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버트 가의 악마
Épisode 2.
하루아침에 단 하나뿐인 오빠를 잃은 어린 마리벨의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웠다.
랜버트 가의 하녀들은 정성껏 마리벨을 위로하고 슬픔을 달래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멀리 백양나무 언덕 쪽 길을 내다보는 것이 마리벨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밖으로 달려 나가기도 했다. 그랬다가는 곧 풀이 죽어 다시 돌아와 여전히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있곤 하는 것이었다.
"가엾어라. 저렇게도 오빠를 그리워하다니!"
"저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매기도 수잔도 마리벨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일주일 가까이 지나자 차츰 마리벨의 표정이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젠 창가에 앉아 있는 시간도 짧아졌고 때때로 하녀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간단한 영어도 하고 심부름도 자청해서 했다.
"이젠 오빠 생각을 단념한 모양이지?"
"역시 어린애는 달라. 머지않아 자기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마리벨이 오빠 앙투안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앙투안에 대한 그리움은 날로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마리벨이 생기를 되찾은 건 마들레느 덕분이었다. 아니, 앙투안이 남기고 간 편지, 그것 때문이었다.
어느 날, 마들레느가 마리벨을 찾아왔다. 매기로부터 마리벨이 걱정스럽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벨은 여전히 창가에 앉아 넋을 잃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리벨."
"네?"
깜짝 놀라 돌아선 마리벨의 눈에 마들레느의 미소 지은 모습이 보였다.
"앙투안을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
"앙투안은 돌아오지 않는단다."
"오빤 돌아와요. 내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는걸요."
"물론 돌아오긴 하지. 하지만 금방은 아니야."
"아니에요. 길을 잃어버렸을 거예요. 길만 찾으면, 저 백양나무 언덕만 찾으면 올 수 있을 텐데..."
어린 마리벨에게 있어서 오빠에 대한 신념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앙투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마리벨, 오빤 네게 이미 작별인사를 했단다."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그날 아침, 네가 자고 있을 때 작별의 키스를 했을 거야."
"그렇다면 왜 오빤 날 깨우지 않았죠?
"그건 널 깨우기가 두려워서야. 네가 깨어 있었다면 앙투안을 보내줄 수 있었겠니? 오빤 그래서 몰래 떠난 거야."
마들레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마리벨로서도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오빤 나빠요. 미워요!"
"하지만 마리벨, 앙투안은 꼭 돌아온단다."
"언제?"
마들레느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게 앙투안이 네게 남겨놓고 간 편지야."
마리벨은 와락 달려들어 편지를 빼앗았다. 그러나 마리벨은 그걸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앙투안의 글씨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프랑스 집 지하실에서 앙투안이 공부할 때 마리벨이 옆에서 늘 보아오던 그 글씨가 분명했다.
"난 읽을 줄 몰라요."
"널 데리러 오겠다고 씌어 있단다."
"언제?"
"5년 아니면 10년 뒤겠지."
"5년이나 10년? 그건 아주 먼가요?"
"멀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러나 세월이란 금방 지나간단다."
"언제쯤이죠? 내가 수잔 언니만큼 클 때인가요? 아니면 매기 아주머니만큼?"
"맞았어. 아마 그맘때쯤이면 틀림없이 앙투안이 돌아올 거야."
마리벨은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앙투안이 꼭 돌아온다는 건 좋지만 수잔이나 매기처럼 클 때까지 라면 그건 너무도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마리벨, 그때까지 병나지 말고 수잔처럼 건강하게 기다려야 해. 그래야 오빠를 만나볼 수가 있는 거야. 날마다 창문에만 매달려 있으면 건강해질 수가 없어."
앙투안의 편지를 두 손으로 가슴에 눌러 댄 채 마리벨은 당장에 창문에서 뛰어내려 왔다.
"알았어요, 선생님. 난 몸을 튼튼히 해 가지고 오빠를 기다리겠어요. 그리고 이 편진 내가 가질래요."
"그렇게 하거라. 어차피 네 편지니까."
마리벨의 갑작스러운 변신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마리벨은 편지가 마치 오빠나 되는 것처럼 다정스럽게 가슴에 품었다.
그 후 마리벨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어서 빨리 수잔만큼 커져야지. 오빠를 만나려면 빨리빨리 커져야 할 텐데.'
어린 마리벨의 가슴속에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벨은 참으로 영리한 소녀였다. 하녀들을 따라다니며 한 마디 두 마디 배운 영어가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녀의 프랑스 말만큼 유창해져 있었다.
