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5

런던으로 1/2

by 안녕
Épisode 3.


그로부터 4년 후인 1782년 여름.

먼지를 푹 뒤집어쓴 한 대의 마차가 백양나무 별장의 현관 앞에 멈추어 섰다.

마들레느가 마차에서 내리자 달려 나온 매기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어땠어요, 런던 소식은?"

"절망적이라오."

"절망적이라뇨?"

"도련님이 다 나았다는 사실을 공작님이 믿으려 하질 않는다오."

"원, 저런!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도련님을 한 번 만나 뵙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을. 도련님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장하셨는지 한번 보기라도 하셨다면 말이에요."

"나도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드렸소. 그러나 만나지 않으시겠다는 거요. 설사 도련님이 다 나으셨다는 사실을 안다 해도 지금의 공작님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됐어요. 공작님은 랜버트 가의 후계자로 작위를 물려줄 양자를 벌써 택해 놨으니까!"

"끔찍한 일이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네요, 그건!"

2층의 자기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들레느는 가방을 팽개치듯 집어던지고는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그 양자란 사람이 누구죠?"

"그게 바로 커밍스 남작의 아들 안토니 라오."

"오! 국왕 조지 3세의 총신 커밍스 남작의 아들?"

"그러니 지금 와서 도련님이 건강한 몸으로 런던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랜버트 경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단 말이오. 내 설명을 듣고 공작님께서도 처음에는 상당히 고민에 빠지는 듯했지요. 그러나 지금 공작님은 차라리 도련님이 다시 발병하시기를 기다리는 그런 심정처럼 보였다오."

"그건 너무 심한 말씀이에요. 어쩜 그럴 수가!"

"그러나 사실인 걸 어떡하오. 난 지금 도련님을 내게 맡기신 공작님이 원망스럽소!"

그때 들장미를 한 아름 안은 마리벨과 함께 로버트가 나타났다.

이제 열 살이 된 마리벨과 열세 살이 된 로버트, 그들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이었다.

"돌아오셨군요, 선생님!"

"오, 도련님! 그리고 마리벨."

마리벨은 쪼르르 달려가 마들레느의 코 앞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가지세요, 선생님. 오시느라 몹시 피곤하시겠군요. 장미 향기를 맡으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고맙다, 마리벨."

그러나 마들레느는 마리벨이 준 장미를 그냥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놓았다.

"마들레느 선생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시군요. 무슨 걱정이라도?"

마들레느는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기고 있을 일만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 우울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있단 말인가!

"아버님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아... 아닙니다. 공작님은 여전히 건강하시고 유쾌하십니다. 다만..."

"다만?"

"... 실은 공작님께서 이번에 양자를 들이셨습니다."

"양자라뇨? 아버님이 나 말고도 아들이 더 필요하셨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공작님은 랜버트 가의 작위를 물려줄 아드님을..."

"작위는 내가 이어받으면 되잖아요? 난 윌리엄 랜버트의 유일한 아들이고 작위를 사양한 일도 없으니까요."

"공작님의 실수였습니다. 공작님은 도련님의 증세가 완쾌하리라곤 생각지 못하셨던 겁니다. 암튼 7년 전 도련님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공작님은 크게 충격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도련님이 다 나으셨다는 걸 믿지 못하시는 겁니다."

"나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런 무책임한 처사를 아버님이... 좋습니다. 내가 런던에 다녀오시지요!"

"도련님!"

마들레느가 말릴 겨를도 없이 로버트는 홀을 가로질러 현관을 나섰다.

"로버트!"

품에 안았던 장미 꽃다발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마리벨이 뒤따랐다. 현관에는 방금 말을 떼어낸 마차가 아직 세워져 있었다.

"말을 다시 마차에 매도록 해!"

성난 로버트의 호통에 늙은 마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말을 끌고 왔다.

"마리벨, 런던에 다녀와야겠어!"

"로버트, 나도 데려가 줘!"

"안돼! 이건 나와 아버지와의 문제야. 어째서 그런 부당한 처사가 있을 수 있는지 따지러 가는 거야."

"하지만 런던에 갈 땐 꼭 날 데려간다고 했잖아! 약속했었잖아!"

"그렇다면 좋아. 그러나 이건 결코 즐거운 여행은 아닐 거야. 고생을 각오해야 돼."

