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3

도버의 바람

by 안녕
Épisode 1.


"어머나! 웬 아이들일까?"

앞서 걸어가던 수잔이 호들갑을 떨며 멈춰 섰다. 매기는 수잔이 가리키는 길 옆의 백양나무 숲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수북이 쌓인 가랑잎에 반쯤 파묻힌 채 어린 소년과 소녀가 꼭 껴안고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들인데..."

"항구 쪽에서 온 거지 아이들인지도 몰라요."

두 여자가 두런거리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꼼짝 않고 껴안고 있었다.

"가엾어라!"

"벌써 죽었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꼼짝 않고 있는 걸 보면."

매기가 다가가 소녀를 떼어 품에 안았다. 그러자 갑자기 "앙!" 소리를 내며 소녀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직 다섯 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울지 마, 아가야. 우린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백양나무 밑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아이 쪽을 가리키며 악을 쓰며 울 뿐이었다.

"제 오라비인가 봐."

매기가 남자아이를 안아 들자 여태껏 발버둥을 치던 여자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어떡하죠, 매기?"

"어떡하긴, 우선 살려놓고 봐야지."

남자아이를 안은 매기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를 안고 뒤따르면서도 수잔은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인 나리도 안 계신데..."

"어서 따라오기나 해."

매기가 쏘아붙이는 서슬에 수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뒤질세라 그녀를 뒤따랐다.

11월의 도버의 바닷바람은 상당히 차가웠지만 랜버트 가의 도버 별장 현관에 가까스로 다다랐을 때 두 하녀의 옷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우선 내 침대에 데려다 눕혀."

매기의 명령을 따르기는 하면서도 수잔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모를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디시 길바닥에 내쫓겨 떨고 지내야 할 아이들인 모양인데...'

수잔이 느끼고 있는 불안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쌀쌀한 11월 어느 오후의 사건이 훗날 랜버트 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이 알리는 없었다. 그것이 결국 불행이었는지 아니면 축복받을 일이었는지도 그들은 물론 알 수가 없었다.




수잔은 우선 더운 물수건으로 오누이의 얼굴과 손발을 닦아 주었다.

여자아이의 동그란 얼굴에서는 금세 발그스레한 혈색이 살아났다. 그러나 열 살 정도 됨직한 남자아이는 아직 혼수상태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깡마른 얼굴에 짙은 눈썹을 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얼핏 보면 두 아이는 전혀 다른 용모인 것 같았다. 여자아이 쪽은 둥글둥글하고 붙임성 있는 생김새였지만 남자아이는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짙은 속눈썹이며 아름다운 금발 머리에 유난히 붉고 도톰한 입술이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오누이 사이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잠 속에서 오누이가 깨어난 것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도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먼저 깬 남자아이는 지켜보고 있던 매기를 향해 한참 동안이나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괜찮아, 아가야. 너흰 길가에 쓰러져 있었단다. 우선 요기를 좀 해야지?"

매기가 다독거려 주어도 녀석의 의심은 잘 풀어지지 않는 모양이더니 누이동생이 부스스 일어나자 와락 달려들어 껴안고 한참 만에 매기를 따라나섰다.

하녀들의 식탁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매기는 수프를 다시 데워야 했다.

일을 끝낸 하녀들이 귀여운 방문객들의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지?"

"몇 살이니?"

그러자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대답이 없었다.

"어디서 왔니?"

"어디서 오긴! 거지 아이들이지 뭐."

"거지는 아닌 것 같아. 생김생김이나 차림새가..."

하녀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지만 두 아이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벙어리인가 봐."

"맞았어. 벙어리 거지야."

"불쌍도 하지. 두 가지 불행이 한꺼번에 겹치다니!"

그때 매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두 접시 가득 담아 가져왔다.

"조용히들 해, 이것들아. 얘들은 지금 무척 피곤하단 말이야."

하녀들이 샐쭉해서 입을 다물었고 두 아이의 앞에는 먹음직한 수프 접시가 놓였다.

여자아이가 와락 스푼을 들고 수프에 달려들자 남자아이가 스푼을 빼앗으며 동생에게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뭔가 못마땅하단 얘긴가?"

"랜버트 가의 수프를 소문에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야"

그러나 소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얌전히 접어 포개 놓은 냅킨이었다.

"오호라, 냅킨을 달라는 말이로구나!"

냅킨을 가져다 주자 두 아이는 얌전히 무릎 위에 그것을 펴놓고 서둘러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이것 좀 보게! 주제에 격식을 따지긴!"

"거 참 맹랑한 거지 아이들이네!"

하녀들은 꼴사납기는 했지만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오누이의 식탁에 더욱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이젠 물러가 잠이나 자! 이 게을러터진 잠꾸러기들아!"

