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7

사라진 마리벨

by 안녕
Épisode 5.


1786년 봄.

14살이 된 마리벨은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해 있었다.

로버트는 17살로서 명문 이튼 예비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이튼 학교는 영국 귀족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로,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코스기도 했다.

어느 날 로버트는 런던 사교계의 여왕인 해밀튼 부인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마리벨, 어서 준비해!"

마리벨의 방문 앞에서 로버트는 소리쳤다. 로버트는 마리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가 무척 궁금했다.

"로버트!"

하지만 마리벨이 나타난 곳은 자기 방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는 단장을 마치고 현관 밖에 나가 로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눈부신 마리벨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런던의 어떤 미녀를 데려다 놓아도 마리벨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로버트, 내게 온 편지예요."

마리벨의 손에 예쁜 꽃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편지라고?"

"그래요, 생전 처음이에요. 편지를 받은 것은!"

"상대가 누구지?"

"모르는 사람인데 메이어 남작의 서명이 있어요."

마리벨이 편지를 뜯으려 하자 갑자기 로버트가 펀지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무슨 짓이에요, 로버트! 내 생전 처음 받아보는 편지를!"

"정신 차려. 이 자는 마흔이 넘은 홀아비야."

"마흔 살이 넘었다고요? 하하... 그렇다면 자기 아들 대신 편지를 쓴 것인지도 모르잖아요."

마리벨은 정말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잡고 깔깔댔다.

"마리벨, 확실히 말해두지만 남자들의 사탕발림에 혹하지 말길 바래. 네 상대는 내가 골라 줄 거야. 런던에서 가장 멋지고 씩씩한 남자로 말이야."

마리벨은 그렇게 말하는 로버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로버트, 내 상대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는 눈빛으로.

"자, 어서 서둘러 마차를 타자. 파티에 늦는 건 예의가 아니야."

로버트와 마리벨이 다정스럽게 나가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보는 랜버트 공작의 마음은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될 수만 있으면 로버트를 마리벨과 떼어놓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별일 없을 거야. 로버트는 분별력이 있는 녀석이니까. 다만 인정이 너무 많은 것이 탈이지. 마리벨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뜻 외에는 없을 거야.'

그때 두 사람을 바래다주고 집사 맥코비가 들어왔다.

"공작님도 보고 계셨군요. 도련님이 마리벨과 동행하신 걸."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랄 것까진 없겠지만, 그러나... 암튼 괜찮을까요?"

"무슨 얘긴가?"

랜버트 공작은 짐짓 딴전을 피웠다.

"저 두 사람 말입니다. 나쁜 소문이라도 나는 날이면..."

"너무 걱정 말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잖은가! 시골에서 올라와서부터 그들은 내내 같이 붙어 다니지 않았나?"

"하지만 나리, 내년은 포커스 집안의 안토니 님과 로버트 님이 상속권을 놓고 결판을 지을, 5년째 되는 해입니다."

"..."

"아무리 마리벨이 좋은 아이라 해도 어느 집안 출신인지도 알 수 없는 고아입니다. 다행히 로버트 님이 워낙 총명하시니 상속권 경쟁에선 유리할 거라는 세상의 평판이지만, 만일 저 마리벨과 스캔들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맥코비, 마리벨은 이제 겨우 열네 살이라네."

" 그러나 보시다시피 매우 성숙합니다."

"그런 문제를 걱정하기엔 아직 두 사람 다 너무 어려."

"그러나 일이 벌어진 뒤에는 너무 늦습니다."

"..."

맥코비의 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랜버트 공작 자신의 가슴속에서 한 시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근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리, 요즘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 줄 아십니까?"

"소문이라니?"

"도련님과 마리벨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고약한 사람들이 지어낸 소문이야!"

랜버트 공작은 두 손을 불끈 쥐고 서재로 들어갔다. 맥코비는 랜버트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를 한 번 추스렸다.




파티장은 시간이 되기 전부터 몰려온 손님들로 미어터질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밀튼 부인이나 그녀의 딸 패트리셔가 다 같이 런던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모여든 젊은이들의 화제는 로버트와 마리벨의 얘기에 집중되었다.

"오늘도 로버트가 마리벨을 에스코트해서 나타날까?"

"글쎄, 만일 그도 패트리셔 양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겠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여태껏 한 번도 로버트가 마리벨과 동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거든."

청년들의 얘기는 끝도 결론도 없이 계속되었다.

"아이, 저것 좀 봐! 안토니가 혼자 앉아 술만 마시고 있잖아!"