하녀들은 모두들 그런 마리벨을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그만 몸집으로 못하는 심부름이 없었다. 집안 청소를 거드는 것은 물론, 언덕 너머 외양간에 보내면 커다란 우유 통도 한번 쏟아버리는 일 없이 낑낑대며 정확히 가져왔다.
마리벨에게는 그런 일이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수잔만큼 커지려면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았다. 수잔은 마리벨처럼 의자 위에 올라가지 않고도 창틀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자기는 아직 우유통 하나밖에 들 수 없지만 수잔은 네 개의 우유통을 힘도 들이지 않고 들어서 나르고 있었다.
유난히 따뜻한 봄날 아침이었다. 백양나무 별장 입구에는 붉고 노란 넝쿨장미가 하나둘씩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마리벨은 언덕 너머에 있는 관리인의 집에 가서 바구니에 홍당무를 하나 가득 담아 들고 오는 길이었다.
백양나무 별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발끝에 무언가 걸리는 바람에 마리벨은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구니 속의 홍당무가 쏟아져 풀밭에 여기저기 뒹굴었다. 그것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일어나려 했을 때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가느다란 밧줄이었다.
"야! 잡았다!"
그렇게 소리 지르며 넝쿨장미 숲 뒤에서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걸렸다! 악마가 제대로 걸렸어!"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내 발목을 놔줘! 제발!"
마리벨은 울상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이 동네의 장난꾸러기들이었다.
"안돼! 이 악마야!"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이 순식간에 마리벨을 에워쌌다.
"그런데 아무래도 악마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나처럼 여자아이잖아?"
"그래, 난 마리벨이야. 그러니까 날 놔줘!"
마리벨은 발목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풀어 줘, 조지."
대장인 듯한 캡을 쓴 소년이 밧줄을 잡고 있는 소년에게 명령하자 발목의 밧줄이 풀렸다.
"그럼 넌 악마의 딸이냐?"
조지라고 불린 소년이 물었다.
"아냐, 난 앙투안의 동생이야."
"앙투안? 그게 누군데?"
"응, 우리 오빠야. 내가 기다리고 있는. 너희들 혹시 그런 이름 못 들었니?"
"앙투안? 그런 이름은 우리 마을엔 없어. 아니, 온 영국을 다 뒤져도 그런 이름은 없을 거야."
장난꾸러기들의 대장이 제법 대장답게 으스대며 대꾸했다.
"정말 그렇겠구나. 앙투안은 프랑스 이름이니까."
마리벨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넌 프랑스 아이니?"
"응."
장난꾸러기들은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그것 봐. 악마를 잡으려면 밤에 덫을 놔야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하지만 밤은 너무 무서워."
아이들은 제각각 한 마디씩 했다. 마리벨이 홍당무 바구니를 들고 돌아서려 할 때 대장이 불렀다.
"야! 잠깐만."
"왜?"
"넌 저 집에 사니?"
"응."
"언제부터?"
"지난가을."
"그럼 넌 악마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겠구나?"
"악마라고? 난 그런 건 몰라."
"거짓말 마."
마리벨로서는 악마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난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아."
"우린 다 알고 있다고. 2년 전에도 너만 한 여자애 하나가 저 집에서 악마한테 잡아먹혔다고. 그렇잖아, 비키?"
비키라고 불린, 뺨에 주근깨 투성이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날 밤 걔가 잡아먹혔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너도 이제 곧 잡아먹히게 될 거야. 지금이라도 달아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맞아. 달아나야 해."
마리벨은 도무지 아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 우리 집엔 점잖은 마들레느 선생님 그리고 상냥한 매기 아주머니와 수잔 같은 착한 언니가 살고 있어."
"넌 멍청한 아이로구나. 악마들은 처음엔 누구나 그렇게 점잖고 상냥한 척하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들레느 선생이나 매기 아주머니가 악마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참, 네 오빠 앙투안이 어떻게 됐다고 했지?"
마리벨은 이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튿날 새벽에 깼을 때 앙투안이 없어진 얘기까지 꼬마들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바로 그거야. 앙투안은 달아난 게 아니야. 그날 밤 악마에게 잡아먹힌 거야."
"맞았어. 악마란 정말 무서운 거로구나!"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아! 우리 아빠의 총만 있다면 당장 악마를 잡으러 저 집에 쳐들어 갈 수 있을 텐데!"
"훔쳐 올까?"
