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셀리케이건의 책을 읽고. ) 이 책을 다 읽으면 죽을것 같기도..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은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임사체험,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라는 내용의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란 책은 다르다.
저자 셸리 케이건은
(Shelly Kagan)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짚어본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Michael Sandel)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로 불리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이 책에서 다소 무겁고 어둡게 흘러갈 수 있는 주제를 토크쇼 사회자에 비견되는 특유의 유머감각과 입담으로 흥미롭게 풀어간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방대한 철학사를 다루면서도 난해한 철학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만의 교수법은 "대중철학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강의할 때 항상 책상 위에 올라간다고 해서 '책상 교수님'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를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답게 죽음, 영혼, 나, 사후세계를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들여다본다.
귀납법이 아니라 연역법을 위주로 설명하는 책이다.
이책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뻔한 결말을 굉장히 어려운 연역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싶다면
배고프다는 것은 무엇인가? 먹지 않은면 어떻게 되는가 를 들어서 그 연역적으로 논리를 추론하고
결국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된다의 결론에 도달하며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의 논증으로 이루어 지는 책이 있다면 어떨까?
그 논증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밌는 책이, 혹은 그 반대일 수 도 있다는 이야기다.
전반부에 다루고 -죽고나면 어떤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영혼이란 존재하는가-
후반부에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루고 있다.
죽음이 정말 나쁜 것인가/ 자살의 합리성, 도덕성-
저서로는
《도덕의 한계(The Limits of Morality)》(Oxford, 1989)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Westwiew, 1998)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Yale, 2012/한국어판: 엘도라도, 2012)
《응분의 기하학(The Geometry of Desert)》(Oxford, 2012)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Oxford University Press, 2019/한국어판: 안타레스, 2020)
저자는 이책을 죽음,그리고 그것을 통한 삶, 그리고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한 책이라고 설명한다.
죽음이 없는 삶은 세상에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에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셸리 케이건은 왜 '죽음학'을 다루느냐는 인터뷰 질문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한 다는 것은 지금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큰 영향을 주는 가치관이라고 말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말하듯 천국이 있고 우리는 죽어서 사후세계가 있으며 운이 좋아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살아가는 삶을 '천국'을 가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사후세계가 없다면, 즉 이삶이 이번 삶이 마지막이고 60~80년 정도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한다면 지금을 최대한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고 말한다.
때문에 셸리 케이건은 현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죽음이 병원에서 치루어지고 사람들이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위해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하는 주제라고 말한다.
그럼 본격적으로 그가 죽음과 영혼을 바라보는 관점을 소개하겠다.
이원론- 인간의 육체 + 영혼
일원론(물리주의) -인간은 육체적 존재 라고 말하는 것이 물리주의이다 .
이 두가지 관점에서의 차이는 인간의 육체를 공통적으로 인정하지만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이원론은 존재한다고 주장하과 일원론은 그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물리주의에서는 육체 그 자체지 영혼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 이원론자들이 말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제를 했을 때.
기본적으로 저자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저자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으며 영혼이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과정으로 영혼이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예를들어
의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감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원론자들은 흔히 외적 감각을 통해 영혼을 인식할 수 없지만 마음의 눈을 통해 영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저자는 이것에 대해 반대한다. 내가 나를 들여다 본다고 내 영혼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것이 있다면' 설명이 더 쉬워지는 최선의 설명의 추론 방법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를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원자가 있다는 가정 하에 입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엑스레이를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찍혀 나오는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엑스레이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이런 방법처럼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가정할 때 우리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특성들을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영혼이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물리주의자들은 사랑이란 특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저자는 물리주의자들이 사랑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원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가정하면 사랑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원론자의 영혼을 밝히는 과정에 신뢰도가 있는 주장은 없다고 말한다.
사실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그 근거를 명확히 가져와야한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이것은 마치 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용이 있는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아직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으며
사람들이 오래 믿어온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다고 말한다.
육체와 정신은 다르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통해 육체와 다른 비물질인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 꼭 지속해서 살아야 하는가, 불멸하는가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 사실이 영혼의 불멸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앞서 말한 것 처럼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이원론자들의 주장, 즉 육체와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육체와 영혼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육체가 바늘에 찔리면 그 영혼은 어떤식으로든 상처를 입는다. 신체적 죽음이 영혼의 죽음에 영향을 안미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가고 영혼불멸을 갖는다 주장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들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순간과 그의 철학을 다룬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을 이용하여 이것을 논증한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시게 된다. 충분히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변성을 믿으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오히려 다음 세계로 갈 것에 대해 신나한다. 심지어는 그의 수많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가 영혼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은 근거는 무엇일까?
이 역시 소크라테스의 연역적 추리를 통해 가능했다.
