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그 이름, 독서에 대하여
우리 부부는 크리스마스에 서점에 간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거창하게 준비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주는 책으로 정했다. 삼십 분 동안 서점에서 숨어서 들키지 않고 책을 골라 서프라이즈로 건네준다. 내가 왜 당신의 선물로 이 책을 골랐는지 설명해 주고 정성껏 쓴 카드와 함께 선물해 주는 게 우리 가정의 연말 문화이다. 얼핏 보면 참으로 좋아 보이는 가정 문화이다. 그러나 22년 크리스마스는커녕 21년 크리스마스에 받은 책을 아직 다 보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이면 살짝 의미가 퇴색될 수 있겠다. 나만 못 읽은 건 아니다. 남편도 표지만 살짝 넘긴 것 같다. 어쩌다 우리 가정은 문맹의 길로 접어든 것일까.
요즘은 뭐든지 ROI로 따지게 된다. Return on Investment, 투자 수익률이라는 의미의 ROI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나에게 큰 이정표가 된다.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가, 가치가 있는가, 효용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따지며 나의 투자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한다. 그런 맥락에서 독서는 가장 ROI가 낮게 느껴진다. 독서에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글을 읽는 시간은 기본이요,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세 페이지에 한 번씩 멈춰 나의 가치관을 돌이켜보았었다. 보통 두뇌 노동이 아니었다. 소설이라고 다를소냐.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 도대체 이 놈이 누구였는지 이름을 떠올리고 복기하는데 총 독서 시간의 20%를 쓰게 된다. 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는 친절하다. 요즘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도 한글 자막을 켜놓는다. 소리와 시각으로 나의 시청을 도와준다. 길이도 점점 짧아진다. 최단 시간에 극한의 도파민을 선사한다. 들이는 노력 대비 독서의 즐거움은 천천히 그리고 느리고 차오른다.
그래서 그런 걸까, 요즘은 뭐만 읽으면 졸리다. 각 잡고 자기 전 침대에서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잤다. 진짜 푹 잤다. 이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나, 싶을 정도로 꿀잠을 잤다. 작가에게 감사했다. 너무 많은 활자를 접하는 직업도 아닌데, 하루의 글자 소화량이 이토록 떨어진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일단 책을 접해야 하니까 접근성을 높여보았다. 침대맡에도 소파 옆에도 책이 비치되어 있는 독서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해 보았다. 집안 청소할 때 먼지를 닦아내야 하는 섹션이 증가했을 뿐이었다.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고 잠 못 이루며 즐거워했던 시절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크게 실망해 책만 더 읽어 내려갔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다가 혼난 유년기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책을 놓지 않았고 대학교 때는 지성의 상징이라며 도서관에서 손때가 묻은 책의 감촉을 즐겼었는데 이제는 과거도 아닌 전생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그랬나…? 생경하다. 그때의 나도 지금이 나도 모두 나인데.
이쯤 되면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책이 잘못한 게 아닌가,라는 억울함까지 든다. 나를 설득하지 못한 활자 너의 책임이다. 남들은 이렇게 재미있게 발전했는데 너는 무엇하는 것이냐고. 시대에 도태되어 버린 네 놈 때문이라 소리치며 책임을 전가하고 싶다. …그러나 이건 확실하다. 유튜브나 인스타의 단편적인 영상은 길고 영원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봤던 릴스를 또 봐도 긴가민가, 할 때가 있다. 분명 재미있게 웃었던 강아지 영상인데도. 허나 독서를 통해 즐겼던 감동과 문장과 감정은 나의 측두엽, 해마에 영원히 저장되어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며 동생과 러시아의 추위를 상상했던 순간,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도대체 소마는 뭔지 위험한 호기심을 가졌던 순간, 달과 6펜스를 읽으며 예술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순간들. 그 많은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놓친 단어와 문장과 문단이 10년 후의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다분히 자명하다 할 수 있겠다. 갈수록 얄팍해지는 어휘와 표현력을 충전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에는 꼭 책을 들어야겠다. 진짜 진짜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