"하지만 아빠의 경기병 연대는 스코틀랜드에 있어."
마리벨은 새삼스럽게 백양나무 별장 쪽을 쳐다보았다. 한낮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창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좀 수상해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넌 저 집에 들어갈 거니?"
"가지 않는 게 좋아."
아이들이 모두 걱정하는 얼굴로 마리벨을 말렸다. 그러나 마리벨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난 갈 거야. 가서 너희들 말대로 정말 악마가 사는지 알아볼 거야. 오빠가 잡혀있다면 구해내 올 거야."
"넌 보기보다 용감한 아이로구나!"
"만일 악마를 보거든 창문에 대고 소릴 질러. 우리가 구하러 갈게."
모두들 한 마디씩 걱정해 주는 소리를 뒤로 하고 마리벨은 백양나무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앙투안이 작별 인사도 없이 새벽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각해 온 마리벨이었다. 거기다가 알 수 없는 수상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마리벨에게 2층에는 절대로 올라가지 말라는 거였다.
마리벨은 백양나무 별장 2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느 방이나 창문이 굳게 잠겨진 채 악마의 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2층에 올라가도록 허용된 사람은 마들레느 선생과 매기 아주머니뿐이었다.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날마다 두 사람 분의 식사를 매기 아주머니가 2층으로 가져가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수상한 일이었다.
2층에는 마들레느 선생 한 사람밖에 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사람 분량의 식사는 누구의 것일까? 악마의 것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있는 오빠의 것일까?
백양나무 별장으로 향하는 마리벨의 발걸음이 아주 빨라지기 시작했다. 제 눈으로 모든 비밀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두렵지는 않았다. 혹시나 살아있는 앙투안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이 마리벨의 두려움을 거두어 간 것이었다.
현관에 도착한 마리벨은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부터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홍당무 바구니를 현관 앞 대리석 계단에 내려놓고 마리벨은 살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무도 마리벨이 돌아온 줄 모르고 있었다.
하녀들의 방 쪽에서 이따금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 커다란 홀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오르는 계단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계단을 한 발 내딛다가 마리벨은 제풀에 놀라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오래된 계단에서 삐꺽하고 큰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난간에 몸의 중심을 기대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그렇게 해서 마리벨은 그 많은 계단을 무사히 다 오를 수 있었다.
처음 올라와 보는 백양나무 별장의 2층은 너무나 멋없이 넓기만 했다. 빙 둘러보니 커다란 방문이 있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복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어 버려진 집처럼 보였다. 그런 것이 마리벨에게는 악마가 살고 있을 거라는 선입견과 함께 두려움을 더해 주었다.
어느 방이나 방문은 꼭 닫혀 있었다.
우선 가까운 방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계단 정면의 방 쪽으로 다가갔다.
발돋움을 하여 간신히 열쇠 구멍에 눈을 들이댈 수 있었다.
그곳은 서재였다. 햇빛이 비치는 창의 커튼 앞에 마들레느가 길게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마들레느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는 이따금씩 파이프를 피워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표정이 하도 멍청해 보였으므로 마리벨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악마를 찾아내려던 마리벨의 기대는 마들레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훔쳐보느라고 긴장이 싹 풀렸다. 그런데 서재의 문에서 눈을 뗀 직후였다.
어디선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벨은 바짝 긴장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두 손을 귀에다 대고 소리가 난 듯한 방향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건너편 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소리는 차츰 크게 들렸다. 그건 노랫소리 같기도 했고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긴장한 마리벨의 가슴을 커다란 방망이가 마구 두들겨댔다.
한참 만에야 소리가 나는 방 문 앞에 다다랐다. 소리는 아주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어른의 말소리 같기도 했고 아이의 중얼거림 같기도 했다.
서재의 문에서 했던 것처럼 마리벨은 뒤꿈치를 들어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그러나 그것이 큰 실수였다. 문이 안으로 열리면서 마리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방 안으로 쓰러져 넘어져버린 것이다.
"으하하하... 악마야! 널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무서워서 문을 잠가놓고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아. 어차피 날 잡아먹을 거라면 지금 덤벼!"
마리벨은 엎어진 채 고개를 들어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방 건너편 침대 위에 한 소년이 일어나 앉아서 마리벨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마리벨은 오빠! 하고 소리 지르며 달려갈 뻔했다.
두 눈을 휑하니 뜨고 광대뼈가 튀어나오도록 마른 소년은 영락없는 앙투안의 모습이었다. 다만 앙투안이 금발인데 비해 소년은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인 것이 달랐다.
