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으로 2/2
Épisode 4.
이제 연극이 끝나고 구경꾼들도 사라졌다.
배우들이 나와 무대를 뜯어 마차에 싣고 있었다. 마리벨은 그런 광경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로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귀족 소년들이 무대 근처로 다가왔다. 배우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년들을 정중히 맞았다.
"훌륭한 연극이었소."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그중 제일 키가 크고 성숙해 보이는 소년이 단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마지막이 마리벨 차례였다.
"이 소녀는 처음 보는데. 아까 연극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아직은 연극을 못합니다. 신입 단원이죠."
"아주 깜찍하게 생긴 소녀지, 안토니?"
"조금만 더 컸으면 내 애인으로 삼아도 되겠는 걸."
그렇게 말하면서 안토니라고 불리는 귀족 소년은 마리벨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마리벨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무서워할 것 없어. 네 이름은 뭐니?"
".."
마리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 무례한 귀족에게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봐, 꼬마 배우. 네 이름?"
소년답지 않게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안토니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드려, 귀족님께서 물으시는데."
"..."
그래도 마리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안토니라는 소년을 경멸하는 눈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마리벨입니다. 아주 예쁜 이름이죠."
보다 못한 다르마가 대신 대답했다. 사태가 험악해질 것을 염려해서 대신 대답해 준 것이다.
"마리벨? 그렇담 프랑스 아이인가?"
"그렇습니다."
"프랑스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 유랑 극단에 들어오게 됐지?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 게로군."
"동정받고 싶지 않아요."
처음으로 마리벨이 입을 열었다.
"어허! 제법 뻣뻣하게 나오는데? 좋아. 내가 신사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기로 하지. 마리벨, 어떠냐? 나와 함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이런 떠돌이 생활보다는 우리 집에 가서 편안히 사는 게..."
귀족 소년들이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싫어요. 귀족은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서 내 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안토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자존심을 심하게 상한 모양이었다. 귀족 소년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안토니는 다시 억지로 상냥한 얼굴을 지었다.
"네가 귀족들의 생활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주마. 자, 어서 이리 온."
안토니는 억지로 마리벨을 껴안았다. 마리벨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안토니는 마리벨을 번쩍 안아 들고는 빙글빙글 춤을 추듯 맴돌았다.
"놔줘요! 놔줘요!"
귀족 소년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
갑자기 안토니가 비명을 지르며 마리벨을 놓았다.
"내 팔을 물어뜯었어!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안토니는 무서운 얼굴이 되어 다시 마리벨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사과해, 마리벨!"
겁을 먹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마리벨은 도리어 표독스러운 얼굴로 안토니를 노려볼 뿐이었다.
"용서할 수 없어. 너 따위 유랑 극단 배우가!"
안토니가 마리벨의 뺨을 힘껏 때렸다. 마리벨은 대리석 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졌다. 쓰러진 마리벨을 안토니가 다시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용서하세요, 귀족님. 마리벨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다르마가 울상이 되어 통사정을 했다.
"안돼! 이런 버릇없는 계집 앤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돼. 귀족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말이야!"
안토니는 마리벨의 귀를 마구 잡아당겼다. 그리고 또다시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따귀를 얻어맞은 건 마리벨이 아니었다. 안토니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로버트가 안토니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안토니의 눈에서 별이 번쩍하는 것 같았고 한동안 왼쪽 뺨이 얼얼했다.
사태에 당황한 것은 유랑 극단 배우들이었다. 자기네가 동료라고 속여서 데리고 들어온 두 아이가 사고를, 그것도 기세가 당당한 귀족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것이다.
배우들은 사태가 더 크게 번지기 전에 달아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하나둘씩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넌 누구냐!"
"누군지 알 필요 없어. 어린 소녀에게 손찌검을 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해!
로버트는 당당했다.
"누구야! 이 놈이 누군지 아는 사람 없어?"
안토니가 귀족 소년들을 돌아보았지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왕가와 관련이 있는 귀족이 아님은 분명했다.
"가자, 마리벨!"
로버트는 마리벨의 손목을 잡고 돌아서려 했다.
"멈춰! 나를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도 그냥 걸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토니의 손이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귀족들도 깜짝 놀랐다.
"참아, 안토니. 상대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애야."
"참으라고? 귀족인 내가 뺨을 맞았단 말이야!"
로버트가 돌아서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안토니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귀족이든 뭐든 무례한 짓을 하면 벌을 받아 마땅해."
"뭐라고?"
안토니가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옆 사람의 칼을 빼앗아 칼집 채 로버트 앞으로 던졌다.
"집어! 네가 아무리 하찮은 놈일지라도 무기가 없는 놈을 벤다는 것은 내 명예에 관한 문제다. 귀족의 아량으로 너 자신을 보호할 기회는 주겠다."