하녀장 매기의 호통은 위력이 있었다. 빙 둘러섰던 하녀들이 기겁을 하며 흩어졌고 넓은 식당에는 매기와 수잔만이 남았다.

어느새 빈 접시를 앞에 놓고 오누이는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닭고기를 좀 내올까요?"

"안 돼. 오늘 저녁은 빵과 수프 외에는 줘서는 안 돼. 공연히 속탈이라도 나는 날에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수프나 한 접시 더 가져와."

또 한 접시의 수프를 앞에 놓고 오누이는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름이 뭐지?"

오누이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벙어리인가 봐요. 아까부터 우리가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던 걸요."

매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오누이의 차림새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마들레느 씨는 어디 계시지?"

"2층 서재에 계실 시간이에요. 그런데 마들레느 씨는 왜요?"

수잔의 질문을 뒤로하고 매기는 부지런히 넓은 홀을 가로질러 2층 서재로 향했다.




마들레느는 랜버트 가의 어린 상속자인 로버트의 가정교사였다. 프랑스 태생으로 일찍이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공부를 한 젊은 자유주의자였다. 철학, 어학은 물론 검술까지도 전문가 이상이어서 로버트의 가정교사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인물이었다.

서재 앞에서 매기는 잠시 멈칫했다.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녀장으로서 분수에 넘치는 일지는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들레느 씨라면 너그러이 보아주실 거야. 우리 하녀들에게 늘 친구처럼 대해 주시는 분이시니까.'

매기는 용기를 내어 커다란 서재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시오."

마들레느는 두세 개의 장작으로 불을 지핀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

"오, 매기 양. 웬일이요?

마들레느는 뜻밖이라는 듯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며 보던 책을 덮었다.

"죄송합니다. 방해가 되었군요"

"괜찮아요, 메기 양. 무슨 일이라도?"

"오늘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매기는 낮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매기 양답게 현명한 일을 했구려. 그래 지금은 아이들이 기력을 회복했나요?"

"네, 지금 막 수프를 먹였어요. 아주 잘 먹더군요."

"그랬겠군. 랜버트 가의 수프인 걸. 나도 이 집을 떠난다 하면 무엇보다도 그 수프를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무슨 까닭인지 그 아이들이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아요."

"말을 않는다? 그럼 벙어리나 귀머거리인 게로군."

"그게 아니에요. 제 생각으로... 이 지방 사람이, 아니, 영국 아이들이 아닌 거 같아요."

"오호라, 그래서 날더러 통역을 해달라는 그런 말이 구료. 좋아, 데려와요."

"그런데... 선생님이 내려오셔야 할 것 같아요. 쇠약한 아이들이라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 참! 그렇겠군. 내 기꺼이 내려가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매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들레느를 안내하며 걸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 조용히. 하인들에게 종일 큰 소리를 지르는 매기도 이 사람 앞에선 그렇게 조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녀들의 식당 앞에서 매기는 걸음을 멈췄다.

"데리고 나오겠어요."

"내가 들어가면 안 되겠소?"

"하지만 선생님께 하인들의 방을 보여드릴 수야..."

"괜찮아요. 언젠가 한 번은 그 방에서 함께 식사하고 싶었소. 난 여럿이 떠들썩하게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

마들레느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누이는 아직도 식탁에 앉아 수잔이 가져다준 과일들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귀여운 프랑스 아이들이로군."

"프랑스라고요?"

"그래요. 저 아이들 옷소매의 레이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소. 최근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는 레이스 장식이라오."

'과연 박식한 선생님이야. 한눈에 알아보다니!'

매기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 이름이 뭐지?"

그러자 두 아이가 먹던 입 놀림을 그치고 마들레느를 쳐다보았다.

"앙투안!"

남자아이의 대답이었다.

"마리벨!"

그것은 여자아이의 대답이었다.

"만세!"

매기와 수잔이 서로 껴안으며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앙투안은 열 살, 마리벨은 다섯 살, 아버지는 프랑스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곧 계모를 얻었다. 계모는 전에는 하녀로 있던 여자였는데 무척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마음씨는 아름답지가 못했다.

아버지가 전쟁에 출정한 사이에 집안에 젊은 남자들을 끌어들이기가 일쑤더니, 아버지마저 전장에 나가 전사하고 나자 마침내 뱃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오누이를 데려가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누이만 없으면 죽은 아버지 재산을 혼자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오누이는 무지막지한 뱃사람들에게 끌려 도버 맞은 편의 프랑스 칼레 항구까지 왔다. 거기서 오누이는 대서양 바닷속에 떠밀려 들어가 죽을 운명이었다.

앙투안은 뱃사람에게 매달려 통사정을 했다.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뱃사람들도 죄 없는 오누이를 죽이느니 배에 태워 영국 땅 아무 데나 내려놓으면 죄도 짓지 않고 약속한 돈도 받을 수 있으니 그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앙투안과 마리벨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오누이가 내린 곳이 바로 도버였다.