"어서 일어나, 악마야. 이번엔 아주 예쁜 여자아이의 탈을 쓰고 나타났구나. 그렇게 해서 날 안심시켜 놓고는 잡아먹을 속셈이구나. 그렇지만 난 다 알고 있어. 어서 정체를 드러내라!"
"아니에요, 난... 난... 마리벨이에요."
"소용없다, 악마야. 네가 아무리 교활해도 날 속이진 못해. 네가 빗자루로 변장해도 작은 거미로 변장해도 난 다 알아맞힐 수가 있어. 자, 어서 날 잡아먹어봐. 끝끝내는 네가 날 잡아먹게 되리라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난 그렇게 순순히 잡아먹히진 않아!"
소년은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더니 공중에 대고 한 번 휘익 그었다.
"자, 덤벼라 악마야. 날 이기고 잡아먹어! 난 두렵지가 않아. 끝까지 싸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튀어내려 달려오는 소년은 정말이지 악마처럼 보였다.
마리벨은 절망적으로 고개를 푹 숙여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이제 악마의 칼에 의해 마리벨은 두 동강이 날 차례만 남았다.
갑자기 악마가 조용해졌다. 마리벨은 조금씩 고개를 들어 악마를 쳐다봤다. 악마의 칼 끝이 마리벨의 이마 위에 멈췄다.
"살려줘. 난 악마가 아니야. 도리어 악마에게 먹힐까 봐 겁이 나."
"너도 그렇단 말이야?"
소년은 칼을 거두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마리벨."
"마리벨? 좋은 이름이구나. 좋아. 설사 네가 정말 악마라고 해도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면 네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뭘 하러 여기 왔지?"
"앙투안을 찾으러 왔어."
"앙투안? 그게 누군데?"
"오빠야, 어른들은 오빠가 달아났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오빠가 악마에게 잡아먹혔을 거래."
"그건 아이들의 말이 맞을 거야. 불쌍한 앙투안은 악마에게 잡아먹힌 게 틀림없어. 아마도 나 대신 그렇게 됐을지도 몰라."
소년은 마리벨을 일으켜 세웠다.
"내 이름은 로버트."
그렇게 말하면서 로버트는 마리벨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버트, 정말 악마가 있긴 있어?"
로버트는 대답 대신 마리벨을 오른쪽 벽을 향해 돌려세웠다. 벽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림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의 귀족과 그의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로버트를 닮은 어린 소년과 그의 누이동생이었다.
"우리 가족이야.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와 나만 남았을 뿐이야."
"엄마와 동생은?"
"2년 전이야. 악마가 잡아먹었어."
로버트가 너무도 실감 나게 말해주는 바람에 마리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로버트가 마리벨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아주었다. 마치 앙투안의 품같이 아늑했다.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로버트와 마리벨은 동시에 놀라 흠칫 돌아섰다.
"이번엔 진짜 악마인가 봐!"
"아냐, 저건 마들레느 선생의 발자국 소리야. 얼른 숨어."
로버트는 마리벨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푹 씌워주었다.
그러자 마들레느와 매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부할 시간입니다, 로버트 님. 오늘은 영어와 프랑스어예요."
"싫습니다."
"안됩니다, 로버트 님, 런던의 공작님 엄명이에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아버님처럼 훌륭한 귀족이 될 수 있어요."
"어차피 나도 엄마와 리자처럼 악마에게 잡아먹힐 거예요. 공부 따윈 악마에게나 줘 버려요."
"도련님, 악마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공부를 하게 되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답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난 날마다 악마를 만나는 걸요."
"그건 로버트 님이 환상을 본 겁니다. 절대로 악마는 없다니까요."
"조금 전에도 악마가 왔었는데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도 악마야! 썩 물러가지 못해?"
로버트는 마구 바닥을 구르며 악을 썼다. 마들레느는 한동안 말없이 로버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안 되겠어요, 선생님. 오늘은 도련님이 유난히 발작이 심한 것 같군요."
매기가 절망적인 얼굴로 마들레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봄이 되고부터 로버트의 증세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3일 전부터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로버트는 돌변해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길이 없었다.
마들레느는 돌아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불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마리벨이 빠끔 눈만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됐어, 이리 나와. 다들 갔어."
마리벨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머릿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하... 조금 더 있었으면 아주 익어버릴 뻔했구나."
로버트가 마리벨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로버트라고 했지?"
"그래, 난 로버트야."
"이거 읽을 수 있어?"
