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1/2
Épisode 6.
"마리벨이 없어졌다고?"
"며칠 전부터 로버트가 필사적으로 찾고 있답니다."
로버트와 함께 랜버트 가의 상속권을 놓고 경쟁 중인 안토니로서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랜버트 공작의 계획이야. 로버트의 주위를 정리해서 상속권 경쟁의 장애물을 없애려는 거로군. 이거 문제가 심각하게 되어가는 걸.'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입장인 안토니로서는 그것이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토니의 얼굴에 교활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마리벨의 실종이 자기에게 마지막 기회를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마리벨의 거처를 알아오게."
안토니는 정보를 알려준 하인에게 금화 한 닢을 쥐어 주었다.
"성공하면 한 닢을 더 주겠네."
그날 밤 맥코비는 여느 때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외동딸 엘렌의 방문을 노크했다. 집사 맥코비는 랜버트 가의 별채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홀아비였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딸아이의 방을 둘러보는 것이 버릇이었다.
엘렌의 방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맥코비는 그냥 돌아설까 하다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방문을 밀어보았다. 방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엘렌?"
방에 들어선 맥코비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복면을 쓴 사내가 침대 위에서 엘렌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요! 당신?"
"떠들지 마!"
강도였다. 강도는 겨누었던 칼로 엘렌의 잠옷 앞자락을 그었다. 그러자 예리한 칼날에 베어진 잠옷은 볼품없이 벌어져 어깨의 살이 드러났다.
"제발!"
맥코비는 처참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알겠지? 내 말을 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네 딸을 죽일 생각은 아니야. 다만 이 예쁜 얼굴에 상처는 좀 나겠지."
엘렌이 한 번 몸을 비틀었지만 강도의 억센 팔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게 뭐요?"
"별 것 아냐. 마리벨의 거처를 말해 줘!"
"뭐라고요? 그건 안돼!"
"안 된다고? 이 칼을 장난으로 들고 있는 건 아냐!"
강도의 칼끝이 엘렌의 이마를 겨냥하자 그녀는 기절해 버렸다.
"잠깐!"
맥코비는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랜버트 공작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바보 같은 질문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마. 네게 그걸 말해줄 생각이면 내가 왜 복면을 했겠나? 어서 말해. 마리벨은 어디 있나?"
"난... 모르오."
"몰라?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강도의 칼끝이 엘렌의 이마를 그었다.
"안돼!"
칼끝이 지나간 엘렌의 이마에 붉은 피가 땀방울처럼 맺히는 것이 맥코비의 눈에도 잘 보였다.
"봤지? 이건 약과야. 다음번엔 정말 깊숙이 칼질을 할 거니까!"
"제발! 말하겠소. 그 아이를 놔주구려."
"진작 그렇게 나올 거지. 자, 말해 봐. 마리벨은 어디 있지?"
딸이 위험한 지경에 있다고 해도 랜버트 공작과의 약속을 어기고 마리벨의 거처를 말한다는 것은 맥코비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신은 로버트 님이 보낸 사람인가요?"
"맘대로 상상해. 마리벨의 거처를 알려는 사람이 날 보냈어. 난 단지 심부름꾼일 뿐이야."
로버트가 보낸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요사이 로버트는 미친 듯이 마리벨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만일 로버트가 보낸 사람이 확실하다면 실토를 한다 해도 마음의 부담은 훨씬 가벼워질 것 같았다.
"자! 어서 말하시지!"
강도가 칼끝을 이번에는 엘렌의 뺨 위에 곧추 세웠다.
"말하겠소, 카디프요. 카디프의 밍거스 남작 댁!"
비로소 강도가 엘렌을 놓아주었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이오."
"만일 거짓말이면 다음번에는 너와 딸의 목숨을 내가 가져갈 테야!"
그렇게 말하고 강도는 창을 넘어 연기처럼 사라졌다.
맥코비는 엘렌을 일으켜 안았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는 크지도 깊지도 않았다.
"믿을 수가 없어. 도련님이 이토록 비열한 방법을 쓰시다니!"
"사랑에 눈이 멀었나 봐요. 가엾은 로버트 님!"
토요일 오후, 이튼에서 돌아온 로버트의 마차가 랜버트 저택에 도착했다.
엘렌은 실크 해트에 연미복의 이튼 교복을 입은 로버트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섰다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마리벨이 없어진 후부터 로버트의 시중은 엘렌이 맡고 있었다.
"잘 있었어, 엘렌?"
"..."
그러나 엘렌은 대답이 없었다. 로버트는 엘렌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엘렌?"
"..."
그래도 엘렌은 대꾸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이마에 난 작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마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엘렌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로버트를 노려 보았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무슨 얘기야?"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전 도련님이 그렇게 비열한 분인 줄은 몰랐어요."
"뭐라고? 날더러 비열하다고?"
"그렇지 뭐예요.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엘렌은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로버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앞서 가는 엘렌의 어깨를 잡았다.
