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만남
대학 졸업 후 도자기 실무 일을 잠시 접고 아동 미술학원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아니어도, 유아교육 전공자가 아니더래도 미술학원에서도 보육이 가능했던 시절이었고 그때는 아이들도 많았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이수하면 나오는 미술 실기교사자격증을 들고 미술학원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벼룩시장 구인광고에 올라온 모집광고를 보고 처음 찾아간 곳이 하필 그곳이었다.
때는 3월. 이력서를 본 원장은 별 숙고 없이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난 원감손에 이끌려 여러 선생님들과 학원 곳곳을 소개받고 신학기라 어수선한 점을 이해해 달라 하셨다. 깔끔한 4개의 교실과 피아노실 겸 체육실이 널찍해 미술학원 치고 꽤 큰 편이라는 생각이 학원의 첫인상이었다. 오후의 미술학원 풍광은 선생님, 학생들 모두가 바빠 보여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예의라 생각했다. 뭐 어찌 운 좋게 이력서 낸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하게 되어 좋았고 모름지기 낯선 일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적응하기 마련이지 않나? 일은 하면서 배우는 게 제일 빠르지. 8시 출근시간에 맞춰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떨림과 잘 해내리란 각오로 원에 들어서자 갑자기 날 '4세 피카소반' 담임선생님이라 부른다. 담임요? 누가요? 제가요? 몇 살요?
피카소반의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퇴사로 일주일간 원감선생님이 맡고 계셨던 모양인데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9시 반부터 등원하는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원감선생님은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새 담임을 맡게 된 김 아무개라며 소개해주신다. 4세 반. 말이 4세이지 태어난 지 2~3년 된 아이들이다. 기저귀 찬 아이, 우는 아이, 냅다 바지에 쉬하는 아이, 업어달라는 아이, 천지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 원감선생님이 계셨지만 일곱 명의 각기 다른 아이들만큼 내 머릿속도 아수라장이었다.
미술강사 모집 공고에 이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점심시간에는 토하는 아이, 식판 엎는 아이, 계속 우는 아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밥 먹고 바로 하원하는 아이들 뒤로 2시부터 미술강사가 되어 초등학생 대상으로 한 시간 간격으로 3타임을 가르치니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하루종인 계속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둔다고 어떻게 말씀드리지?' 바로 지난주까지 조용한 환경에서 초집중하며 도자기를 만들었던 나의 정서와 정신 건강에 확실히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았다. 이건 진짜 아니지. 그런데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자 원감선생님 왈, 선생님 한 분이 부족해 신학기 시즌이 너무 힘드셨는데 내가 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선수 친 말씀에 그만둔다고 입도 못 떼고 그렇게 첫날은 머릿속이 문드러진 상태로 집에 왔다. 약해빠져 말 못 했던 자신을 야속해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공포심으로 둘째 날을 맞이했다. 업어달란 아이를 반나절이나 업고 다니며 다른 아이 기저귀를 갈고 식판을 나눠줘야 했다. 오바이트하면 치우고 울면 달래주었다. 내가 내가 아닌 나날. 일주일째 되던 날까지 그만둔다 말 한마디 못 꺼내고 견뎠다. 내가 없으면 힘들어하실 착한 원감선생님과 정민이를 업어줄 사람이 없는 뻔한 교실분위기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약한 마음에 그만두질 못하고 몸과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어느새 2주 차에 들어섰다. 2주 차부터 원감선생님을 빠지고 오롯이 담임인 내가 반을 이끌어 가야 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몸이 익숙해져 있었고 놔 버렸던 멘털이 어느새 돌아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민이를 등에 업고 토하는 선영이에게 아침간식을 조금만 주었다. 매일 바지에 쉬하는 해석이와 미리 화장실을 갔고 뛰어다니며 사고 치는 정재에게 끊임없이 재미난 장난감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시절 채르니 30까지 배웠던 실력으로 피아노를 치며 아이들에게 동요를 불러주었다. 기저귀를 차고 있던 두 명의 아이 모두 이제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감격적인 성장을 마주하며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무렵 난 능숙한 4세 담임이 되어있었다.
"띰띰미~(선생님)"라고 부르며 달려와주는 아이들이 너무 좋았다. 예전부터 내가 이토록 아이들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그냥 한 달, 한 달 넘어갈수록 커가는 피키소반 아이들이 너무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어도 이 아이들만큼을 내가 꼭 챙기리라... 혹시 있을 수 있는 극단적인 모든 재난 상황에서 아이들을 모두 챙겨서 탈출하는 과정을 혼자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 하고 항상 다칠까 걱정하고 아플까 염려했다. 이미 일상은 이 아이들을 위한 준비와 마무리로 가득했다. 오후 미술반도 좋았다. 초등 친구들도 나를 잘 따랐고 아이들 모두가 예뻤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미술프로그램 짜는 게 재밌었고 재량껏 찰흙놀이와 도예 수업도 한 번씩 넣었다.
"난 유아교육이 맞나 봐. 아이들이 너무 좋네" 출근 직 후부터 한 달 내도록 힘들다고 울며 토로했던 여자 친구가 어느새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좋다고 난리다.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에게 피카소반 이야기를 하면 내가 힘들어하던 그때를 함께 회상해 준다. 그 피카소반 4세 담임의 경험이 어두운 긴 터널 같던 나의 마음에 빛을 밝혀주고 꿈을 주었다. 내가 도자기공방을 하게 된다면 무조건 아이들을 위한 공방을 만드리라 마음먹게 되었고 결국 몇 년 뒤 도예미술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피카소반에서 가장 힘들었던 친구가 오바이트하는 선영이었다. 4세답지 않은 야무진 모습을 보이다가도 밥만 먹었다면 토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통화도 많이 했는데 대화 중 선영이가 유독 쥐포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사비로 쥐포를 사서 밥반찬으로 올려주기도 했는데 그날은 점심을 잘 먹어주었다. 아무 탈없이 점심을 잘 먹어준 날은 사진을 찍어 어머니께 전송하며 그렇게 선영이의 식습관을 잡으려 서로 노력했다. 선영이의 오바이트 횟수가 점점 잦아들었고 어느새 잘 먹는 아이로 변했다. 선영이의 사연으로 당시 'KTF적인 생각' 수기공모전에서 대상을 탔었다. 물론 폰의 이용 가치를 극대화해서 약간의 각색도 있었지만 결국 교실에서 선영이의 오바이트는 사라졌으니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도였고 결과였다.
정재, 중규, 해석이, 정민이, 규린이, 민주, 선영이. 지금쯤 20대 중반이 되었을 내 생의 첫 제자들 모습이 여전히 눈에 아른거린다. 4세였기에 울라샘이란 존재는 이미 기억너머 사라지고 없겠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부디 어디에서든 아무 탈없이 자신을 사랑하며 잘 살아주고 있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