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일기

가난했던 어린시절

by 영미남편

우리내 어린시절은 왜그리도 가난했던 기억 밖에 없었던 것인지..

어렸을적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쓰는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남들 만큼 우리집도 가난 했었기에 나는 어느 순간 부터 부모님께 용돈 이라는 명목하의 돈을 받아본 기억이 정말 거의 없다. IMF 로 인해 가세가 많이 기울었던 내 중학교 시절 당시 우리집은 지하 1층에 노래방이 있었고, 1층에는 만두가게와 미용실이 있었던 2층의 단칸 월세방이었다.


엄마는 매일같이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을 했고 집에는 중학생인 나와 초등학생인 동생만 있었고 저녁끼니를 스스로 때워야 했던 어린 나와 동생을 위해 엄마가 해줄 수 있는건 1층에 있는 만두가게에서 비싼 만두는 사지 못하고 단무지만 큰통으로 한통씩 윗집에 산다는 명목하에 저렴하게 구매해서 매끼 맨밥과 단무지만 먹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간혹 김치와 고추장만 넣고 비빔밥을 해먹는다면 그날은 특식 이었다. 과거 솜사탕의 아련했던 추억이 있었던 나는 매끼 단무지만 먹으면서도 중학교 시절을 큰 탈없이 보냈다. 엄마는 어느새 한참 지나버린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근 1~2년을 단무지만 먹인것이 지금까지도 너무나 미안하다고 말씀 하신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 지나고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 되면서 나에게는 돈이 필요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PC 방에도 다녀야 했고, 간혹 간식을 사먹을땐 10번 얻어먹더라도 1번은 사야 그 관계를 유지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이제 알만한 것들을 알게된 나이 인지라 옷도, 가방도, 신발도 조금은 브랜드의 그것들을 갖고 싶어 했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이 있어 철이 일찍 들었던 것인지 나는 그럼에도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돈이 필요했던 나는 고등학교 시절 드디어 알바를 시작 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내손으로 돈을 벌었던 시작한 편의점 알바였다.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다니고 독서실에 다니는 말그대로 고등학생 이었지만 우리집 형편으로 학원은 언감생신이었다. 그렇다고 학업을 포기 할 수는 없었기에 나름은 평일에 시립 도서관에 혼자가서 공부(?)를 했고 목,금,토,일은 야간시간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90년대 후반 당시 시급은 2천 원이 채 안 되는 시급이었고, 내 피같은 불금과 주말을 반납해가며 한 달을 열심히 일을 하면 내손에 들어오는 돈이 약 30만 원 수준이었다. 30만원은 용돈으로 삼아 간혹 동생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3년간 단무지만 먹었던 만두가게에서 이젠 단무지가 아닌 만두를 간혹 사먹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어울림에 있어서도 큰 부족함은 없는 돈 이었다.


그렇게 나는 돈의 맛에 길들여 졌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학기를 보냈던 나는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백화점 지하에 있는 마트 수산코너로 이직(?)을 했다. 당시에는 겨울 방학이 40일이 넘는 긴 기간이었고 구정연휴와 봄방학 까지 하면 중간에 5일정도만 학교에 나가면 거의 3달의 기간이 방학기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학교에 나가는 몇일만 알바를 못하고 봄방학이 끝날때 까지 일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마트 수산코너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편의점 알바를 그만두고 수산코너로 이직을 했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편의점에서는 한달을 일해도 30만원 밖에 벌 수 없지만 백화점 지하에서는 한 달을 일을 하면 90만 원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하는 시간은 백화점 지하가 훨씬 많았지만 그럼에도 목돈을 만질수 있는 기회가 학생 신분으로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산코너로의 이직이 나에게는 아주 큰 기회 아닌 기회였다. 어린 내가 기특했던 것이었는지 내가 알바를 할때 열심히 해서 그랬던 것인지 수산코너 담당 과장님은 여름방학에 또 오라고 했고 그렇게 나는 방학 마다 마트에서 알바를 할수가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생선 손질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잘한다.


편의점과 마트 수선코너에서 알바를 하던 고등학생은 어느새 대학이라는 곳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방학기간동안 마트에서 일할 수 있었던 덕분에 대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은 내스스로 충당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를 가니 고등학교 때 보다 돈이 더필요 했다. 고등학교 시절 알바를 하면서 모아놨던 돈을 등록금과 입학금으로 모두 쏟아부었던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한번도 엄마한테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없었는데, 대학교 입학 초기 처음으로 엄마한테 처음으로 용돈이 필요 하다고 했고 엄마는 나에게 만원을 주었다.


나는 02학번이다. 아무리 옛날 얘기라고 하지만 02년도에 대학교 친구들과 술한잔을 먹으면 1인당 1만원의 비용은 발생하던 시절이었기에 엄마가 나에게 줬던 1만원의 용돈은 참으로 하찮은 수준 이었다.


어쩔수 없이 돈이 필요했던 나는 또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만화공주 비디오 왕자 같은 비디오와 만화책을 렌탈가게들이 많이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주말 알바를 시작 했다. 남들은 엠티를 간다. 여행을 간다 주변에서 놀기만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대학 시절 내 주말을 포기하면서 까지 열심히 일을 했던 비디오 가게에서는 간혹 돈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겼고 당시 사장은 그렇게 돈이 없어지는 일이 생길 때면 항상 나를 의심하는 바람에 금세 그만두게 되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컨데 나는 당시 100원도 건드린 적이 없다.

(2002년 초지점 사장님 진짜 안건드렸어요!!)