"저러다간 로버트에게 상속권을 빼앗기고야 말 걸!"

"벌써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어. 우리 아버지 말씀으론 안토니가 주정뱅이라는 소문은 국왕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야."

"하지만 로버트에게도 혹이 하나 달려있잖나."

"마리벨이란 계집애 말이지?"

"꽤 예쁜 척을 하던데. 그런데 그 계집은 분수를 모르는 거야. 제 주제에 감히 로버트 님을..."

"그래도 로버트 님은 마리벨 밖에 모르는 모양이더라."

"마리벨만 없었다면 나도 한 번 로버트 님을 유혹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소녀들의 재잘거림도 끝이 없었다.

갑자기 파티장이 조용해지고 대중들의 시선이 한 군데로 쏠렸다. 로버트와 마리벨이 나타난 것이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것 봐! 또 함께 나타났지?"

사내들 사이에서 로버트가 마리벨과 함께 나타나는가, 아님 혼자 나타나는가에 내기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해밀튼 부인, 그리고 패트리셔 양, 우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굉장한 파티로군요."

"과분하신 칭찬입니다!"

뒤이어 클라렌스 공의 모습이 입구에 나타나자 모두들 박수로 맞았다. 누구보다도 로버트가 반가이 클라렌스를 맞았다.

"전하,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걸 사과드립니다."

"천만에. 그대가 이튼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만 한다는 소문에 마음 든든하오."

역시 클라렌스는 달랐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로버트를 칭찬해 주었다.

"제 친구 마리벨을 소개하겠습니다."

마리벨이 정중하게 두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마리벨? 오호라, 그 유명한 마리벨이로군. 4년 전 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본 기억이 있소. 그땐 아주 작은 소녀였는데 몰라보게 성숙하고 아름다워졌군요."

"절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소문으로 듣고 있었소. 두 사람은 언제나 꼭 붙어 다닌다는데,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오?"

"단순한 소꿉친구입니다, 전하!"

"하하... 소꿉장난을 언제까지 하려는 것인지 궁금하군. 내 충고하리다. 부득이한 사연이 아니라면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게 처신하도록 하시오."

파티장에 왈츠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짝을 맞춘 남녀들이 다뉴브 강 물결처럼 넘실대기 시작했다. 클라렌스는 패트리셔와 그리고 로버트는 마리벨과 어울려 그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쪽 구석 소파에 안토니가 혼자 앉아 춤추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상당히 마신 안토니는 춤을 추자는 소녀가 나서도 따라 일어설 수조차 없도록 취해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교활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 저 두 사람을 갈라놓으면 돼. 거기서부터 로버트의 파멸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난 랜버트 공작이 될 수 있어. 여태껏 저 두 사람이 스캔들을 일으키도록 기다린 내가 바보였어. 작전을 바꾸어야 해.'

안토니는 일어섰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파티장 밖으로 나갔다.




"마리벨! 공작님이 부르세요."

학교로 떠나는 로버트의 마차를 전송하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 마리벨은 매기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랜버트 공은 서재에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오, 마리벨."

랜버트 공은 한 번 마리벨을 쳐다본 후 흔들의자를 벽 쪽으로 돌렸다. 무척 힘든 말을 하려는 듯 보였다.

"마리벨, 어제 해밀튼 부인의 파티는 재미있었나?"

"네, 그랬어요. 클라렌스 공 전하도 오셨고요. 굉장히 크고 화려한 파티였어요."

그러나 그 다음 랜버트 공작은 말이 없었다. 벽 쪽을 향해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아마도 퍽 어려운 얘기를 할 징조가 틀림없었다.

"마리벨!"

"네?"

"마리벨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들어주겠나?"

"무슨 부탁이신가요?"

그제야 랜버트 공작은 돌아앉았다. 한참 동안 마리벨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카디프에 친척이 하나 있는데..."

랜버트 공작은 다시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딸 아이의 상대를 해 줄 친구를 구하고 있어. 마리벨이 가 주지 않겠나?"

"..."

마리벨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태껏 자기를 친딸처럼 돌봐 준 랜버트 공작이었다. 이만한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로버트와 헤어져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리벨, 여기에 정이 많이 들어 괴로운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꼭 들어주어야 할 부탁이란다."

"...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리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고맙다, 마리벨"

"언제 떠나야 하죠?"

"사실 지금 밖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단다."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였다.

"로버트 님에게 작별 인사는 하게 해 주세요."

"로버트에겐 내가 전해 주겠다."

이미 다 짜인 각본임을 마리벨은 직감했다.

