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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y 05. 2020

신입에게 동기부여란

아직은 회사에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좀처럼 업무에 재미가 붙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재밌네!” 하는 순간은 있다. 일개 사원인 내가 만든 자료를 참고하여 다른 팀에서 업무를 진행할 때. 답이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모두의 노력으로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갈 때, 거기에 작게나마 기여한 것이 있을 때.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엑셀과 숫자 싸움을 하는데 쓴다. 얼마 전에는 그 숫자 싸움을 잘못해 사달이 났다. 고객사에 물량이 잘못 나간 것이다. 실제 재고는 100밖에 없는데 130을 보낼 수 있다고 보내버렸으니, 팀장님은 사라진 30을 어떻게든 구해오라고 압박해왔다. 여러 부서에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존재하지 않는 30을 만드는 건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실수를 만회하려면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책을 찾고, 정말 안 되는 일이라면 안 되는 사유까지 낱낱이 분석해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나는 왜 그럴 의지도 없었는지. 그다음 월요일, 고객사 출장이 잡혔다. 정 방법이 없으면 찾아가서 읍소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은 쉽게 고칠 수 없을 테니, 이제부터는 자료를 보내기 전에 숫자가 맞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다행히 팀장님은 “쪼그만 실수 한 번 했다고 퇴사 고민하는 거 아니지?” 라며 위로해주셨다.

"합격하고 입사하고 보니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사는 게 아닐까?"


입사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회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수가 말했다.

원희 씨는 ‘악’이 부족해요.

그렇지. 악이 부족하지. 영업 사원이라면, 회사가 필요한 부분은 명확하게 주장할 줄 알아야 하고 고객의 목소리도 내부에 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요구를 하러 전화를 걸어도 마냥 요구를 듣고만 있다가 아 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결국 원하는 건 하나도 얻지 못하고 전화를 끊곤 하니 말이다.


고심 끝에 선택한 회사고 나름의 적성을 살려 영업직군에 들어온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회사는 지금까지 경험한 세상과 별개였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니 영업도 적성에 맞겠지, 생각했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B2B 영업은 단순히 사람을 만나 재밌게 노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상대로 회사에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장백기 씨, 동기는 스스로 성취하세요.

드라마 미생 강대리의 유명한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그 동기가 회사 안에서 쉽게 안 찾아지는데요. 딱히 일 욕심도 없고 그냥 매일매일 야근 안 하는 게 동기라면 동기인데. 어떡하죠. 회사 밖에서 찾아야 하나요.


오랜 회사생활을 하신 분들이 쓴 글 중에 회사는 자아실현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글을 종종 발견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일 테니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회사에서 자아를 찾는 게 가능할 거라고 믿고 싶다. 내 일과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이 자아를 감추고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는 의미 없는 공간이라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웹툰 미생. 웹툰을 통해서도 일을 배운다.

다시 월요일로 돌아와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고객사로 외근을 나갔다. 다행히 고객사의 부장이 더 큰 숫자 실수를 해버려 내 실수는 묻히게 되었다. 이를테면, 나는 130만큼 있다고 보냈는데 그 부장님은 또 숫자를 잘못 보고 80으로 착각한 상황이었다. 역으로 20이 모자란 상황이 되었으니, 우리 쪽에서도 할 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고객을 직접 만나고 오면 사무실에서 엑셀 파일로만 오가던 숫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의미 없는 숫자 놀음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 어느 하나 허투루 버려지지 않고 실재하는 숫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 지점에서 영업의 본질을 만난다. 고객이 원하는 무언가를 내어주고 돈을 받아오는 것. 그 무언가가 다른 부서들을 구워삶아 얻어내는 어려운 결과물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간단한 말 한마디일 때도 있다.


숫자와의 싸움이 지겨워질 때쯤, 현장을 나간다. 불현듯,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무언가를 배우며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이 회사를 다닐만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내일은 또다시 엑셀 표와, 메일과, 숫자와 싸워야겠지만. 재미가 없어 괴롭다고 퇴사한 들 당장 대안이 없으니 우선은 이렇게라도 동기를 찾아봐야겠다. ‘칼퇴’가 유일한 동기가 된다면 나는 또 시간을 버티며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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