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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정용하 Jan 31. 2019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의 신간
<쾌락독서> 리뷰

책리뷰



“문유석 판사의 문체를 좋아한다. 때론 문체만 마음에 들어도 내용과 관계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문유석 판사의 책이 그렇다. 내용 중엔 나와 맞지 않는 내용, 집중 안 되는 내용도 있었지만 그의 문체 덕분에 그와 관계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젠 어떤 책이 나와도 그의 책은 믿고 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책은 늘 즐겁다.”  -2018년 12월 12일 출간한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의 신간 <쾌락독서> 추천사.      


    



# 그가 푼 책에 관한 썰.

읽고 나서 드는 생각 첫 번째. 읽은 책이 참 많구나. <쾌락독서>에 소개되는 책만 족히 몇 백 권은 될 것 같다. 그중에 대부분이 모르는 책이다. 그러다 보니 책 이야기를 할 때 집중이 안 된 부분도 있다. 그래도 중간 중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책은 항상 즐겁다. 술술 읽힌다. 나는 잘 읽히도록 쓴 글을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유석 판사의 글이 바로 그렇다. 한 챕터가 끝날 때까지 웬만해선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그것이 쉬워 보여도 대단한 능력이다. 대개 글 깨나 쓴다는 사람을 보면 어렵게 쓰거나 자기만 알아보도록 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그렇게 써야만 잘 쓰는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읽히지 않는 글은 죽은 글이다. 타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어쩜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그가 존경스럽기만 하다. 나는 지금껏 읽었던 책 대부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문유석 판사는 세세하게 기억해냈다. 책과 관련된 일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읽은 책도, 경험도 많은 것이라 하지만 그것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문유석 판사는 좀 얄미운 사람이다. 책에서도 고백했듯 자신은 놀면서 공부했는데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한 사람이다.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재수하던 한 학년 선배가 밖으로 불러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가서는 그에게 ‘놀려면 다른 곳에 가서 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절실하고 심각해 죽겠는데 옆에서 얄밉게 책이나 읽고 있으면, 심지어 좋아 죽겠다는 듯 킥킥- 대고 있으면, 얼마나 얄밉겠는가. 물론 그렇다 해서 후배를 내좇는 건 부당한 면이 있지만 나는 문유석보단 그 선배의 마음이 더욱 공감됐다. 아무튼 속된 말로 ‘재수 없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능력이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 

    




# 좋았던 점-깨어 있는 사람 깨어 있는 글.

깨어 있는 사람에겐 깨어 있는 글이 나오는 거였다. 문유석 판사 본인이 깨어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의 글은 2,30대 젊은 사람에게도 먹혔다. 나는 그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부장판사라 함은 엄청난 지위에 있는 사람이고, 소위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최상위 기득권임에도 그의 가치관은 그의 지위, 나이, 신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고집스러운 면이 생기는데 그에겐 그런 게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는 꼭 나이 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대학교 때 학생회장 됐다고 어깨에 잔뜩 힘들어가 캠퍼스를 떵떵거리면서 누비는 사람을 흔하게 봤다. 한 학번 위라고 좀만 잘못해도 후배를 쥐 잡듯이 잡는 선배는 또 얼마나 많던가. 나이와 상관없이 이 사회에 꼰대는 너무나 많다. 그런 문화 속에도 문유석 판사는 건강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게 참 대단했다.       



모든 것에 거리감을 잘 유지한 덕 같다. 그는 어디에 귀속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개인주의자다. 그러다 보니 출세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지도 않았다. 이념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념이든 허점을 갖기 마련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냥 그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 그걸로 인해 피아를 구분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리감 덕분에 그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던 것 아닐까. 이 점은 내가 평생 동안 견지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아쉬웠던 점-집중력이 떨어진다.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는 아쉬운 점도 분명하게 있던 책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책에 모르는 책이 너무 많이 등장해 그때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책 한 권을 한두 줄로 요약한 게 많다 보니 그것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부분이 나오면 대충 스킵해서 읽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또 책의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게 함정. 그래도 중간 중간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탐독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 <쾌락독서> 속 좋았던 구절.




집착하지 않고, 가장 격렬한 순간에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고, 놓아야 할 때에는 홀연히 놓아버릴 수 있는, 삶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태도랄까. 그렇다고 아무런 열망도 없이 죽어 있는 심장도 아닌데 그 뜨거움을 스스로 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강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삶이란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잠시 스쳐가는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눈부시게 반짝인다는 것을 알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건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p37     





나도 내가 김영하도 김연수도 황정은도 김은숙도 노희경도 아닌 걸 잘 알지만, 뭐 어때?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는 나만의 ‘풋내기 슛’을 즐겁게 던질 거다. 어깨에 힘 빼고. 왼손은 거들 뿐. p114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지금의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틀인 [국부론] [자유론] [법의 정신] [통치론] 같은 명저들도 결국 그 책들이 쓰인 시대의 과제를 그 시대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저라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고 그 시대에만 의미 있었던 부분도 많다. p168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p195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의감이야말로 가장 냉혹한 범죄자일 수 있다.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불타는 수사관과 법조인들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상범을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라. 자신이 믿는 정의 때문에 분노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또는 틀렸어도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보다 더 위험한 존재다. p219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 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p229        


  





# <쾌락독서> 보고 든 생각.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 그것도 일종의 버릇인 것 같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쓴다면 꼰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타인의 삶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참견은 나의 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일단 그 명제부터 틀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각자 다를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내 것이 무조건 옳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 것은 틀릴 수도 있다.     



그것의 연장선상으로 어느 경우에나 확신은 위험하다. 세상에 100%는 없다. 특히 사람간의 일은 더욱 그렇다. 하나의 관념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순간, 그 사람의 사고는 곪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너무 쉽게 내린다. ‘내가 살아보니까 이렇더라.’ 라는 말이 적용되는 대상은 본인 한 사람뿐이다. 그것이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이미 그 사람이 꼰대라는 증거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과 인생이 있다. 내 것이 옳을 수 있었던 건 나의 상황과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를진대 어떻게 문제의 해법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항상 이런 가능성을 염두해 두어야만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일종의 거리감과 같은 말이 될 수 있겠다. 나는 꼰대가 아닌 삶을 살고 싶다.




2019.01.31.

작가 정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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