두 마리의 잉글리시 더러브렛 말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백양나무 언덕을 넘어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다운 민첩한 행동이네요. 이 문제는 공작님과 도련님이 만나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어차피 결과는 뻔한 일일 거예요."

두 마리의 말이 일으킨 안개 같은 먼지가 바닷바람에 실려간 뒤에도 한참 동안 마들레느와 매기는 마차가 사라진 언덕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템스 강을 끼고 쉬지 않고 달리던 마차가 런던 교외에 닿은 건, 이튿날 오후 런던의 빅벤이 다섯 시를 알릴 때쯤이었다. 해는 아직 런던탑 꼭대기 한 뼘쯤 높이에 걸려있었다.

"달려, 해리. 어서 아버님을 만나야 해!"

"달리고 말고요, 도련님!"

마부 해리는 말 잔등에 두어 번 채찍질을 했다. 금방 지쳐 쓰러질 듯하던 말들이 다시 한번 마지막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나 마차는 람베드 다리를 건넜고 이윽고 랜버트 저택 정문에 멈추었다.

참으로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다. 마리벨은 고사하고 이 집에서 태어나 세 살까지 살았던 로버트조차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랜버트 가의 집사 맥코비가 나와서 마차를 맞았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시골 티가 물씬 풍기는 어린 소년이었다.

"랜버트 공작님은?"

"방금 윈저 궁으로 연극 구경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도련님은 뉘신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로버트는 다시 마차를 윈저 궁으로 몰았다.




윈저 궁은 더욱 어마어마했다. 과연 국왕 조지 3세의 궁전답게 크고 위엄이 넘쳐흘렀다.

성문 앞에는 총을 둘러맨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멈춰라! 너희는 누구냐?"

"랜버트 공작님을 만나러 갑니다."

"랜버트 공작님이라고? 무슨 일로?"

"난 랜버트 공작의 장남이다."

로버트의 말에 근위병들이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이 녀석,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녀석일세. 랜버트 공작님은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맞았다는 소문이 온 런던 구석에 파다 해. 너 따위가 우릴 속이려고 해도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은 없어!"

"정말이에요. 이 분은 랜버트 공작님의 하나뿐인 진짜 아들이에요."

마리벨이 나서서 안타깝게 설명을 했다.

"랜버트 공작의 아들이 하나 있긴 있지. 하지만 그 아들은 미쳐서 도버 별장에 갇혀 있어. 이젠 알겠니?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라, 이놈들! 어서 꺼지지 않으면 감옥에 잡아 처넣을 테다!"

왕실 근위병들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았다.

"어쩔 수 없어, 로버트. 집으로 돌아가서 공작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안돼. 오늘 저녁에라도 아버님이 양자에게 작위를 물려준다는 걸 정식으로 공표해 버리면 그땐 모든 게 끝이야. 그러니까 한 시가 급한 거야."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무지막지한 근위병들을 제치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높은 성벽을 타고 넘을 수도 없었다.

로버트와 마리벨은 대책 없이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화려한 마차들이 계속해서 성문 앞에 멈춰 섰고, 정장을 한 귀부인과 귀족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두 사람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울긋불긋 요란하게 색을 칠한 커다란 마차 하나가 성문 근처에서 멈췄다. 그 뒤를 따라 여러 명의, 유난히 화려하고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멈춰 섰다. 그중 한 사람이 근위병에게 다가가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저것 봐, 로버트!"

"응, 나도 보고 있는 중이야."

"어떤 사람들일까?"

"글쎄... 그렇지! 도버에서도 축제 때 저런 사람들을 봤어. 연극단이야. 아까 집사가 말했잖아, 오늘 저녁 이 궁전에서 연극 공연이 있다고."

연극이라면 마리벨도 도버의 시내에서 한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건 등장하는 사람도 두셋 뿐인 간단한 어릿광대 놀음에 불과했지만 무척 재미있고 유쾌했었다고 기억되었다.

"저 사람들은 다 뭐지?"

"배우들일 거야. 진짜 연극에는 여러 명의 배우들이 나오는 거야. 귀족도 있고 농부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왕자와 공주도 있어야 하니까."

"아! 재미있겠다. 나도 한번 구경해 봤으면!"

