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몰랐는데 조울증이라길래

by 정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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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들 이렇게 살지 않아요?






혼자서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자, 병원에서 제일 자주 말했던 말이다.

아빠를 닮아 무던하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무감각하고 무던하고 아무 생각 없는 애는 드물 거라고 여겼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감정이 다채로웠는데, 나는 그런 걸 잘 못 느꼈으니까.



그냥 나는 잔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무던한 사람.

근데 그 잔잔함 속에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지면, 더는 잔잔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친구의 권유로 집 근처 정신과를 방문했다. 선생님이 친절하시고 잘 봐주신다고 소문난 병원이라 예약이 힘들었지만, 운 좋게 비어 있는 자리에 넣어주셔서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는 우울증.




수치가 꽤 높아서 전기치료를 권장하고 싶지만, 일단 약으로 시도해 보고 차도가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솔직히 기분 나빴다. 이제 우울증이라는 꼬리표가 생긴 것 같아서. 그래도 나는 시키는 건 잘하는 편이라, 처방받은 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약을 먹고 나니 점차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활기가 돌았고, 인생 살맛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세상이 인스타 하트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퇴근하다 너무 행복해서 아빠한테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 아빠 고마워. 그냥 너무 고마워. 아빠 덕분에 내가 이렇게 컸다고,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전화기 너머 아빠는 감격한 목소리였다. 그럴 수밖에. 나는 한 번도 아빠한테 이런 표현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갓생'처럼 새벽운동도 시작했다. 나처럼 잠 많은 사람이 없는데, 내가 새벽운동을 한다니. 나 스스로가 너무 멋져 보여서 기분이 미칠 듯이 높이 올랐다. 와, 나 진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업을 해보자. 이것저것 인터넷에서 팔 수 있을 만한 걸 전부 샀다. 포장하고 판매도 시작했다. 장사가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을 걸으면 문득 도시에 대한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머릿속에 줄줄이 떠올랐다.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다들 이런 생각을 못 하지? 나 진짜 최연소 국회의원 한 번 도전해 볼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너무 들떠있었다. 좋게 말해 들떠있던 거지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과잉, 망상 그런 거. 모든 게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감정은 현실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게 조증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배터리가 방전됐다.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고, 몸은 무거웠다. 운동을 가지 못한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워 있다가 예전에 아빠가 나에게 했던 상처 주는 말이 떠올랐고, 분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전화를 걸었다. 울면서, 소리 지르면서, 아빠 때문이라고, 죽고 싶다고 악을 질렀다. 벌떡 일어나 노트를 한 장 한 장 찢었다. 미련 없는 사람처럼, 글씨를 미친 듯이 휘갈겨 썼다.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과 미안한 사람들에게는 편지 쓰듯. 아빠에게는 전혀 미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주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아빠를 원망하며 죽을 테니 평생 벌 받으며 살아"라고 써 내려갔다.




결국, 동네 정신과에서 대학병원으로 이동하게 됐다. 검사를 마치고, 교수는 조용히 설명했다. 단순한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이라고. 조울증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뒤로 설명한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됐다.




"제가 왜 조울증이에요? 저 회사에서 일도 잘하고 있고, 친구도 많고, 잘 놀러도 다니는데..."




내가 가진 조울증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머리 산발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정신줄 놓은 모습. 어? 순간 또 욱 짜증이 났다. 난 멀쩡한데 내가 비정상이라고?

아무도 나에게 비정상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비정상이라고 판단 내렸다.



집에 와서 '조울증'을 검색했다. 인터넷에서는 감정 기복 좀 심하면 "나 조울증인가?" 드립 치는 글들이 넘쳐났다. 나도 그랬었는데. 그냥 웃겼다. 아니 안 웃겨. 그냥 쪽팔렸다. 창피하다는 단어로는 부족해 진짜 그냥 쪽팔림 그 자체였다.

아무튼 갖기 싫은 병명이 붙은 후, 한참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근데 내가 인정 안 하면 누가 뭐 알아주나 싶다.

이제는 그때의 감정들을 다시 돌아볼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그래 그때 그건 우울이었고, 이건 조증이었구나.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니까, 한번 잘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걸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아서 이렇게 정리하는 게 맞을까 고민을 수도 없이 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내 감정이 우울과 조증 그 어딘가에 있는지 가늠을 못하기 때문에 이 기록은 어쩌면 미래의 내가 잘 볼 수 있게 적어두는 기억하기 위한 시도? 그런 거.

우울과 조증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