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억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기다림의 개념 역시 달라진다. 블라디미르는 분명히 흘러간 선형적 시간의 흔적들을 발견하지만, 그것들이 ‘어제’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지리멸렬한 말과 행동의 반복 속에서, 때와 장소조차 예상할 수 없는 시공간 아닌 시공간에서 단 하나 관객(혹은 독자)에게, 그리고 등장인물들에게 확실한 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에스트라공의 상처, 무대에 놓여 있는 럭키의 모자가 어제와 오늘의 연속성을 보장하지 않는 듯이, 오늘 역시 내일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역시 수시로 단절된다. 작품에서는 반복적으로 떠나자고 결심했다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마음을 접는다.
그러나 그들이 고도를 만나는 것은 곧 모든 것의 ‘정지’를 의미한다.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세계에서 도무지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그들이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장치는 역설적이게도 만날 수 없는 고도이다. 고도의 말을 전하러 온 소년을 블라디미르가 차마 붙잡지 못하는 것 역시 고도를 부재로서 존재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그 역시 존재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등장인물 사이의 유의미한 대화 역시 고도와 마찬가지로 부재한다. 그들은 소통을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을 하기 위해 말한다.
에스트라공(E) : 그래, 그동안 우리 흥분하지 말고 얘기나 해보자꾸나. 어차피 침묵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블라디미르(V) : 맞아.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거야.
E : 그래야 생각을 안 하지.
V : 지껄일 구실이야 늘 있는 거니까.
E : 그래야 들리질 않지.
V : 우린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
민음사판 107쪽.
침묵을 지킬 수 없기에 끊임없이 내뱉는 문장들. 포조의 노예인 럭키의 말은 한층 더 짓이겨진다. 럭키는 주변의 물리적인 폭력이 그를 막을 때까지 명령으로 인해 시작한 자신의 장광설을 멈추지 못한다. 의식의 흐름 그 이상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단어의 폭격은 역시나 극의 흐름에서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 말이 멈춰진다는 점에서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반복적인 대화의 완결과 유사하다. 그들 역시 ’고도를 기다림’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온전히 마음대로 조절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은 생의 마감조차도 나무의 성하지 못한 상태로 인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이런 완전한 무능함은 다시 그들에게 고도에 대한 기다림을 강요하고, 고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고도에 대한 기다림을 강요받았고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같은 행위를 또 반복할 것이고, 결국 끝없는 기다림에 갇힌 그들에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저 ‘어느 날’의 순간들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반복이라도 변화는 있기 마련이다.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민음사판 7쪽.
완전히 똑같은 자세와 호흡으로 구두를 벗고 있을 수는 없으며, 한참 밟히고 난 후 럭키 모자의 형태도, 럭키에게 발로 차인 에스트라공의 상처도 미세하게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체의 원자들 역시 작은 진동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의 부조리함은 변화이고, 이 필연적인 변화에 대한 믿음이 현대인의 권태를 고통으로 구원하고,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고 말을 하는 럭키처럼 예정된 불화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반항과 일탈을 하며 침묵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패러다임이 전환될지라도 누적되던 피로가 늘 새로운 피로로 다시 바뀔 뿐이며, 늘 어리석고 모자란 자기 자신의 생경함 속에 살아갈 뿐,
우리는 절망으로 숨쉬는 와중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