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감성, 하루의 기록
감성에세이집 10편 '운명 같은 여자'
운명 같은 여자
“일종의 부적처럼
내게도 분명
운명 같은 일이 생길 거란
믿음을 버리지 못하겠다”
여러분은 운명에 대해 믿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인연이 74억 명의 지구인들 사이에 일어난 운명과도 같은 일일 수 있다. 우리는 매순간 운명의 연속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가 말하는 운명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극적일 때 또는 너무나 자연스러울 때 그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성이 다소 떨어진다. 로맨스 영화 같은 일상 속의 운명은 사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은 그저 주변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 한 삼 주간 몇 번 만나고, 이것저것 재다가 마음이 맞으면 사귀거나, 오랫동안 이성친구로 알고 지내다 어느 순간 눈이 맞아 사귀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운명의 희박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부적처럼 내게도 분명 운명 같은 일이 생길 거란 믿음을 버리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이 축적된 것에 따라 생겨난 믿음일 것이다. 그동안 이상하리만큼 운명 같은 일이 내게 여럿 있었다. 대부분 좋아했던 여자와의 인연이었다. 2015년 어느 여름날 단 한순간의 스침이 이토록 내게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별일도 아니었음에도 그 순간의 강렬함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무더운 더위가 며칠째 이어지던 8월의 어느 날. 나는 강남에서 일을 보고, 늦은 낮 시간에 사당역에서 4호선 당고개행으로 갈아탔다. 다행히 타자마자 자리가 나 편히 갈 수 있었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보통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지루한 이동 시간을 달래주는 고마운 물건이긴 하지만 스마트폰에 몰입하고 있으면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존재가 흔들리곤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철만 타면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삭막한 그림에 나까지 등장인물로 보태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 시간은 전철에 탄 사람들의 얼굴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 예쁜 여성분이 맞은편에 앉아 있을 때면 그 사람을 마음 놓고 쳐다본다. 더불어 그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나는 스마트폰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를 찾은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멍하니 앉아 맞은편의 예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에 빠져 있지 않았다. 나처럼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원해 보이는 원피스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꽤나 아름다웠다. 게다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 여자. 처음에는 그저 무감각하게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단 두 정거장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그녀도 분명 나의 시선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내내 단 한 번도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편안한 표정을 유지했다. 거기서 나는 그녀의 특별함을 보았다. 다른 사람에겐 없는 그런 특별함. 잠시 후, 4호선 전철은 어둠을 걷어내고 동작대교 위를 달렸다. 강렬한 햇빛이 강물을 타고 전철 안까지 닿았다. 그녀의 주위로 환한 빛이 둘러쌌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를 비틀지 않았다. 반사된 빛이 마치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 같았다. 전철은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신용산역까지 한 정거장 남은 상태에서 나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세로 나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태였다. 불현듯 그녀를 놓치면 안 되겠단 생각에까지 닿았다.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였지만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 결론지었다. 갑작스레 다가가면 무척 당황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그녀가 가는 곳까지 한번 따라가 볼까. 단 3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그러나 마음 안쪽에선 ‘넌 못해’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느새 신용산역에 도착했다. 나는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삼사 초간 망설이다 전철에서 내려버렸다. 이내 스크린도어가 닫혔고, 전철은 재빠르게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그녀를 따라갔다면 나는 그녀의 번호를 딸 수 있었을까. 내가 느꼈던 것처럼 우리는 운명이 될 수 있었을까. 만약이란 말이 나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아마 따라갔다 하더라도 그녀의 번호를 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낯선 여자의 번호를 딸 만큼 배짱 두둑한 사람이 아니기에. 이십 분 남짓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선명한 미련 자국을 묻혀버렸다. 그리고 일 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그 미련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것을 스스로 운명이라 여겼다.
그 뒤로 나는 스마트폰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에게 끌렸다. 그저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에 온전히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았다. 시간의 공백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은 불안하고 때론 지루한 시간을 견뎌보겠다는 의지의 사람이기에, 즉 자신의 존재를 지키겠다는 사람이기에 더 좋았다. 정확히 말해 운명을 기다린다기보다는 이상형의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혹시 또 모른다. 전철에서 만난 여자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운명처럼 또 만나게 될지.
작가 정용하/2017.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