그러나 말 한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땅에 내렸으니 어린 오누이로서는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이틀을 굶은 끝에 무작정 걸어가다가 이 백양나무 별장 입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하지 못할 짓이로군요!"

"그렇소, 매기 양. 그러나 지금 유럽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 속이오. 특히 프랑스가 더욱 그렇지. 물 쓰듯 돈을 써서 재정 파탄에 직면한 프랑스 왕가, 그런 왕정에 불만을 품고 혁명의 시기를 노리고 있는 자유주의자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이익을 다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있소. 그 혼란 속에서 황금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있는 무리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소. 이 가엾은 소년과 소녀가 바로 그런 무리들의 희생자인 셈이라오."




두 접시의 수프와 빵과 과일을 먹고 난 앙투안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마리벨은 식탁에 턱을 기댄 채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냅킨을 곱게 접어놓고 나서 앙투안은 매기를 항해 상냥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주인 마님. 무척 좋은 음식이었어요."

말 뜻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매기는 그것이 식사에 대한 감사 표시임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주인 어른. 우리 오누이를 구해 주셔서요."

"꽤 예의 바른 꼬마로구나. 그러나 난 이 집 주인은 아니란다. 그리고 이 여자도 주인 마님이 아니고. 난 이 집 가정교사야. 이 여잔 하녀장 매기 양이고."

"아무튼 고맙습니다. 그러면 주인 어른께 따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주인은 런던에 계셔. 이 집 주인은 귀족이시다."

"귀족이라고요?"

귀족이란 말을 듣자 앙투안은 얼굴에 금세 경멸의 빛을 드러냈다.

"영국의 귀족도 별 수 없군요. 귀족의 식탁이 이렇게 초라해서야!"

"여긴 하녀들의 식당이야. 이 댁은 영국 왕실과 가장 가까운 랜버트 공작 댁이란다. 여긴 별장이지."

그러나 그렇게 말해 주어도 앙투안은 감탄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태껏 감사의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리어 교만스러운 몸짓으로 마들레느를 흘겨볼 뿐이었다.

"귀족의 집 가정교사란 걸 너무 내세우지 말아요. 난 귀족 따윈 딱 질색이니까!"

마들레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살짜리 프랑스 소년으로부터 느닷없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사답게 인자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 당돌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족을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그래요. 귀족이라면 넌덜머리가 나요. 내가 어른이 되면 귀족들을 모두 혼내 줄 거예요."

소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며 마들레느는 어딘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런데 넌 왜 귀족들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지?"

"귀족들은 말이죠..., 암튼... 모두 도둑놈들이에요."

"귀족이 도둑이라고?"

"그래요.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날마다 호사스럽게 살고 있어요. 남들이 일한 것을 빼앗아다가 그렇게 사는 거라고요. 농부나 광부는 종일 일을 해도 먹고 살기가 힘이 드는데 귀족들은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잘 사는 이유는, 귀족들이 일꾼들의 몫을 빼앗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귀족들은 멋진 옷을 차려입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얼굴로 서로들 웃고 있지만 그 뱃속은 거짓말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요. 동정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니까요. 계모의 만찬에 온 귀족들 중에는 나보고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부인, 왜 이런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거죠?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니면서. 얘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부인 몫의 유산이 없어진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래서 결국 계모가 우릴 죽이려고 결심하게 되었을 거예요."

"음..."

마들렌느는 너무나도 조리 있는 소년의 말에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지만 앙투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귀족의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신세를 진다고요?"

"넌 지금도 신세를 지고 있잖니?"

"아니에요. 우린 내일 아침 떠나겠어요. 절대로 남에게, 더구나 귀족의 신세는 절대로 지지 않겠어요."

소년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나가서 어떻게 하게?"

"나가서... 일을 하겠어요."

"넌 너무 어려서 일을 할 수가 없단다."

"할 수 있어요."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어른들이 네겐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 넌 너무 어리니까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어요. 프랑스에서도 일을 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었어요. 남의 신세를 지거나 비럭질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겠어요."

"좋아. 그럼 넌 일을 한다고 치자. 네가 일하는 동안 마리벨은 뭘 하고 지내지? 마리벨을 데리고 일을 할 건가? 아니면 마리벨에게도 일을 시킬 건가?"

"그건..."

귀여운 마리벨은 매기의 품에 안겨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앙투안은 결심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 마리벨만 없다면! 마리벨을 돌봐 줄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그토록 당당하던 소년의 눈빛이 조금씩 흐려지면서 이윽고 고개가 푹 꺾였다.

"앙투안, 도버의 겨울은 무척 차갑단다. 머지않아 매서운 북풍이 몰아칠 거야. 그러나 거리에는 아무도 너희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

"..."