마리벨이 품 속에서 곱게 접어 간직한 앙투안의 편지를 꺼내 로버트 앞에 펼쳐 보였다.
"이건... 프랑스어잖아?"
"응, 오빠의 편지야."
편지를 들고 읽으려 했지만 로버트가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지막 앙투안의 사인 뿐이었다.
"프랑스 말을 배우지 않았어?"
우물쭈물하고 있는 로버트를 마리벨이 다그쳤다.
"배우긴 했지. 그것도 3년 동안이나..."
"그런데 그까짓 편지 하나 못 읽어?"
"하지만 난 열심히 배우질 않았어."
"그래도 그렇지. 난 지난가을에 영국에 왔는데도 벌써 이 만큼 영어를 하는데..."
"마리벨, 넌 참 영리한 애로구나. 그렇지만 난... 어차피 악마에게 잡아먹힐 몸이니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변명하지 마, 로버트. 로버트는 멍텅구리야."
로버트의 얼굴이 금세 노여운 표정이 되었다.
"좋아, 마리벨. 당장 내 방에서 나가!"
"내 말에 화났어? 화내진 마. 로버트를 화나게 하려던 건 아냐."
"알고 있어. 일주일 후에 다시 와. 그때까지 난 그 편질 읽을 수 있을 거야."
"3년 동안 배우지 못한 걸 어떻게 다음 주까지 배우지?"
"문제없어. 그러니까 마리벨, 당장 나가 줘."
로버트는 마리벨의 등을 떠다밀며 함께 밖으로 나와 마리벨을 계단까지 바래다주고는 곧장 마들레느의 방을 노크했다.
"웬일이죠, 도련님?"
때아닌 로버트의 방문을 받고 마들레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공부 시간이잖아요."
"뭐라고요?"
마들레느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난 2년 동안 로버트가 자진해서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던 로버트가!
"하지만 선생님, 프랑스어뿐입니다. 프랑스어 한 가지만 배우겠어요."
마들레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아! 드디어 랜버트 가에도 봄이 돌아오고 있구나! 이 광경을 랜버트 공작이 봤다면 얼마나 반가워할 것인가!'
일주일 후 마리벨이 로버트의 방문을 노크했다.
"어서 와, 마리벨."
로버트는 자신에 차 있었다.
마리벨은 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정말 이걸 읽을 수 있겠어?"
"정말이고 말고."
마리벨은 편지를 건네주면서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는 단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마리벨, 몰래 떠나는 오빠를 용서해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 널 찾으러 오마. 그때까지 건강히 잘 있어. 앙투안."
너무나 감격해서 마리벨은 달려가 로버트의 품에 안겼다.
"정말이었어, 로버트! 오빤 악마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었어!"
그렇게 좋아하는 마리벨을 쳐다보며 로버트는 마음 가득 뿌듯함을 느꼈다. 로버트는 힘껏 마리벨을 껴안아 주었다.
"하지만 악마 때문에 걱정이야. 오빠가 돌아왔을 때 내가 악마에게 잡아먹히고 없으면 오빠는 너무나 슬플 거야."
마리벨의 예쁜 두 눈에 다시 수심의 그늘이 덮였다.
"마리벨!"
로버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엾은 마리벨! 내가 널 구해줄게. 악마로부터 널 지켜주겠어!'
"앙투안을 만나보고 싶구나, 마리벨. 아직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앙투안은 내 친구처럼 가까이 느껴진단다. 난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앙투안이 부러워."
그건 로버트의 진심이었다.
'나 혼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젠 마리벨이 있어. 마리벨을 악마에게 내어줄 수는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앙투안에게 널 돌려주겠어! 그러자면 내가 강해져야 돼. 악마를 이길 수 있어야 해!'
자기 밖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귀여운 소녀 마리벨을 껴안고 로버트는 비장하게 결심을 했다. 그러자 웬일인지 온 몸에 새로운 힘이 샘솟는 듯했다.
그날부터 로버트의 공부에는 프랑스어 외에 검술 한 가지가 더 늘었다.
로버트의 병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다. 이따금 밤이면 악마에게 쫓기는 듯한 비명 소리를 지를 때도 있지만 그것도 이젠 한 달에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랜버트 가의 도버 별장 사람들은 로버트가 그렇게 된 것이 마리벨의 덕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리벨에 대한 대접도 자연 극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봄이 끝나갈 즈음엔 로버트가 발병하기 전의 건강 상태로 되돌아왔음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