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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G Aug 24. 2015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고 싶어요,  한여름의 판타지아

나라현 고조시로 영화 속 유스케와 혜정의 흔적을 찾아가다

이야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두 번째

_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많은 것을 채우는 법

2015년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한 편이 있다. 바로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보기 전, 보고 있을 때, 보고 난 뒤 내게 각각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이 느낌들이 사라지기 전에 영화 속 주인공이 떠났던 그 날에 영화 속 그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결국 떠났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이토록 다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영화의 첫 느낌
흑백의 포토티켓, 파스텔톤의 영화 포스터, 그리고 예고편

책을 고를 때 책 표지를 보고 고르는 것처럼, 영화도 포스터를 보고 고르는 경우가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영화 포스터는 대부분 톱배우의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걸어놓는 터라     .  박스오피스  아래쪽에 조용히 있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포스터는 더욱 눈에 띄었다. 당장 메인 예고편을 클릭.   모르는 배우, 모르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내게  판타지로 다가왔다.

고조시의 진짜를 담아낸 1부

못 하게 하면 더욱 하고 싶은 법. 이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서울의 몇 안 되는 개봉관에서 하루에 많아야  두세 번 상영하는 것이다. 하필 또  마음 먹은 날  무산되기를 반복. 꼭 영화가 내리기 전 영화관에서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명동 cgv 아트 하우스까지 가서 영화를   .


사실 난 영화 보기 전에 그 영화에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는 것을 싫어한다. 예고편은 봐도 '글'로된 예고편을 절대 읽지 않는다. 그 영화가 시작하고,    흑백 영화  .

1부

영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부는 흑백, 2부는 컬러. 


1부는 고조시를 담으려는 영화 감독 태훈과 조감독 미정에게 고조시 시청 직원 유스케는 고조시 이곳 저곳을 안내한다. 실제 고조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다. 이 곳을 떠난 사람, 이 곳에 남은 사람, 시간이 멈춘 듯한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의 풍경들이 흑백 필름을 채운다. 느리고 아무것도 없는 고조시의 답답하지만 고즈넉함이 흑백의 화면과 무척 잘 어울린다.

2부
고조시의 판타지를 담아낸 2부

영화의 2부가 시작하자마자 한여름의 따사로운 햇빛과 함께 컬러로 바뀐다. 1부의 단정한 시청 직원을 연기한 이와세 료는 2부에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고조시의 감 따는 청년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같은 인물인지를 혼동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오고 싶어서 고조시를 찾은 한국 여행자 혜정과 고조시의 관광 안내소에서 만난 유스케. 혜정에게 호감을 갖게 된 유스케는 혜정과 고조시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닌다. 이 영화의 홍보 문구처럼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떠오른다. 이루어질 듯 말 듯한 심리 묘사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


미지의 그곳,

고조시로 떠나다
2015. 08. 15
"오사카에서 두 시간이면 올 수 있어요."
"사슴을 피해서 왔어요."
- <한여름의 판타지아> 中

결국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사카에서 2시간 거리, 나라인데 사슴이 없어서 좋다는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의 대사 때문이었다. 마침 개강을 앞두고 친구가 있는 오사카에 놀러 가기로 한  터였다. 1년에 한 번 열린다는 영화 속 하나비를 보기 위해서는 이 날 떠나야만 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영화 속 말처럼  아무것도 없어서 무서울 것 같아서 친구 K를 꼬득이기 시작했다. 친구도 나도 사슴을  무서워해서 나라 여행을 하지 못했는데, 사슴도 없다니   안성맞춤이었다. 


인터넷을 뒤졌지만 고조시를 여행하고 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두 세명의 블로거들이 정리해 놓은 정보가  다였다. 요시노가와 하나비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나 혼자야 괜찮지만 영화도 보지 않은 친구와 동행하는 여행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든, 떠났다

난카이 난바역에서 사람들이 관광지로 많이 가는 고야산으로 가는 쾌속 열차를 타고 하시모토 역에서 내린 다음, 열차를 갈아타 고조시에 이르게 된다.


열차에 몸을 실은 순간, 설령 헤매서 고조시에 도착하지 못한다 해도, 그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좋았다.


좁은 기찻길을 따라 일본의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핸드폰에 담아온 영화의 OST를 무한  재생했다.





