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2022)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출연: 해리스 디킨슨, 찰비 딘, 우디 해럴슨, 돌리 드 레온, 즐라트코 버릭 외
장르: 코미디/드라마
등급: 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 147분
시놉시스:
호화 크루즈에 #협찬 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각양각색의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구조 대기뿐인 사람들… 이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슬픔의 삼각형>은 <더 스퀘어>(2017)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내놓은 신작으로 해당 작품 역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전작에서는 지식인의 위선적 면모를 신랄하게 풍자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계급적 이슈를 종횡무진으로 다룬다.
영화는 크게 3부의 구성을 하고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칼(해리스 디킨슨)과 아야(찰비 딘)의 이야기를 통해 젠더 이슈를 메인으로 다룬다. 동시에 첫 장면에서의 'H&M과 발렌시아가' 시퀀스처럼 영화의 냉소적 태도와 거침없는 풍자를 명확하게 가이드하는 역할을 한다.
#이탈
칼과 아야가 속한 모델 업계는 타 직종과 다르게 남성 모델이 여성 모델에 비해 1/3 수준의 페이를 받는다. 성별임금격차가 남성에게 작용하는 특이한 상황은 오히려 여성이 '미(美)'의 영역에 한해서만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다는 성역할 고착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어찌됐건 칼은 아야에 비해 수입이 적은데, 남성으로서 데이트 비용을 더 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은근한 불만을 갖고 있고 결국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불만이 터져 버린다. (자기 입장에서) 성평등을 외치는 '쪼잔한 남성' 칼의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코믹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칼의 상황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여러 상황들의 축소판으로 느껴진다.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채 대두되는 '역차별' 담론을 꺼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젠더 이슈를 다룬 영화들의 조류를 이탈한다.
#전복
인플루언서인 아야가 호화크루즈 티켓을 협찬 받으면서 칼과 아야는 크루즈에 승선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배경의 상류층 사람들을 만난다. 2부에서 영화는 수평의 공간처럼 보이는 배 안에 수직적 계급구조를 배치한다. 여유롭게 배 위에서 햇살을 쪼이는 사람들은 부유한 백인 상류층이다. 그들이 돈을 모은 방식은 '무기를 팔아서', '똥(비료)을 팔아서', '기술을 팔아서' 등등 다양하지만 인종적 구성은 매우 획일적이다. 그리고 이 부자들을 떠받들며 후한 팁을 노리는 직원들 역시 백인이다. 부자들보다 경제적 계급은 낮지만 인종적 계급은 동일한 2등 승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 아래에서 청소와 기기 설비 등 각종 궂은 일을 도맡는 아시아계 직원이 이 배의 3등 승객이다. 서구 열강 중심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든 부의 불평등과 인종적 착취가 배 한 척에 고스란히 담겼다.
깔끔한 부자들의 위신과 체면을 영화는 가만 두지 않는다. 악천후와 파도가 몰아치는 궂어진 기상 속 진행된 선상 디너 파티에서 부자들은 심한 멀미로 인해 먹은 음식을 연신 토하고 설사한다. 배설물 속에서 뒹구는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돈으로 빳빳하게 세운 부자들의 체면이 마구 구겨진다. 이후 보여지는 '똥 팔이' 디미트리(즐라트코 버릭)와 토마스 선장(우디 해럴슨)의 대화는 압권이다.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철저한 자본주의자가 된 러시아인 디미트리,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자본가들을 위해 호화크루즈 여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토마스. 이들이 술에 진탕 취한 채 서로의 이념을 대변하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조롱하는 모습은 이념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냉소주의적 화룡점정이다.
배를 쥐고 흔드는 악천후, 만취한 선장. 호화크루즈의 위기는 그러나 이곳이 아닌 악천후가 맑게 개인 후에 찾아왔다. 공해상의 해적은 수류탄(크루즈의 승객 중 무기 제조업체 대표의 제품)을 던져 크루즈를 파괴하고, 몇 명의 생존자만이 인근의 섬으로 떠내려온다. 선상 계급의 전복이 시작되었다. 마치 자본주의에 의한 소외로 자리를 빼앗긴 제3세계의 주민이 체제에 일격을 날리듯이(실제 테러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좌초
이제 섬에는 호화 크루즈에서 떠내려 온 일곱 명의 생존자가 남았다. 다양한 인종과 경제적 계급, 그리고 남자 셋 여자 넷.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무인도에서 이들은 기존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 능력에 의해 다시 위계질서를 세운다. 여기서 크루즈의 3등 승객이었던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사냥 및 조리 실력으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우두머리의 아래로 폴라(비키 베를린)와 아야 두 여성이 빠르게 합류하면서 나머지 남성 집단(과 장애 여성)을 통솔하는 모계 사회가 형성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야가 미(美)의 우수함으로 인해 많은 보상을 얻었다면 이곳 무인도에서는 칼이 미적 기준으로 애비게일의 눈에 들어 식량을 따로 배급받는 특혜를 얻는다. 드미트리의 롤렉스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똥' 취급을 받음은 물론이다. 기존의 계급 사회가 완벽하게 뒤집어진 자리에 마련된 새로운 사회. 과연 이 사회는 우리가 바라던 사회인가?
1부에서 칼은 아야에게 성역할의 구분 없이 평등하기를 요구했다. 2부에서 드미트리의 아내는 크루즈의 직원에게 평등한 관계형성을 위해 같이 풀에서 수영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크루즈의 전 직원이 업무를 멈추고 수영을 즐겨야만 했다. 그러나 3부에서 어떠한 신분의 구속도 받지 않는 여섯 명의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을 형성해 서로를 감시하고 구속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인도에서 전복되었지만 그 자리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재빠르게 좌초한다.
자본주의의 탄압과 폭력, 착취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떤 혁명가들은 체제의 전복을 외친다. 그러나 단순히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이상사회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슬픔의 삼각형>이 사회에 던진 냉소가 그래서 뼈아프다. 만약 무인도에 러시아 자본주의자 드미트리가 아니라 아메리칸 맑시스트 토마스가 살아남았더라면 무인도 사회의 모습은 어땠을까. 잠깐 덧없는 상상을 해보지만 영화가 전한 강력한 냉소는 이내 공허한 상상을 차단하고 만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