"싫어!"
"겁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면 넌 마지막 기회마저 잃는 거야. 가엾지만 나를 모욕한 대가로 내 칼을 받아야 해."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야. 사소한 일로 경솔하게 목숨을 걸 생각은 없어."
로버트는 어디까지나 안토니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어서 칼을 집어! 그리고 덤벼!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안토니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좋아, 정식 결투라면 나도 피하진 않겠어."
"결투라고? 이런 건방진 놈!"
안토니는 정말 이 어린 소년을 칼로 벨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왕궁 안을 어린아이의 피로 물들인다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 건방진 소년을 호되게 겁주어 다시는 귀족에게 덤비지 못하게 하고 사과를 받는 정도로 체면을 수습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것이 이왕 엉망이 되어버린 자기의 체면을 친구들 앞에서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당돌하기 그지없는 꼬마가 정식 결투를 제의해 온 것이다. 이 결투를 피한다면 이젠 그야말로 안토니의 체면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야! 요놈 봐라! 네가 정말 결투를 하고 싶단 말이지?"
"그렇다. 내가 요구하는 건 정정당당한 결투다!"
모여 선 사람들 속에서 탄식이 터졌다.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지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면 안토니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승부는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니 결과야 불을 보듯 뻔했다.
"좋아, 결투다! 아서, 이 결투에서 자네가 내 후견인이 되어 주게!"
안토니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든 이 건방진 녀석의 후견인이 되어 주게. 가엾게 생각할 건 없어, 자기가 판 무덤이니까. 귀족을 모욕한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해!"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넓은 홀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 어리석은 녀석의 후견인 노릇을 할 사람이?"
마리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후견인이 없다면 결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버트는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대리석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소년의 후견인은 내가 되겠소."
아까부터 계단 중간쯤에 서서 이 소동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었다.
"클라렌스 공!"
소년들이 모두 놀라 길을 비켰다.
"누구죠?"
마리벨이 울상이 되어 물었다. 모처럼 결투가 깨어지려는 순간에 나타난 방해자였다.
"클라렌스 공 이래. 국왕 폐하의 셋째 왕자님!"
로버트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클라렌스 공은 로버트 또래로서 왕자답게 당당하고 총명해 보였다.
"클라렌스 공께서 몸소 이 하찮은 소년의 후견인이 되시겠다고요?"
안토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렇소. 난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오."
"농담이시겠죠, 클라렌스 공?"
"농담? 그렇다면 그대들의 결투도 농담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농담으로 생명을 걸고 죽고 죽이고 하는가?"
"하지만 클라렌스 공께서 저 소년의 후견인이 되신다면 어떻게 제가..."
"난 이 소동을 처음부터 지켜봤어. 안토니, 그대는 왜 이런 어린 소년에게 칼을 휘두르나!"
안토니는 이중 삼중으로 망신을 당하는 셈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왕자라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참아, 안토니! 상대는 왕자님이시다!"
아서가 옆에서 소매를 잡아끌어 안토니를 진정시켰다. 안토니는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클라렌스 공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라!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아서란 소년이 로버트에게 권했다.
"감사합니다. 클라렌스 전하. 그러나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감사드리는 건 아닙니다. 기꺼이 제 후견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클라렌스 공은 어쩐지 이 당돌한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귀여운 소녀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나서서 지켜주려는 태도는 정녕 신사답게 여겨졌다.
"그대의 용기는 훌륭했네. 그러나 그대가 결투를 해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대가 보호하고 있는 숙녀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앞으로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하게."
"그러나 전하, 제가 앉아서 처벌을 받으면 이 소녀도 같은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나이끼리의 결투라면 이 소녀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똑똑한 소년이야. 신분만 다르지 않다면 친구로 사귀고 싶군.'
클라렌스 공은 존경의 눈으로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대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검술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키가 크다고 칼싸움을 잘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안토니는 더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이구나."
다시 한번 실랑이가 벌어질 찰나에 현관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안토니! 여기 있었구나."
"아버님!"
안토니는 구원병을 만난 것처럼 반가이 달려갔다.
"아버님, 전 방금 모욕을 당했습니다. 저의 모욕은 랜버트 가문에 대한 모욕입니다. 결투를 허락하시어 이 모욕을 씻게 해 주십시오!"
랜버트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누군가! 내 아들 안토니에게 모욕을 준 자가?"
로버트가 랜버트 공작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
랜버트 공작은 그가 너무 어린 소년임을 알고 놀랐다.
"아니 이건 어린 소년이 아닌가, 안토니?"
"그렇지만 모욕은 모욕입니다!"
공작마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자넨 이름이 뭔가?"
"로버트입니다."