이를 다루기 위해 먼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이것을 더 심화시킨 사람으로 형이상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있다. 이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 어떤 것은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를 상상할 수수는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 존재를 이데아라고 한다. 이데아는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생각을 지칭한다.
우리의 이데아 안에는 이렇게 추상화 되어 있고 개념으로 알고 있는 완벽한 형상들이 있다. 아름다움, 건강함, 선함 등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마음만으로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많은 실체들을 만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들은 이 형상들에서 멀리 떨어지고 흩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육체로 인해 식욕, 성욕, 쾌락, 고통과 같은 욕망이 형상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상이 영혼이 불멸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1. 머릿속 현상의 세계, 2. 물리적 실체 에 대해 생각해 볼 필다. 물리적 실체 예를들어 신체는 작아지기도 커지기도 추했다가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등 변화한다. 하지만 형상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형상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데 물리적 실체는 소멸하거나 쪽갤 수 있다. 연필을 쪼개고 지우개를 쪼개면 그것은 더이상 연필과 지우개가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형상은 어떤 개념이라 쪼갤 수 없다.
형상은 부분들로 이루어 진 조합물이 아니기 대문이다. 플라톤은 형상은 영원하며 소멸하지 않는 단순한 존재이기 때문에 순순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쪼갤 수도 사라질 수 도 없다고 봤다 .
저자는 이러한 관점이 이해는 가나 그럼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말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영혼관점 - 내 육체가 죽는다고 해도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면 나는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관점- 동일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격관점- 같은 인격을 갖고 있다면 그사람은 나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한다.
나는 영혼인가? 육체인가? 인격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삶의 끝이라는 주장을 한다.
죽음에 대한 잘못된 편견
1.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 자신의 죽은 상태를 그릴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영혼이 존재해 그것이 불멸한다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가 결국 죽을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한다.
2. 우리는 모두 홀로 죽는다-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고 음악을 즐기지만 죽을 때엔 모두 홀로 죽는다는 운명을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흄은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병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해도 얼마든지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나쁜것인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라는 이론을 보기위해 세가지 논리적 추론을 한다.
1. 박탈이론- 삶이 가져다 주는 좋은 것들을 앗아가기 때문에 나쁘다.
2. 에피쿠로스- 나쁘다는 것은 존재하는 대상에게만 가능한 평가인데 죽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게 아니다.
3. 루크레티우스 -죽음이 나쁘려면 만찬가지로 비존재 상태인 태어나기 전의 상태도 나빠야 한다.'
라는 세가지 관점에서 죽음이 나쁜것인가 살펴본다.
저자는 죽음이 왜 나쁜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박탈이론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죽고 나면 모든 삶이 주는 축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좋은 것으로 가득찬 삶을 앗아살 때어야 죽음이 나쁜것일 수 있다.
삶이 힘든것, 악한것으로 가득할 때 죽음은 오히려 좋은 것일 수 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일까의 문제에서
저자는
쾌락주의- 쾌락이야 말로 가치있고 그 유일한 존재이며 고통은 그 자체로 외면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 입장
그릇이론- 삶 그 자체는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채워넣을 수 있는 그릇 같은 것이라는 그릇이론
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한다.
이 쾌락과 삶을 다루는 관점에서
1.중립적 그릇 이론이란- 어떤 사람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물의 가치를 다 더해야 한다는 (쾌락주의)
2.가치적 그릇 이론- 오직 삶의 내용물이 가치만을 고려하는 관점과 달리 삶 '그자체' 에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
3. 환상적 그릇 이론- 삶 자체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높으므로 내용물이 아무리 끔찍해도 총합은 반드시 플러스가 나온다
저자는 이런 입장의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면서 삶 자체가 아무리 우리에게 긍정적인 가치를 제공한다 해도, 영생의 부정적 내용물들이 얼마든지 이를 '압도'해 삶을 나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의 가치론적 문제
1. 필연성
2. 가변성
3. 예측 불가능성
4. 편재성 - 어디서 어떻게 죽을 지 모른다.
이 죽음의 특징이기 때문에 저자는
삶에 가능한 많은 것들을 채워 넣어서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살- 모두가 죽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살이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라는 문제에서
공리주의-
의미론- 자살을 절대적으로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동의가 있다면 도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카프카는 ' 삶은 언제가 끝나기 때문에 아름답다' 고 말했다.
저자는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삶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전 서울대병원 내과 원장 정현채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국내에서 죽음학에 대해 설파하시는 교수님인데
그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임종 직전 들을 음악들을 미리 정리해 놓고 안입는 옷들은 바자회를 통해 정리하는 등 미리 준비하며 삶을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한 말 중 가장 인상깊은 말은
죽기 직전의 나의 종교관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것 처럼 영혼이 있는지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천국이 있는지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관을 명확하게 하면
실제로 죽음을 맞았을 때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 없는 것이고 그 뒤의 삶이 있다면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이득이라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죽음을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더 쉽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