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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01. 2022

"2+2=4"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조지 오웰 <1984>와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민주주의’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서일까. 조지 오웰의 ≪1984≫를 읽는데 공감이 잘 안 됐다. 주인공 윈스턴은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 ‘오세아니아’의 시민이다. 개인의 모든 사생활이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 장비를 통해 낱낱이 보고되는 곳. 모든 사상과 발언이 통제되고, 오직 ‘빅브라더’의 말만 진리가 되는 곳이다. 빅브라더가 “2+2=5”라고 하면 그것이 fact가 된다. 2+2=4가 아닌가요?라고 하는 순간 교화의 대상이 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다. 


당이 “2+2=5”라고 말하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되는 세상은 어떨까. 물론 가까이에 북한이라는 실체가 있긴 하나, 이런 사회는 202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민주주의는 다르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며 합리적 토론이 사회 진보의 뼈대가 되는 체제다. 그런 체제를 누리는 국민들은 명예롭다. 그 이름처럼 나라의 주인이 국민 스스로가 되기 때문이다. 명예는 그런 곳에서 나온다. 스스로 선택한 가치에 따라 삶을 누리고 있다는 자신감.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다. 만약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이에 따르게 마련이다. (조지 오웰 ≪1984≫ 中)

집권여당이 MBC를 형사 고발했다. 자막을 조작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다. 대통령을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적극 유포했다는 거다. 이 지점에서 ≪1984≫는 21세기의 한국에도 유효해진다. 그가 훼손당한 명예란 무엇일까.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하지도 않은 발언을 자막으로 달아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 민생 챙기기 바빠 죽겠는데 그깟 사적 발언 하나로 물고 늘어지는 것?

헌법상 대통령의 지위는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즉 대통령은 존재 자체가 공적이며, 석상에서 발언되는 모든 말에 사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박사가 문자메시지로 부부싸움을 할 때, 대통령이 “우리의 모든 통신 내역은 후세에 기록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물며, 전 세계 정상들이 모인 외교의 장이었다. 신중하고 또 신중했어야 할 대통령이 장관과 대화를 나누며 ‘이 새끼들’이라는 비속어를 썼다. 이를 “사적 대화였다”며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부끄러운 것은 그래서다. <1984> 속, 아무 의심 없이 빅브라더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닮았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지 오웰 ≪1984≫ 中)


정작 훼손되는 명예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다. 나라의 진짜 주인.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과 앞뒤 안 맞는 해명을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사람들. 2+2는 4라고 믿고, 그렇게 말할 자유가 있는 사람들. 

대통령실은 ‘비속어 논란’이라고 불리는 것도 불편하다며, ‘발언 논란’으로 말을 바꿔달라고 했다. 후보 시절부터 줄곧 ‘자유’를 강조했던 윤석열 대통령. “기억이 안 난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와, 비속어 발언을 가짜 뉴스로 호도해가는 대통령실이 등진 것은 다름 아닌 자유였다. 본 것을 봤다, 들은 것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2+2=4”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대통령은 ≪1984≫속 공산당의 무서운 슬로건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유효했음을 보여줬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1984≫)

참고도서 : 조지 오웰 디 에센셜 ≪198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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