"로버트? 성은?"
"랜버트입니다, 로버트 랜버트!"
"로버트 랜버트?"
공작은 너무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네가 정말 로버트냐?"
7년 전 도버 별장으로 보낸 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아들이 분명했다. 도저히 나을 가망이 없어 보이던 아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씩씩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지 않는가.
"오! 로버트!"
"아버지!"
로버트는 달려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공작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동안 마들레느가 와서 아들의 병세를 알려주긴 했었다. 하지만 로버트가 이렇게 멀쩡하게 나았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서로들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장차 랜버트 가에 일어날 후계자 다툼이 치열해질 것이 누구의 눈에도 뻔히 제각기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랜버트 공, 그대의 아들이 정신 이상으로 도버에 요양 중이라더니, 이 소년이 바로 그 아들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아들의 완쾌를 축하하오. 그러나 공은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양자 안토니를 후계자로 정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
랜버트 공작은 할 말이 없었다.
"아버님! 랜버트 가의 후계자는 바로 접니다. 이 로버트만이 랜버트 가의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있어요."
두 부자가 껴안으며 감격하고 있는 모습을 안토니는 더 이상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안토니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자리를 떴다.
"성급한 처사였군요, 랜버트 공."
클라렌스 공도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따라 사람들도 모두 홀을 비웠다.
"정통의 아들과 양자로 들여온 아들, 이거 한바탕 혼란이 일겠군."
그것은 아마 내일부터 런던 사교계 식탁에 오를 가장 큰 화제가 될 것이었다.
"아무튼 가자, 로버트."
랜버트 공작은 로버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마리벨도 마차에 태웠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았구나! 이제 내 인생은 새로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랜버트 공작의 눈물이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떨어졌다.
램버드 거리의 랜버트 공작 저택은 로버트의 등장으로 생기가 솟았다. 좋아라 떠들어 대는 것은 오히려 하인들 쪽이 더했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공작님도 베개를 높이 베고 주무실 수가 있게 됐어."
"우릴 위해서도 잘 된 일이지. 커밍스 남작의 아들 안토니는 인정머리 없기로 소문이 났어. 하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거야."
"로버트 님은 그렇지 않거든. 고아인 마리벨을 그토록 잘 보살펴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렇지만 안토니가 가만있을까? 어떻게 해서든 약속을 지키라고 대들 텐데."
"그게 골치야. 공작님이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결정을 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는데. 아니 그런 결정을 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도버 별장을 다녀오셨어야 했던 거야."
"하지만 이제 건강한 아들이 나타났으니 안토니라고 별 수 있겠어?"
랜버트 공작은 우선은 아들을 얻은 기쁨이 컸지만 안토니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안토니를 양자로 데려오기로 했지만 작위 상속 문제만은 말로 약속했을 뿐, 아직 세상에 정식으로 공표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법적으로는 로버트를 상속자로 내세우더라도 책임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언약도 약속인 것, 영국의 대 귀족이며 신사인 랜버트 공작이 한번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대서야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지 않겠는가.
며칠 후 윈저 궁에서 랜버트 공작과 로버트를 부르는 전갈이 왔다. 안토니의 아버지 커밍스 남작이 직접 국왕에게 재판을 청했던 것이다.
랜버트 공과 로버트 그리고 커밍스 남작과 안토니, 그들을 앞에 놓고 조지 3세는 심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었다. 둘 다 왕으로서는 조금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중신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야. 어느 한쪽을 택해도 다른 한쪽으로부터 원망을 피할 길이 없겠구나!'
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커밍스 남작이 국왕 앞에 나아갔다.
"폐하! 지금 작위 계승 문제를 확실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 안토니가 랜버트 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것은 공작께서 작위를 상속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아들을 남의 집에 보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국왕은 커밍스 남작의 요구가 하나도 틀린 것이 아니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랜버트 공작의 심중도 이해할 만했다.
"폐하, 이 늙은이에게 한 마디 하게 해 주십시오."
고든 후작이었다. 조지 3세의 대신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고든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폐하, 랜버트 가는 멀리 아더 왕 시대부터 영국 왕실에 충성을 바친 영국의 가장 오래된 전통의 가문입니다. 이제 윌리엄 랜버트 공작의 대에 이르러 양자를 맞아 가문을 잇게 된다면 그건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랜버트 공작이 자신의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아들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양자를 들인 것은 그의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아들 로버트가 완쾌한 지금, 랜버트 가는 양자를 맞이하지 않아도 자기의 혈통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귀족으로서의 약속은 물론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커밍스 남작과 안토니가 영국 왕실과 전통 있는 랜버트 가를 존중한다면 스스로 랜버트 가의 작위를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랜버트 공으로 하여금 약속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도 로버트에게 가문을 이어가게 한다면 커밍스 남작은 후세 사람들한테 존경과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과연 노인답게 설득력 있는 충고였다.
