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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Feb 28. 2023

오독하지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20

특정 인터넷 페이지에 접속하기 위해 신호등이나 사자 그림을 찾아내는 테스트를 거쳐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의 정체는 계산된 알고리즘 연결망 문화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복종이다. 빅데이터 기반의 AI는 모든 시간의 취향, 자료, 정보를 모아 영원성을 획득하는 비가시적인 헤테로토피아이다. 끊임없는 과거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박물지는 끊이지 않는 유입과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탈시간적인 맥락에 놓이면서 방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해 나간다. 가늠할 수 없는 정도로 자라나고 있는 아카이브는 양적 과잉 상태를 전시하면서 사람들을 압도하며 미학적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미(美)’는 현시적 특성에 의해 추상의 베일에 싸여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진(眞)’, ‘선(善)’이 육화된 호의적 가치로 간주된다. 미의 개별적인 체험 가능성은 피투적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탈사회적인 감상이나 상상은 자기로부터도 벗어나 극단적으로 사유가 절단되어 자연 발생이 시작되는 동시에 끝나는 과정만을 반복해야 하는 모순적인 독단자가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어떠한 콘텍스트에라도 구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대와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외적인 요인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작품을 감상할 때 선형적 시간의 세계에서 잠깐 벗어나 잉여 시간을 보낸다. 다이내믹한 세계 속에서 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틈새에 들어간다. 바깥의 담론이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주술과 선동에 저항하는 시공간 속에서의 사유를 통해, 오롯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내재되어 있던 지극히 개인적인 윤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허위 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던 감각들을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자유롭게 반성한다. 권태롭고 폭력적인 규범이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일상적 우로보로스의 혀를 덮고 누워있다가도, 때때로 입에 함께 물린 그의 꼬리를 똑같이 물어뜯으면서 변증법적 사유를 반복한다. 게으름, 무위 따위의 사회적 일탈은 개인적 차원에서 역동적인 진퇴의 반복이자, 희망의 묵시록보다는 절망의 원환 속에서 자아와 세계를 괴롭히며 변혁하려고 하는 반항아의 태도이다.

    

챗GPT의 등장은 현대인의 봉기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강력한 도슨트의 출현, 저임금 노동자들과 방탕한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디지털 윤리 규범은 집단 지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의 단일화라는 압제를 시작하려고 한다. 오독을 할 때에도 규율을 지켜야 하며, 정치적 독해의 민주성은 인간성과 함께 물음표가 되어 간다.

    

□ I’m not a robot. (○/△/✕)  

 I’m a human being. (✕/△/○)



이 글 어딘가..

김홍기(2022). 『지연의 윤리학』

이장욱(2019). 『혁명과 모더니즘』

로지 브라이도티(2022). 『포스트휴먼 지식』

미셸 푸코(2014). 『헤테로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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