시노하라-이민휘 https://www.youtube.com/watch?v=dme4c9Jlm2I
한여름의 판타지아-이민휘  https://www.youtube.com/watch?v=0gbZv8vFi9Y
_한여름의 판타지아 OST
S#1. 고조시 관광 안내소 (2부 중 혜정과 유스케의 첫 만남)

나라에서 계획에 없이 고조시로 온 혜정. 무작정 관광 안내소를 찾아 들어가 여행 정보를 얻는다. 그 뒤에 앉아있던 유스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한국 여행객 혜정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관광 안내소 한 켠에 쌓여 있는 감. 유스케는 혜정에게 감을 건넨다. 혜정을 뒤따라 나오는 유스케

우리 역시 아무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고조 역에서 내리자마자 관광 안내소를 찾았다. 유스케가 앉아있던 의자는 한쪽 구석에 있었지만 당연히 유스케는 없었다. 나라현에서 관광 투자를 목적으로 만든 한일 합작 영화답게 한국어 관광 지도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며 이렇게 가볼 곳이 많다니.


S#2. 카페 주리 (1부)
고조시에 영화를 찍으려고 온 감독 태훈과 조감독 미정. 미인인 가게 주인과 이곳을 40년 동안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인터뷰를 담아낸다.

CLOSED

이럴 수가. 나의 계획은 이 곳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더위를 피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메이킹 필름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고를 때도 이렇게 신중하냐고묻던 카페 여주인도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오전에만 영업을 한단다. 우리의 도착시간은 오후 1시. 그렇지만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때 보지 못하면 언젠가 다시 갈 기회가 생기는 법이니까. 덕분에 우리는 영화가 아닌 우리만의 고조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S#3. 카페 KAKIHA (3부. 우리들의 여행 이야기)

더워도 너무 덥다. 나야 영화를 봐서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지만 따라온 친구는 아닐 것이. 카페 주리에서의 계획이 틀어지고, 우선 친구는 카페에 있고, 나 혼자 구경할 계획으로 다른 카페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신마치 거리를 거의 다 지나고서야 발견한 카페. 덩달아 더위에 지친 나는  함께 이 곳에서 쉬기로 했다.

'오노야'라는 건물 이름을 가진 이곳은 고조시가 운영하는 창업가 지원 시설이라고 한다. 기간 한정의 레스토랑과 카페로 참가 가게를 3개월 단위를 모집한다는 이곳. 지금 하고 있는 가게는 바로 KAKIHA라는 곳인가 보다. 널찍한 공간은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바처럼 이뤄진 공간에서 음료를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좌석. 다른 곳을 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손님 두 분이 우리를 배려해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온통 일본어로 된 메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친구 덕분에 메뉴에서 이 카페의 가장 유명한 음료를 찾아냈다. 영화 속에서 '감'이 이 지역의 명물인 만큼 감과 감잎으로 만든 스무디 같은 음료를 주문했다. 양도 꽤 되는데 350엔. 가격도 착했다. 바로 앞에서 음료를 만드는 모습도 구경  . 서비스로    . 이런 게 지방 여행의 작은  .

그런데 아까부터 카페 주인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쑥스러워하면서도 계속 우리를 쳐다보는 게 귀엽다. 안녕 하고 손인사를 건네니 쑥스럽게 손을 흔든다. 큰 눈과 따가운 햇살과 어울리게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 엄청 귀엽다. 음료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오는데   따라 나온다. 영화의 기운 때문일까. 평소와 다르게 내가 먼저 아이에게 악수의 의미로 손을 건넸다. 

S#4. 신마치 거리(1부)
시청 직원 유스케가 고조시 이곳 저곳을 설명해준다.

신마치 거리의 초입은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진다. 하얀 색 다리를 따라 걸으면 주요 거리가 나오고, 검은색 다리를 따라 걸으면 깊숙한 골목길로 들어간다.




영화 속 흑백으로만 보여줬던 고조시의 실제 색감이다. 같은 곳의 사진을 흑백 설정을 하고 보니 영화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한국과 너무나 비슷한 풍경이었던 오사카나 도쿄에 비해 도시의 특색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리.

S#5. 야마다 여관
여행 온 혜정이 머무른 숙소. 혜정은 창문 밖으로 불꽃놀이를 본다.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던 유스케. 그들은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을까?

신마치 길을 살짝 빠져 나오면, 요시노 강가로 통하는 길목이 다. 하나비(불꽃놀이)가 열리는 장소로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다.

S#6. 요시노 강 (1부)
이 곳에서 홍수가 났던 이야기 등, 고조시의 역사를 설명해 주던 장면에 등장

오른쪽의 스틸컷처럼 영화 속 황량했던 요시노 강은 축제를 맞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나비를 맞아 기모노를 입은 일본 사람들이 가족, 친구, 연인 단위로 이 곳을 찾았다. 큰 축제라기보다는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축제 같았다. 저 멀리 강가에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노점상 근처에도 축제의 북적임이 느껴졌다.