복받치는 설움에 마리벨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카디프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250km나 떨어져 있는 항구 마을이었다. 마차를 타고 달려도 열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 멀고 먼 곳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가 있으면 되죠?"

"로버트의 상속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만이야. 적어도 내년 가을까지는 있어줘야겠어."

최소한 일 년 반 동안 마리벨은 런던에 돌아올 수 없다는 얘기였다. 단 하루도 로버트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리벨에게 그것은 너무도 혹독한 주문이었다. 아마 로버트에게도 마찬가지리라.

"그러니까 중요한 물건을 모두 챙겨가지고 당장 떠나도록 하거라!"

마리벨은 요즈음 자기와 로버트에 관해서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이상 랜버트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상속 문제 때문에 로버트와 날 떼어놓으려는 속셈이구나.'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로버트가 없는 시간을 택해서 떠나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비겁한 처사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리벨은 결심했다. 공작의 결정은 자기가 거절할 수 없도록 확고한 것 같았다. 그것이 로버트를 위한 길이라면 마리벨로서도 괴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옷가지와 성경을 챙겼다. 그리고 언젠가 로버트가 준 선물도 깨지지 않도록 옷가지 사이에 넣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것은 로버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벽걸이 접시였다.

"로버트,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걸 용서하세요."

짐을 다 싸고 나서 마리벨은 침대 위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마리벨, 떠날 시간이야."

집사 맥코비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마리벨을 전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코비가 카디프까지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절대로 런던에 돌아와서는 안돼. 편지도 물론 하지 말아야 해."

마리벨에게 있어서 그것은 고통의 길이었다.

"상속 문제가 결정되면 돌아와도 된다고 하셨어요."

"안돼, 마리벨!"

마지막 가냘픈 희망마저도 뭉개버리는 맥코비의 말이었다.

"도련님을 잊어야 해. 언젠가는 네가 버림을 받게 된단다. 네가 불행해져. 지금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나중엔 네가 울게 돼, 마리벨! 슬픈 신세가 되고 마는 거야. 차라리 지금 이렇게 되는 게 널 위해서도 다행이야."




마차가 카디프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자정이 지나서였다.

밍거스 남작 댁은 항구 도시 카디프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낡은 저택이었다. 그것은 저택이라기보다 창고라고 부르는 것이 맞았다. 금방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폐옥을 쳐다보며 맥코비조차 놀라는 눈치였다.

마차가 멎는 소리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늙고 비쩍 마른 사내가 튀어나왔다.

"밍거스 남작?"

"내가 밍거스요. 기다리고 있었소, 약속한 돈은?"

맥코비는 가방을 열어 준비해 온 돈을 건네주었다.

"백 파운드요. 그리고 이 아가씨가 여기 있는 동안은 매달 십 파운드씩 보내드리겠소."

밍거스는 돈을 받아 쥐고는 귀신같은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마리벨의 실망하는 얼굴,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대하기가 괴로웠던 맥코비는 이내 돌아서서 마차를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밍거스 남작 댁은 부부 외에 열다섯 살짜리 베티라는 딸과 존이라는 열여덟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돼지처럼 지저분하고 뚱뚱한 남작 부인은 남작 부인이라기보다는 거리의 청소부 같은 인상이었다. 제 어미를 닮은 베티는 심술궂기 짝이 없게 생긴 소녀였다. 아들 존은 아버지를 닮아 키가 엄청나게 크고 비쩍 말랐는데 가난뱅이 주제에 고급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네가 마리벨이라는 바람둥이 계집애로구나?"

베티가 말하는 투로 보아 결코 친구로 부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법 쓸 만하게 생겼는데요, 어머니. 예의범절도 그런대로 배운 티가 있고. 집안만 괜찮다면 색시로 삼아도 되겠군요."

아들 존의 눈빛은 탐욕스럽게 빛났다.

"하지만 앙큼한 계집이란다. 오죽했으면 로버트를 다 유혹했겠니? 조심하도록 해라. 이런 천하의 고아들은 남자를 유혹하는 일이 남달라. 살아가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거든. 하마터면 로버트 신세를 망칠 뻔했잖냐."

"한밤중에 웬 수다들이 그렇게 길어! 암튼 우리 집에도 이제 하녀가 하나 생긴 거야. 그러니 상것 앞에서 이젠 좀 체통을 지키라고. 그리고 너 이름이 뭐랬지?"

"... 마리벨."

