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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Sep 28. 2021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글

지금 적지 않으면 영영 잊어버릴 것 같아서

  받기 전부터 용건을 알 수 있는 전화가 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서울로 올라와 샤워를 하고 난 뒤 걸려온 엄마의 전화가 그러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구나.

  “...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파르르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맞구나, 내 생각이. 

  외할머니는 한 달 전부터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셨다. 암투병 끝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도 없었다. 이모와 엄마는 가정에서 돌보기에 한계가 있어 할머니를 호스피스에 모셨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의연하게 지내셨다고 들었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며칠 전부터 자식들이 나를 버렸다고 병동에서 난동을 피우셨다고 했다. 치료를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호소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엄마와 이모가 외할머니를 뵙고 왔는데, 그럼에도 자식들이 본인을 여기 두고 가버렸다고 하셨단다. 그러고서 수액을 꽂을 때마다 뽑아버려 간호사들과 요양보호사가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이 사태를 전해 듣고는 추석을 마치고 번갈아가며 호스피스에 머물기로 결정했었는데, 그 사이 돌아가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깔끔하고 반듯하신 분이었다. 그 옛날, 세탁기도 변변찮은데 수건을 삶아서 쓰셨고  찌개를 한 냄비에 다 같이 수저로 퍼먹던 시절에도 국이나 반찬은 개인 그릇에 덜어 식탁 위에 올리셨다고 했다. 엄마를 포함한 세 자매를 매일 깔끔하게 씻기고 곱게 머리를 빗어 학교를 보냈다며 그 시절을 회상하는 엄마의 얼굴을 볼 때면 나도 작은 아이가 되어 외할머니의 손길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깔끔한 생활 습관은 엄마를 거쳐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외할머니는 원래 부잣집의 귀한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외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가세가 기울었다고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못 받은 돈이 한 두 푼이 아니라고 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거절하기에는, 못 받은 돈을 달라고 악다구니 쓰기에는 외할머니는 여렸던 것이었다. 한 평생 살림만 하신 외할머니가 감당하기에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요양사 일도 하시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나가셨다. 

  나는 엄마의 안부를 점검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올라올 것인지, 빈소와 장지를 물어보고, 장례 일정을 물어보았다. 외할머니의 소식에 눈물이 나기보다는 우선 정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고 대략적인 일정이 확정되자 회사와 주변에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2일장을 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올 사람도 없다는 그 말이 가슴에 쓸쓸하게 와닿았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엄마와 친했던 아주머니의 딸에게 연락해서 상황이 이러하니 괜찮다면 우리 엄마에게 연락 좀 부탁한다고 말을 전했다. 그녀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애도를 표했다. 

  참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가 사이코패스인지 잠시 고민해봤다. 외할머니 얼굴을 자주 보지는 못했다. 외할머니는 수원에서 작은 이모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수원은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자주 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민폐 끼치는걸 정말로 싫어하셨다. 그 민폐에는 손녀가 사주는 밥 값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뵈어 맛있는 걸 사 드리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고, 어쩌다 드리는 용돈도 받지 않으셔서 방에 몰래 숨겨야만 했다. 그렇게 용돈을 두고 가면 외할머니는 전화를 해서 왜 이런 걸 두고 갔냐고 화를 내시거나 엄마에게 다시 돌려드렸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가 답답했다. 그냥 받으면 되지 왜 이렇게 까지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은 또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반찬을 줄 게 있다며 수원에서 강남까지 차를 타고 올라오셨고, 핸드폰이 없던지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빌려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반갑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미리 말씀도 없이 오셔서 당혹스러웠고 저녁 약속 중에 갑자기 자리를 떠야 해서 사실은 귀찮았다. 헐레벌떡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니 정말 반찬만 주고 가버리셨다. 얼굴이 보고 싶다고 오신 것이었다. 집에 가서 차 한잔 하자는데도 한사코 거절하시고 버스를 타고 가버리셨다. 나는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할머니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십몇 년 전, 엄마가 아팠을 때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내려와 한동안 집안 살림을 돌봐주셨다. 외할머니는 은근하게 잔소리가 많았다. 몸에 좋다는 걸 굳이 먹여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물 한 잔을 마셔야 했고, 라면은 몸에 안 좋으니 못 먹게 했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와의 동거가 불편했다. 말로 불편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 소녀의 짧은 대답과 살갑지 못한 태도에 나의 불만은 충분히 표현되었으리라. 엄마의 상태가 좋아지고 외할머니가 다시 돌아가신다고 했을 때, 나는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 아침에 물을 안 마셔도 되겠다며. 

  살면서 묻어버렸던 순간들을 이제서야 들추어보고 있자니 모든 것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던 행동들이었다. 덮어둔 기억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의 못난 행동과 어리석음이 묻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늦어서 다시 돌이켜보니 부끄럽고 부끄러워 어디 숨을 곳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와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귀찮은 일은 다 모른 척했다. 외할머니가 본격적으로 투병에 들어가자 엄마는 몇 번 병문안을 가자고 요청했다. 외할머니와 꼭 닮은 엄마는 나에게 부탁을 잘하지 않는데, 그런 엄마의 몇 안 되는 요청이었다. 엄마를 따라갔던 병실에서 할머니는 목에 구멍을 뚫은 채 말라 있었다. 슬퍼져서 왈칵 눈물이 났지만, 병실을 나서면서 눈물이 마르는 것처럼 슬픔은 휘발성을 가지고 빠르게 사라졌다. 외할머니에 대한 걱정은 금세 잊혀졌다. 나는 바쁜 회사원이니까.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모른 체할 핑계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소식에 마음이 미어지도록 슬프기보다 죄송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슬픔은 마음을 온전히 쏟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의 소식에 슬퍼할 엄마의 걱정과 외할머니에게 제대로 손녀 노릇을 못한 죄송스러움이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슬퍼할 자격도 없는 사람 같아 쉬이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병문안을 나오면서 휘발되었던 감정처럼 이 순간도 사라질까 싶어, 잊지 않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 한 문장씩 써내려 본다. 주기적으로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다시 마주하였을 때는 지금과 같이 죄책감만 가득하지 않기 위해서. 이상하게도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흐른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감정이 벅차오른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 눈물도 죄스럽다. 

  그렇게 내 마음 편하자고 글을 써본다. 죄책감만 더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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