강가라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유럽 여행에서 하이델베르크가 좋았다던 친구는 이 곳 풍경을 보더니 하이델베르크가 생각난다고 했다. 작은 건물들과 어우러진 자연을 보니, 독일의 작은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영화를 보지 못한  심심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여행 온 것 같다며 이 을 마음에 들어했다. 이곳은  촬영지의 탐방이 아닌 순수한 여행으로도 꽤 괜찮은 여행지인 것 같다.

 S#7. 야마 나오 메밀국수집 (2부, 그리고 3부)
메밀국수가 영화 속에 나오긴 했으나 주인공들이 식사하던 장소가 여기는 아니었던  듯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일본에는 드라마 <심야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에서 보던 바 형태로 앉아서 먹는 식당이 많았다. 이 메밀국수집도 그랬는데, 우리가 앉은 앞에서 조용히 국수를 끓이고 계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친구 역시 일본어가 아주 능숙하지는 않은 터라 메뉴판을 보고 차가운 소바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 .  주방에서 나오신 아주머니께서 마침 다른 손님에게 서빙하는 음식을 보여주더니 이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맞다는 표시로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1882년 창업한 이 가게는 한 가족이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딸인지 며느리인지 모를 젊은 여자 한 분. 뭔가 장인의 집이라는 느낌이 풀풀 풍긴다.


- 영화 보고 왔어요?


주인 아주머니가 팸플릿 지도를 한쪽에 쌓아놓고 먹는 우리에게 일본어로 물었다. '에가' 어쩌고 해서 무슨 말인지 느낌으로는 알았으나 대답을 하지 못해서 친구만 쳐다보았다. 친구는 자기는 유학생이고 나는 여행객이라고 소개하며, 내가 영화를 보고 오고 싶어 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 오늘 여기 한국 사람만 5명 왔다 갔어요. 그 영화 보고.


이 곳에 와서 한국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를 못했다. 내심 이 곳에 온 한국사람이  우리뿐인가 궁금했는데,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 주변에 한국 사람이 있나 둘러보았지만 단 한 명도 마주칠 수 없었다. 

S#7. 요시노가와 축제 (3부)
하나비 하면 물고기 잡기와 기모노가 생각난다. 일본 영화,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풍경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전병 과자에 프라이 두개가 올려져 있다. 사진은 친구와 반 나눈 뒤 찍은 것. 이 축제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로 줄이 가장 길었다.  여기선 모든 메뉴가 500엔. 축제인 만큼 비싸다.

저녁 6시 즈음부터 사람들은 먹거리를 사들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우리도 맥주 두 캔과 오징어, 다코야끼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다.


서서히 해가 진다.  재 감독      .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S#8. 요시노가와 납량 불꽃놀이 (2부와 3부)
혜정은 자신의 숙소 창 밖으로 불꽃놀이를 바라 본다. 유스케도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밤하늘에 수 놓인 별들. 어둑해진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납량 불꽃놀이라 그런지 도깨비 같은 캐릭터들   . 한 발씩 소소하게 터지던 불꽃은 어느덧 레이저와 음악과 함께 조금 더 화려해진다. 옆에 앉은 친구와 친구가 된지 어느덧 9년. 그러나 한 번도 둘이서 여행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래된 친구와 첫 여행에서 함께 보니 더욱 뜻깊었다. 우리는 주전부리를 잊을 만큼 말없이 넋 놓고 보았다.

S#9. 한여름의 판타지아처럼
한여름의 판타지아 같았던 하루. 못 가본 곳에 아쉬움도 많았지만, 그래서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한여름의 해가 저물고 끝날 것과 같았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To be continue...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던 그 곳
무엇보다 명장면인 유스케가 만든 전설의 우물을 찾지 못해서 아쉽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더라...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영화 곳곳의 이야기 뿐 아니라 친구와의 여행 이야기를 함께 담게 된 고조시. 여행의 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채우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씬 구성은 여행 여정에 따라 임의로 설정했습니다. 1부, 2부는 각각의 영화 내용을 담고 있는 촬영장소에 대한 설명이고 3부는 저의 여행기를 담았습니다.     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Storytraveller

사진. Storytraveller



본 글은 기존 매거진 <이야기 여행자의 안내서-아시아편>(https://brunch.co.kr/magazine/storytraveller2)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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