"이름은 그럴 듯하군. 성은 물론 없겠지. 너도 어서 가서 자거라. 그리고 내일 아침부턴 일하기 편한 복장을 하고 주방으로 나가 봐. 네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단다. 게으름 피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루 사이에 마리벨에게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생각해 보면 랜버트 가에 있었던 때의 마리벨은 공주나 다름이 없었다. 그건 물론 로버트가 보살펴 준 덕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고약한 주인 집의 하녀 신세가 된 것이다.

밍거스 부인이 안내해 준 마리벨의 방은 2층에 있는 다락방이었다. 단 하나 달려있는 창문조차도 유리가 깨어져 한쪽은 널빤지로 대어져 있는, 방이라기보다는 헛간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딱딱한 침대 위에 놓인 누더기 같은 이불을 보니 누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내 처지로는 하녀가 제격일 거야. 랜버트 댁에서의 지난 십 년은 하나의 꿈이었어. 아! 로버트.'

로버트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젠 잊어야 할 사람이었다.

장차 랜버트 가의 상속권을 이어받아 공작이 되면 자기 따위의 고아 신분으로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마리벨은 어릴 적에 헤어진 오빠 앙투안을 생각했다.

그동안 오빠를 영 잊었던 것은 아니지만 로버트와의 랜버트 가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기에 다만 그리운 추억으로 이따금 생각났을 뿐이다.

이제 또다시 어렵고 씁쓸한 처지가 되자 앙투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오빠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오빤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어. 날 찾으러 꼭 올 거야.'

앙투안 생각을 하면 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앞날의 시련을 견디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밍거스 댁에서의 첫 번째 시련이 곧 찾아왔다.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마리벨의 귀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창문 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존이었다. 빗물받이 홈통을 타고 올라와 창문을 열려는 중이었다.

"나야, 마리벨!"

"무슨 짓이에요?"

마리벨은 죽을힘을 다해 창문 고리를 꼭 잡았다. 창문을 열려고 힘을 쓰던 존이 갑자기 뒤로 나자빠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마당에 나가 떨어졌다. 낡은 홈통이 부서져 떨어져 나간 것이다.

밍거스 가족이 뛰쳐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마리벨이 날 이층에서 떠다밀었어요!"

다행히 존은 벽을 바르려고 쌓아 놓은 모래 위에 떨어졌기 때문에 큰 부상은 없었다.

"네가 오빨 유혹해 놓고서! 정말 독살스러운 계집애로구나!"

"난 아무도 유혹하지 않았어요. 내가 떠다민 것도 아니에요. 저절로 홈통이 부숴져..."

밍거스 남작이 따귀를 올려붙이는 바람에 마리벨은 맥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위에 사정없는 발길질이 한참 동안이나 가해졌다.

"이 계집에겐 사흘 동안 아무것도 주지 말아라. 처음부터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야 해!"




"마리벨이 아픈가?"

"...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안 보이지?"

"..."

마리벨이 보이지 않았다. 로버트가 학교에서 오는 시간에 맞춰 현관 밖까지 마중 나와 있곤 하던 마리벨이 어제저녁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제 하루쯤은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에도 마리벨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맥코비, 어서 말해 봐. 마리벨이 어떻게 된 거야?"

"... 실은 공작님께서 시골로 보내셨습니다."

"시골로? 시골 어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마차가 와서 데려갔으니까요."

딱 잡아떼는 맥코비를 더 상대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단단히 함구령이 내려진 모앙이었다.

로버트는 당장 2층 아버지의 서재로 뛰어올라갔다.

"아버님! 마리벨을 어디로 보냈습니까?"

"잠시 시골에 가 있도록 했다."

"무슨 이유로요?"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니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내년이 상속권 문제를 결판 지을 해라는 걸 명심하도록!"

"그래서 마리벨을 제게서 떼어놓으신 거군요. 가엾은 마리벨을!"

"좀 안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단다. 런던 사교계에 파다한 소문을 너도 알고는 있겠지?"

"소문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그의 오빠가 와서 데려갈 때까지는 제가 돌봐 주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아. 너희들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을 애써 퍼뜨리며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건 아버님의 변명입니다. 저희 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한!"

"로버트, 난 네 상속권 문제가 결정 나면 마리벨을 다시 데려올 생각이다. 그런데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영영 못 만나게 할 수도 있어."

"좋습니다, 아버님. 제 힘으로 찾아보겠습니다."

로버트는 그렇게 말하고 서재를 나섰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맥코비와 하녀들을 다그쳐 보았지만 대답은 한 가지였다. 아무도 마리벨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비밀은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마리벨의 거처를 알아내고 말 거야!"

마리벨을 잃은 로버트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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