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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근지 Apr 28. 2023

리소 일기 1: 여정의 시작

3회짜리 워크숍에 등록하다

오타쿠(14세)의 꿈

 때는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만화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국어 선생님답게 주로 책을 제공하셨는데, 해외 만화책 단행본을 사주시기도 했지만 주말만 되면 함께 시립 도서관으로 향해 10권 남짓한 책을 이고 돌아왔다. 그중 8권은 만화책이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혼자 타인의 시선이 의식됐는지 대충 그 주의 인기 도서로 진열된 인문학 서적 한 두 권을 맨 위에 올려놓고 실실거리며 집에 왔다.


 뭐든 하고자 하면 어떻게 되든 몸으로 부딪히고 보는 성미는 거기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화책으로 울고 웃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노트며 연습장이며 만화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주변 친구들에게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엄마에게 은근슬쩍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어필했다. 인자하신 아빠랑 달리 그 당시 엄마의 노심초사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쯤부터 애니메이션과 입시 학원을 등록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부터 무슨 그런 구체적인 진로 선택일까 싶지만 정말 그땐 만화가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가장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조퇴를 하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쌓아두고 해치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쁜 색이 많은데

 그러나 애니메이션 입시 학원은 내가 생각한 만화 그림과는 달랐다. 입시에선 정해진 주제를 성실한 스타일로 표현해내야 했고, 스케치뿐만 아니라 컬러링까지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만 했었는데 이제 갓 미술 학원을 다니고 있던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호기롭게 학원을 등록한 것 치고는 변변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연습장이 걸레가 될 때까지 그려서 스케치와 묘사 실력에는 어려움이 없었는데, 바로 컬러링이 문제였던 것이다.


 기껏 해봐야 1n 년의 인생, 부모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 2,3개의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지만 물감은 무려 24색이나 있었다. 나는 모든 색깔이 저마다 고유하고 예쁘다고 생각했고 예쁜 것들을 섞으면 예쁜 게 될 거라는 단순한 인과 관계를 따랐다. 하지만 이 시절에 내가 잘 모르던 색채의 원리가 있었다. 감산 혼합이란 색상을 섞을수록 검정에 수렴한다. 내 그림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탁해져 버렸다.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항상 짜증을 내셨다. "물감만 칠하면 이게 뭐니?" "어휴, 이 탁한 놈아." "색깔은 3개만 쓰라고 했지!" 나는 어떻게든 3개를 써 보려고 노력했지만 꼭 '한 색깔만 더' 욕심을 내다가 매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산 혼합은 섞을수록 흰색이 되고, 감산 혼합은 섞을수록 검은색이 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그땐 몰랐다. 24개의 물감을 고르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살아간다는 것은 입시 미술과는 달랐다. 그림이면 다행이지, 인생이 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택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랐다. 가뜩이나 선택이 어려운 나에게 사람들은 뭐든지 선택을 하라고 내밀었다. 먹고사는 모든 자잘한 문제에 매번 선택에 기로에 서서 차라리 물감을 고르던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멍하니 컴퓨터를 보며 당장 1분 후에 뭘 할지도 모르는 멍청한 어른이 된다는 것도 그땐 정말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그래도 '꺾이지' 않고 매 순간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아닐까?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수 있는 어떤 결과를 향해 계속 도전하고 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리소 인쇄 워크숍'이라는 워크숍 안내 포스팅을 발견하고 말았다. 마침 그즈음이 '인쇄'에 대한 관심이 증폭했을 시기였다. 작년 이맘때쯤 책을 인쇄했던 게 컸다. 2022년에는 참 신기하게도 내가 책을 두 권이나 발간했다. 두 책 모두 내가 디자인을 했는데, 상업적인 성과는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인쇄소를 들락거리면서 이건 내가 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상툰 모음집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걸> 판매 홍보 포스팅
릴레이 익명 서간문 <익명의 우체통>
 여담이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걸>은 50권을 팔았고, <익명의 우체통>은 달랑 1권이 팔렸다. 사실 50권도 꽤 많이 팔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무경험자가 이렇게까지 해 본건 큰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본전은커녕 인건비도 안 나왔다(내 인생이 그렇지 뭐). 책 내용은 거진 인스타에 업로드되어 있다. 혹시라도 궁금한 사람은 인스타그램 @s_mooguenji를 참조하시길.


단 하나의 선택지

 '리소 인쇄 워크숍'은 3회 차의 코스였고 성미 급한 찍먹파인 나에게 적절한 코스 회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나는 리소가 뭔지 전혀 몰랐다. 그냥 레트로한 인쇄 스타일 이라고만 생각하고 별거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신청자가 많을 경우 커트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급하게 신청했다. 신청 사실을 잊어버릴 때쯤, 인쇄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워크숍 당일 퇴근 준비를 하는 그 순간이나 되어서야 급하게 리소가 뭔지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리소를 검색했을 때 가장 내 눈에 들어왔던 특징은 생산되는 잉크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색상은 완성도 있는 작업물의 경우 주로 3~4도 내외로, 팔레트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던 내게 어떤 면으로는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워크숍의 수강료는 단돈 5만 원이었고, 한번 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둘 수 있는 적정 금액이었다. 거리도 마침 회사와 집 딱 중간에 있어 돌아가지 않는 완벽하고 효율적인 동선이었다. 이쯤 되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수많은 워크숍 중에서 유일하게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워크숍이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 정말 그땐 몰랐다.


리소 일기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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