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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찌 Jun 26. 2020

출산 후 병실 가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자궁동맥색전술이라니


순산하세요-

출산이 임박해 왔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그 말이 얼마나 감사한 말인지 몰랐다.





둘째는 출산하고 나서부터가 고비였다.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게 가진통 한번 없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통이 느껴졌다.

옆에서 자고 있는 첫째를 더 재워보겠다고 배가 아픈 와중에도 잠에서 깨려고 하는 아이를 끌어안고 '수면연장'을 시키고 있었다.


'진통이 왔구나' 느낀 순간 진통 측정 어플을 다운받아 진통 간격을 측정했고, 19개월 전 느꼈던 고통의 순간이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간격이 짧아지면서 이제 병원에 가야겠다 생각하고 친정언니한테 연락을 했다.

첫째 때 진통이 온 것 같아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했는데도 반차 시간에 맞춰서 여유롭게 지하철을 타고 온 남편 대신.


둘째를 임신 중인 언니가 파주에서 부천까지 나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출발했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남편에게도 빨리 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출산하러 가기 위해 나는 샤워를 시작했다.

첫째 때도 먼저 나를 데리러 왔던 언니는 벽 붙잡고 샤워하고 있는  보며 미친년이라고 한마디 했었고, 둘째 출산을 앞두고도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며 샤워를 하고 있었다.


게으른 나는 출산 가방이라는 걸 미리 싸 본 적이 없다.

대책이 없는 건지, 게으른 건지. 그냥 무식하게 용감한 걸로. 막상 가보니 그렇게 필요한 것도 없더라. 병원이 가까워 남편이 왔다 갔다 하며 가져다주면 그뿐.

그렇게 진통이 멈출 때마다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첫째와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다.


이번엔 다행히 병원으로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에 남편이 와있었고, 주차하러 간 언니 대신 남편과 진료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병원 점심시간이라 바로 분만실로 올라가라는 말에 힘겹게 다시 이동했고,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내진, 제모, 관장의 절차는 없었다.

바로 가족분만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고 무통주사를 맞을 시간도 없이, 그렇게 병원에 간지 한 시간도 안 돼, 점심시간에 가서 점심시간에 세상에 나온 둘째.

첫째의 3시간 기록을 깨버렸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애 낳으러 병원 간다는 말을 남긴 지 몇 시간도 안 지나서 둘째 사진을 보냈더니 '넌 역시 출산 체질이야'라는 답장들이 왔고, 뿌듯해하며 병실로 올라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분만실에서 태반이 다 나오고 나서 자궁수축을 확인하는 회복 과정을 거치고 병실로 올라가야 하는데, 간호사들이 몇 번씩 들어와서 확인해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가 다시 왔고, 수십 번이나 배를 눌러도 그때마다 계속해서 출혈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웅성웅성. 잠시 후 긴장하고 있는 나와 남편에게 와서 대학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쉽게 출산하고 병실로 가질 못하다니. (세상에 쉬운 출산은 없다. 별 탈 없이, 긴 진통 없이 빨리 출산했을 뿐)

막 태어난 내 새끼는 이 병원에 혼자 두고 엄마 아빠는 대학병원으로 가야 하는 현실.


대학병원 이송 과정도 험난했다.

전원 신청을 받아준 병원으로 구급차를 타고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그 병원에선 자리가 없다는 말만.

결국 다시 여성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추운 2월에 양말도 신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신나게 달리는 구급차 침대 위에서 살겠다고 있는 힘껏 안전봉을 쥐고 버티면서 든 생각은 한 가지.

'이번에도 산후조리는 망했구나..'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서 다른 병원의 전원 신청이 받아들여지길 기다리며 피로 물든 애꿎은 침대 시트만 갈아지면서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 상황에 정신이 멀쩡하다는 게 어찌나 괴롭던지.


그리고 다시 이송된 대학병원 응급실에선 더 큰 고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고, 이 사람 저 사람 내 배를 눌러대고 손과 기계들을 밑으로 넣어 자궁 상태를 확인했다.

끝까지 붙들고 있던 내 끈질긴 정신력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결국 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소변줄을 꽂게 되었고, 몇 가지 영상검사들을 한 뒤 자궁수축이 안돼서 출혈이 계속되니 혈관을 묶어주는 시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들어도 이름 모를 시술과 정확한 설명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한 게 자궁동맥색전술이었다는 것만 검색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후 2시쯤 출산을 하고도 오후 10시까지 침대에 눕혀져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10시쯤 시술에 들어가서 수면마취를 바라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술 부위만 마취를 했고, 나는 다리를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는 미션까지 받았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어찌나 졸리던지

하필이면 그 와중에 졸다가 다리를 움직여서 한 소리 듣고.

빵빵하게 틀어 둔 에어컨 바람에 열도 있었던 나는 추워서인지, 겁이 나서인지 으슬으슬 떨고만 있었다.



30분 정도 걸렸을까?

무사히 시술이 끝나고 고위험 임산부 병실로 올라왔다. 응급실에 오면서부터 남편은 같이 못 있게 하고 계속 혼자여서 어찌나 외롭던지.

기다리던 가족들 얼굴을 보니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나중에 들으니 남편은 응급실 밖에 혼자 있으면서 계속 검색만 하고 있었는데 자궁수축이 안돼서 이 시술을 받다가 최악의 경우 죽을 수 있다는 글을 보고 혼자서 애들 둘을 어떻게 키우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더라.ㅡㅡ)

드디어 남편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고위험 임산부 병실이라 밤에는 보호자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나가 달라는.

심지어 병실에 환자는 나밖에 없었는데..

너무 추워서 떨고 있으니 이모가 꽁꽁 싸매 준 이불마저 열이 나서 이불을 덮으면 안 된다는 간호사의 제지에 뺏겨버렸다.


놀라서 달려온 가족들과 남편은 쫓겨나듯 떠나고 오롯이 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밤

난생처음 산소호흡기란 것도 껴보고 주사를 많이 맞아야 한다고 목까지 구멍 뚫어 주사를 맞고 있었으니 온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 관은 다 삽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혼자 남은 밤은 시술받기 전보다 더 아팠다.

허리도, 다리도, 배도 안 아픈 곳이 없는데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 정자세로 눈물만 흘리며 잠도 잘 수 없는 밤을 혼자 보내며 남편이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기분 탓인지 가족들이 있는 낮에는 참을만했는데, 밤이 되고 나 혼자 남아서 자려고 하면 어찌나 아프던지.

하루는 너무 아파서 계속 무섭다고 징징댔더니 새벽부터 1층 로비에 와서 기다리다가 면회시간이 되자마자 올라오기도 했다.


3일 정도 고위험 임산부 병실에 있다가 점점 살만해지고 자궁수축도 잘되고 있다고 해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때까지도 '그래, 나 원래 이렇게 건강하고 회복도 빠른 사람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드디어 일반병실에 하루 입원 후 다음날 퇴원했고

엄마도 없이 혼자 여성병원에 있던 아가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기 울음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쉬어있던 내새끼.

엄마도 없던 병원 신생아실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을지..

1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날 것 같은 둘째 출산기.




그리고 다시 다가오고 있는 셋째의 출산예정일.

다짐해본다.

진통이 오면 절대 참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가기로.

이번엔 정말 끝까지 '순산'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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