그리곤 곧 여름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겨울방학 만큼 대학교의 여름방학은 꽤나 길었다. 그 꽤 긴 여름방학기간 동안에는 자동차 와이퍼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나는 안산 시민 이었다. 안산에는 반월 공단이 있고 안산역에 새벽 6시까지 가면 일당직 알바를 들어갈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두번째 일당직으로 들어갔던 와이퍼 공장 사장님이 하루 일당으로 그만두지 말고 한두달 쭈욱 해줄수 있냐는 말에 내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와이퍼 공장에 맡기게 되었다.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약 30명 정도가 됐는데 2명의 관리자와 1명의 사장님 그리고 대학생 신분이었던 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0여명 모두가 외국인이었다. 심지어 몽골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몽골에서 의사를 하는 것보다 한국공장에서 돈을 버는 것이 더 많이 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돈을 벌어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고, 영국에서 학위를 따면 몽골에서 의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건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듯이 기계적이었지만 어눌한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수다떠는게 더 재밌었던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사회의 때가 덜묻은 나와 다소 순수했던 외국인 노동자가 둘 모두 을의 입장에서 조금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수 있지 않았나 싶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서 공장에서 일을 계속 하고 싶었던 나지만 방학이 끝나 학교가 개강을 하면서 어쩔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되어 또다시 주말 알바를 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이번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여긴 사실 알바 라기보다는 직원에 가까웠다. 나름의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봤으며 심지어 급여에서 4대 보험까지 때어갔다. 지금까지는 4대보험을 떼여 본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곳은 그리 오랜 기간 일을 하진 않았다. 학기는 짧았고 방학은 긴 대학 생활이기에 평일에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자 또다시 공장으로 향했다. 겨울방학은 자동차 문 옆에 붙는 팔걸이를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방학기간에 공장에서 일을 하면 좋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통근 버스가 있다는 것이다. 아침이면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고 일이 끝나면 집으로 나를 데려다줬다. 두 번째는 삼세세끼를 모두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덕분에 무언가를 사 먹는데 돈을 쓸 일이 없어진다. 세 번째는 시간을 안 준다. 아침 7시에 나를 픽업한 출퇴근 버스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잔업을 마치고 저녁 9시에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당시 공장 일은 주 6일제였다. 9시에 도착한 나는 씻고 잠자기 바빴고, 주말 역시 오롯이 휴식에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결국 공장은 한 달 동안 나에게 돈 쓸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하면 200만 원 남짓한 돈이 고스란히 통장에 쌓여있었고 타이밍을 잘 맞춰 방학기간 두 달을 내리 일을 하면 한 학기 등록금 정도는 벌 수 있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왔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복학 기간 까지 약 8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고 남은시간 또 일을 해야 했던 나는 새로운 알바를 구하게 되었고 군대를 해병대로 다녀온 경력 덕분에 은행에서 청원 경찰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제대를 했던 2005년 당시 내가 근무했던 은행은 지금은 신한은행으로 바뀐 조흥은행이었다. 이당시 은행에서 근무하는 청원 경찰은 모두 외주 직원이었다. 외주사에 처음 가서 일을 시작할때 조흥은행이나 우리은행두군데서 청원경찰일을 할 수 있었고 당시에는 이것을 선택 할수가 있었다. 청원경찰 알바는 사실 나보다 먼저 제대한 친구 A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된것이었는데 친구는 본인이 우리은행에 있음으로 나도 우리은행으로 오길 원했었다. 같은 은행에 있으면 간혹 은행장님을 모시고 외근을 나갈때 서로 얼굴을 볼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흥은행이 우리 집에서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조흥은행을 선택 했다. 청원경찰 알바를 몇개월 하면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갑자기 우리은행은 외주의 자사화! 계약직의 정직원화! 등을 진행하게 되었다. 덕분에 내친구 A는 우리은행에서 청원경찰 알바로 시작해 갑자기 은행 정직원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서 나와 친구는 같은일 하지만 월급이 1.5배 이상 차이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순간의 선택은 정말 인생에서 많은것을 바뀌게 한다.


어느정도 시간이 더 흐르고 드디어 학교에 복학을 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은행에서는 계속 일을 해주길 원했었지만, 이미 우리은행 사건으로 마음이 많이 떴었고 복학해서 학교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청원경찰 알바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그만두고 나서 조흥은행이 신한은행과 합병을 하면서 청원경찰에 대한 처우가 또 달라졌다고 건너 들었다. 외주로 있었던 청원경찰을 모두 정직원화 했었다.


이번에도 순간의 선택과 타이밍은 인생을 바뀌게 하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잠깐 스쳐 지나간 한 번의 기회였는데, 만약 그때 복학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은행에서 근무하는 은행 정직원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복학한 대학에서는 주말 알바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휴학 후 은행에서 일을 하며 모아둔 돈이 등록금을 지불하고도 학기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중간 급 한돈이 필요해 당일치기 신문배달 알바, 공장 용역 알바, pc방 알바 등등 잠깐씩 잠깐씩 했지만 전문대를 다녔던 나는 복학한해 여름 방학부터 실습을 나가게 되었고 실습을 마치는 시점에 실습한 회사의 직원으로 채용되며 알바 인생이 종료되었다. 그렇게 알바가 아닌 정직원으로서의 삶이 시작 됐고 나는 중간에 몇번 이직을 하고 쉰적도 있지만 20년째 직장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나는 어느새 번듯한 내집에서 한 사람의 남편으로 또 딸과 아들 두아이의 아빠로 이제는 어찌보면 가난하지 않은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친 이후부터는 편의점을 시작으로 군대를 갔던 시기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내내 어디선가 일을 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물론 계속해서 어디선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어디선가가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알바 시절에 하지 않았던 걱정들이 조금씩 커져만 가고 있는 것 같다. 걱정을 줄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준비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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