주위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여 고든 후작의 말에 찬성을 표했다.
"커밍스 공, 어떻소? 고든 후작의 제안이 나로서도 사리에 맞는 말 같은데..."
커밍스 남작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폐하! 이 약속은 전 영국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약속입니다.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하찮은 평민들까지도 귀족들을 우습게 볼 것입니다. 랜버트 공작께서 명예롭게 약속을 이행하시도록 폐하께서 하명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커밍스 남작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커밍스 남작, 그대의 선친은 나의 가장 다정한 친구였으며 최고의 신사였소. 돌아가신 커밍스 공이라면 아마 기꺼이 내 충고를 받아들였을 것이오. 아니, 내가 이런 충고를 할 필요조차 없었을 거요. 국왕 폐하와 우리 모두를 난처하게 만드는 고집을 버려 주기를 바라오."
고든 후작의 말씨는 자상하고 조용했지만 내용은 준엄했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모두들 우리 부자를 얕보지 마십시오. 소인과 소인의 아들은 권리를 어디까지나 지킬 결심입니다. 폐하! 부디 현명하신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국왕 조지 3세는 이 모든 일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당사자인 랜버트 공작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랜버트 공작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커밍스 남작이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단 한 가지밖에 있을 수 없었다.
"폐하, 난처한 입장에 빠뜨린 소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커밍스 남작과의 약속은... 지킬 결심입니다."
말을 마친 랜버트 공작은 비틀거렸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로버트가 아버지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안됩니다, 랜버트 가의 상속자는 여기 있습니다. 아버님의 약속은 제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약속이 아닙니다!"
"물론이다, 로버트. 그대에게도 작위를 물려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 있고 말고."
국왕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수수께끼로군!"
"그러나 그다지 어려운 수수께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폐하!"
그것은 어린 클라렌스 공의 목소리였다. 조지 3세는 클라렌스 공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클라렌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폐하, 어른들이 이 문제로 몇 시간씩이나 끌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답답합니다. 어리지만 제 의견도 들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좋아. 그럼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매사를 신중히 하라,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랴는 것입니다. 그건 폐하께서 늘 제게 귀가 아프도록 들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조지 3세는 영리한 왕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원가 묘안을 갖고 있는 듯해 보여서 몸이 달아 어린 왕자를 쳐다보았다.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거라!"
"저라고 당장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헤아리고 계시듯 이건 폐하께서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상속 결정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는 겁니다. 로버트와 안토니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는가를 기다렸다가 그걸 보고 결정을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 의견입니다."
국왕은 무릎을 쳤다. 과연 똑똑한 왕자였다. 국왕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들 들었소? 클라렌스의 의견이 어떻소?"
"과연 왕자님 다운 의견입니다. 우리 늙은이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현명한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국왕은 만족했다.
"좋소, 그럼 그렇게 결정합시다. 말하자면 결정을 늦추자는 거요."
그러나 커밍스 남작과 안토니는 즐거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폐하! 이런 문제는 한 시라도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누구든 피해를 덜 입게 됩니다."
커밍스 남작이 국왕 앞에 나아가 외쳤다.
"커밍스 공, 그대는 자신의 아들을 훌륭하게 키울 자신이 없는 모양이로군!"
어린 클라렌스 공의 말속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폐하의 결정에 따르는 게 공에게도 유리하지 않겠소?"
국왕도 랜버트 공작도 그리고 고든 후작을 위시한 모든 사람이, 커밍스 남작을 몰아세우는 클라렌스의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 좋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명하신다면."
아무리 음흉하고 염치없는 커밍스였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이 문제는 그렇게 결정을 하겠소. 랜버트 가의 작위 계승 문제를 결정하는 시기는 대신 피트 공께서 따로 결정을 내려주시오."
조지 3세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클라렌스도 일어서며 로버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로버트는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영리한 왕자님이실까!
하마터면 약속이라는 굴레 때문에 가문과 재산을 몽땅 잃을 뻔한 자기를 구해 준 클라렌스 왕자!
"런던으로 오거든 이곳에 자주 놀러 오게. 난 아주 심심하다네."
"감사합니다, 클라렌스 전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국왕과 왕자가 떠나자 피트 대신이 결정된 문서를 읽었다.
"랜버트 가의 상속은 5년 후인 1787년, 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자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다."
로버트와 안토니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촌놈아!"
그러나 로버트는 자신이 있었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건강해져서 아버님과 자기를 도와준 클라렌스 공의 은혜에 꼭 보답하리라. 내 기필코 가문과 작위를 지키리라!'
그렇게 결심하며 로버트는 윈저 궁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