"매기 양, 아이들이 몹시 피곤해 보이니 일찍 재우도록 해요."

말없이 매기를 뒤따라 나가는 앙투안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마들레느는 보았다.

'그러나 무서운 소년이야! 귀족에 대한 반감 속엔 어린아이답지 않게 정연한 논리와 확신이 들어있어. 자라면 큰 일을 치르게 될지도 몰라!'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들레느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마들레느의 예측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소년이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최대 이론가이며 센 강을 피로 물들이고 그 자신도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져 간,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 쥐스트, Louis Antoine Leon de Saint Just (1767~1794)라는 것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앙투안은 프랑스혁명 직후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생 쥐스트 바로 그였다.




앙투안이 눈을 뜬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바로 옆 침대에서 마리벨이 활처럼 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곁눈으로 보며 앙투안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앙투안은 결심했었다. 마리벨을 남겨두고 혼자라도 이 집을 떠나기로.

그러나 천사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마리벨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모든 결심이 무너져 내리려 했다.

'안돼! 약해져서는 안 돼. 이대로 여기 눌러앉아 남의 동정이나 받으며 지낼 수는 없어!'

앙투안은 겉옷을 걸치고 나서 발뒤꿈치를 들고 마리벨의 침대 곁으로 갔다. 금발머리가 흘러내린 양쪽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마리벨은 눈을 감은채 미소를 띠더니 뒤채며 돌아눕는다. 즐거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서 마리벨을 품어주고 계신지도 몰라!'

앙투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리벨!"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소리는 자신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깨워서는 절대 안 돼. 이대로 그냥 헤어져야 해. 언젠가는 꼭 마리벨을 찾으러 올 거야. 그때 만나서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벌써 아침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로 입술에 입을 맞추자 마리벨이 갑자기 두 팔을 앞으로 뻗어왔다.

앙투안이 허리를 빼며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마리벨은 몇 번 팔을 공중으로 더듬어 허우적대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잠들어 버렸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앙투안은 문 앞까지 왔다. 그리고는 손을 뒤로 더듬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쉽게 마리벨과 헤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었다.

'꼭 데리러 올 거야. 데리러 오고 말고.'

하인들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식당으로 통하여 부엌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밖은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앙투안은 백양나무 숲 언덕을 향해 힘껏 달렸다. 날씨가 쌀쌀해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마리벨이 자고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는 마음으로부터 빨리 멀어져 버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나서야 앙투안은 뜀박질을 멈추었다. 멀리 랜버트 가의 별장은 짙은 안갯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이따금 안개 사이로 희끄무레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용서해, 마리벨. 꼭 돌아올 거야.'

앙투안은 다시 몸을 돌려 항구 쪽을 향해 달렸다.

'마리벨, 다시 네 앞에 나타날 때 나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 거야. 이렇게 비겁하게 꽁무니를 빼는 일은 이번 한 번 뿐일 거야. 용서해, 마리벨!'




안개가 걷히고 커튼 사이로 햇볕이 비쳐 눈이 간지러워서 마리벨은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뜬 마리벨은 먼저 앙투안을 찾았다. 건너편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마리벨은 겁이 나지 않았다.

'오빤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야. 아마도 침대 건너편에 숨어서 날 쳐다보며 킥킥 대고 있을 거야.'

마리벨은 살금살금 건너편 침대 뒤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앙투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을 모두 들쳐 보았다. 그러나 오빠는 거기에 없었다. 마리벨의 얼굴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앙! 하고 울어버릴까 하다가 마리벨은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어쩌면 화장실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부엌으로 통하는 복도에는 하녀들이 수선을 떨며 오가고 있었다.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가 없으므로 마리벨은 복도의 모퉁이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를 매만지며 나오던 매기가 마리벨을 발견했다.

"일찍 깼구나, 마리벨.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러나 수심에 가득 찬 마리벨의 얼굴을 보자 매기의 뇌리에 번뜩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누이가 지던 방문을 열자 거기엔 앙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 수잔! 앙투안이 없어졌어. 누가 앙투안을 못 봤니?"

제일 먼저 일어난 수잔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는데요. 없어졌나요?"

다시 침대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매기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벨이 자고 있던 베개 밑에 두 장의 편지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어로 쓰인 편지여서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앙투안이 떠나버린 것은 거의 확실했다.

때마침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마들레느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선생님! 앙투안이..."

"알고 있소. 새벽안갯 속으로 앙투안이 언덕을 향해 달아나는 걸 봤다오."

"그렇다면 왜 말리지 않으셨죠?"

"소용없는 일이오. 비범한 소년이오, 앙투안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소년이오. 누가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소."

마들레느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하나는 자신에게, 다른 하나는 마리벨에게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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