"좋은 수가 있어. 우리 저 사람들 틈에 끼어 들어가는 거야."

배우들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이었다.

배우들이 무거운 짐을 하나씩 들고 성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로버트와 마리벨도 천연덕스럽게 마차로 다가가 적당한 소도구를 하나씩 들고 그들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됐어, 마리벨! 아무도 우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야."




성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싱싱하게 자란 잔디밭 사이로 예쁜 돌로 촘촘히 깔린 길이 곧바로 혹은 꼬불꼬불 나 있었다.

높은 성의 건물들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창문이 나 있었다. 푸릇푸릇한 이끼들 틈새로 드러나 보이는 창문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배우들의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드디어 연극단이 도착했다!"

사람들이 배우들을 향해 손뼉을 치면 배우들은 창문을 향해 모자를 벗고 멋진 인사를 보냈다. 로버트와 마리벨도 그렇게 따라 했다.

"굉장하군. 예쁜 꼬마 배우들도 있잖아!"

꼬마 배우란 로버트와 마리벨을 두고 한 말이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젊은 남자 배우가 뒤돌아보더니 낯선 꼬마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웬 놈들이야?"

"놔둬. 거리의 꼬마들이겠지 뭐."

"놔두다니! 잘못하면 우리가 귀찮게 돼."

"공짜 구경하고 싶은 꼬마들이야. 우리들도 어렸을 때 그랬었잖아."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내쫓아야 돼."

"그냥 우리와 한 팀인 것처럼 하고 있으면 돼. 지금 와서 내쫓는 건 더 시끄러워질 뿐이야."

유난히 키가 큰 금발의 젊은 배우가 두 꼬마에게 다가왔다.

"너희들은 누구지?"

"난 로버트."

"난 마리벨이에요."

"마리벨? 프랑스 이름이로구나?"

"그래요, 난 프랑스 사람이에요."

"호! 그래? 나도 실은 프랑스 사람이란다. 내 이름은 다르마. 그런데 여긴 왜 따라 들어왔지?"

"우린 사람을 찾고 있어요. 랜버트 공작님 말이에요. 로버트는 랜버트 공작의 아드님이거든요. 그런데 근위병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들 틈에 끼어들어왔다 이 말이로구나. 깜찍한 꼬마들일세."

다르마라는 배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커다랗게 한 번 웃더니 자기 동료들에게 두 아이를 소개했다.

그렇게 해서 배우들은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두 아이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




대리석으로 세워진 제일 큰 건물이 연극을 공연할 장소였다.

"마리벨,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아버님을 만나고 올 때까지."

"괜찮을까?"

"괜찮고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

개막 시간을 앞두고 배우들의 분장실은 장터 같이 분주했다. 화장을 하고 수염을 붙이고 가발을 뒤집어쓰면 젊은이도 영락없이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로미오로 분장한 다르마라는 배우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막이 오르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는 베로나의 광장. 칼을 찬 사람들이 나와 마치 진짜처럼 화를 내며 다투는 바람에 무대 제일 앞에 앉아있던 마리벨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로미오로 분장한 다르마가 등장했다. 분장실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르게 늠름하고 씩씩해 보였다.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는 청초한 줄리엣으로 나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인 사랑을 펼쳤다.

마리벨은 자기 자신이 마치 줄리엣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을 졸이며 기뻐하고 또 슬퍼했다. 마침내 로미오가 죽고 줄리엣이 따라 죽으면서 연극은 막을 내렸다.

생전 처음으로 구경하는 진짜 연극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무대 앞으로 나왔고, 정말 죽은 것 같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다시 일어나 무대 가운데 서서 멋지게 인사를 했을 때 마리벨은 벅찬 감격에 한참 동안이나 박수를 쳤다.

'나도 배우가 되고 싶어! 줄리엣처럼 무대 위에서 슬픈 연극을 해 봤으면!'

그러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았다.

'내 연극은 어떨까? 가엾은 우리 오빠와 나. 그걸 연극으로 해 봤으면! 사람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눈물 흘리듯이 우리들 연극에도 같이 슬퍼해 줄까?'

정말이지 마리벨은 몇 시간 동안 로버트가 자기 곁에 없다는 사실도 잊고 연극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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