하고 교육했던 나 스스로는 지쳐갔다. 그리고 우울증이 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나와 남편  18개월의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두고 복직을 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를 두고 내가 살려고 복직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이 어린아이를 세 살까지 충분히 양육해 주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미웠다.


하지만 좋았던 점은 아이로 온통 덮어졌던 내 세상이 조금씩 분리되어 아이를 더욱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육아시간과 주말을 활용해 재미있게 놀아주려고 했다. 그리고 점차 복직을 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엄마로서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아이는 18개월 즈음 남들보다 빠르게 언어를 습득했고, 20개월 즈음에는 1년 정도 언어가 빠른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직도 걱정되는 면은 있지만 난 내 아이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순간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성장하면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찾게 되었다. 다시 아이를 낳아본다면 난 어떤 엄마가 될까? 하고 아주 잠시 둘째 생각도 해보는 평범한 엄마로 말이다.


 2024년 2월 23일, 세 돌을 향해 달려가는 나는
엄마나이 3살이 되어가는 나 스스로를 반성하며 용서하려고 한다.  

우리 아이에게 지금까지 엄마로서 있는 그대로 자녀를 사랑해 주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남들은 그러지 말기를.. 나처럼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또 때로는 누군가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래라는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글도 써보고, 내가 앞으로 엄마로 살아갈 앞으로를 위해 어떤 엄마가 될 것인지 써나가보려 한다.


지금까지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지만 앞으로 엄마로서의 삶이 더 길다. 나 조차도 엄마이기 전에  말 많고 탈 많던 철없던 10대를 보냈고 20대가 되어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꿈을 가졌다.  


그리고 노력하면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던 30대의 중반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난 철저하게 패배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엄마들은 완벽하지 않다.  엄마가 되고 나니 더욱 엄마의 길이 완벽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여행이 즐거운 건 여행하는 그 모든 순간이 새롭고 처음이라 낯설고 힘든 것도  많지만 결국은 아찔했던 경험도 웃음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육아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이를 임신하고 육아를 하기 전 기대했던 설렘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육아가 얼마나 고된 길인지..


하지만 아이가 잠든 순간, 또는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씹는 그 작은 입과 조그만한 발을 보며 웃음짓는 게 부모라는 걸. 먼훗날 아이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웃음 짓게 되는 순간들이 육아의 세계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바라본다. 여행하듯 육아하며 살고 싶다.


오늘 하루도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는 티켓을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스스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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