"이봐, 내가 네 얼굴을 그렇게 했다고?"
"도련님이 시키신 일이 아니란 말인가요?"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난 지금 막 이튼에서 돌아오는 길이잖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도련님은 마리벨을 찾고 계시잖아요."
"물론이지. 이번 주말도 마리벨을 찾는 일로 다 보내게 될 거야."
"마리벨이 어디에 가 있는 줄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글쎄, 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히 얘기해 봐."
엘렌은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을 눈물을 흘리며 얘기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련님이 보낸 게 아니란 거예요?"
"맹세해도 좋아. 그건 절대 내가 아니야!"
"어쩜 좋아. 아버진 마리벨이 어디 있는지 그 사람한테 다 말했는데..."
"말해 줘. 마리벨은 어디에 있지?"
"카디프요, 카디프의 밍거스 남작 댁."
밍거스 남작이라면 로버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외가 쪽 먼 친척으로 몰락한 귀족이었다. 한 달 전쯤만 해도 랜버트 저택에 와서 궁상을 떨고 랜버트 공작으로부터 몇 푼 얻어간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왜 진작 밍거스 남작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마리벨을 숨기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카디프의 밍거스 남작 댁이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누군가 자기 외에 마리벨을 찾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게 누굴까! 무엇 때문에? 혹 앙투안이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앙투안이라면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아버지에게 자기가 마리벨의 친오빠임을 얘기하고 떳떳하게 데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로버트의 생각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무언가 마리벨에게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마리벨의 거처를 알아간 사람은 엘렌의 얼굴에 상처를 낼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다.
로버트는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입은 옷 그대로 마차에 다시 올랐다.
"가자! 카디프로!"
카디프의 밍거스 남작 댁은 요 며칠 사이에 굉장히 흥청거렸다. 모두가 마리벨 덕분이었다.
랜버트 공작으로부터 백 파운드라는 거금을 받은 것만 해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셈인데 마리벨을 하녀로 부려먹을 수가 있어서 이중으로 수지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런던에서 왔다는 젊은 귀족이 마리벨을 사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안됩니다. 랜버트 공작이 알면 큰일 납니다."
귀족이라는 청년이 백 파운드를 내놨다. 밍거스는 그 돈이 탐나기는 했다. 고아 계집 하나를 내주는 대가로 백 파운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남는 장사였다.
그러나 랜버트 공작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급한 일이 있을 때 신세를 지기는 어려울 테니 득실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군요. 공작님과의 약속이 있어서..."
청년은 오십 파운드를 더 내놨다.
"아무 말 말고 받아두시오. 공작에게는 마리벨이 달아났다고 하면 그뿐이잖소. 웬 사내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말이오."
밍거스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백오십 파운드라면 그들 가족이 3년 동안은 어려움 없이 살아갈 만한 거금이었다. 그걸 물리치기에는 랜버트 공작과의 약속 따위는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게 간청하시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려. 하지만 랜버트 공작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말해서는 안되오. 마리벨은 제 발로 달아난 것이오. 그걸 약속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마리벨은 청년 앞으로 불려 왔다. 온종일 일에 지친 마리벨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이 손님을 따라 런던으로 가거라."
마리벨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젊은이를 따라 런던으로 가라는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사실 마리벨은 한 시도 런던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로버트가 보고 싶었다. 로버트가 있는 런던! 런던으로 달아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꾹 참았다.
내년 가을까지만 기다리자! 그래서 로버트가 작위를 물려받으면 그때 런던으로 가자. 그때까지의 고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견디는 중이었다.
"전 갈 수 없어요, 공작님과 약속했는 걸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내년 가을까지는 런던에 나타나지 않겠다고요."
"이 분은 랜버트 공작님이 보내셨단다. 공작님이 널 부르시는 거야."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건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네가 가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마리벨의 생각에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 로버트! 사랑하는 로버트에게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작이 자길 갑자기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벨은 부랴부랴 청년의 마차를 탔다. 경황 중에도 그녀는 앙투안 오빠의 편지와 로버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접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로버트가 무사해야 될 텐데!"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린 로버트의 마차가 밍거스 남작 댁에 도착한 것은 일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로버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남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마리벨이 없어진 데에 대한 책임 추궁은 언젠가는 당할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교활한 밍거스에게는 이미 충분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리벨은 어디 있습니까?"
"마리벨이라고? 자네도 운이 없군, 엊저녁에 떠났다네."
"떠나다뇨?"
"공작님께서 부르셔서 급히 런던으로 갔네. 자네가 런던을 떠난 시간이랑 마리벨이 여길 떠난 시간이 아마 같을 걸세. 그러니까 도중에 엇갈린 셈 이로구만."
"아버지가 불렀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암튼 그 사람은 공작님께서 마리벨을 데려오라고 하셨다는 거야. 나야 어쩔 수 있나. 맡긴 사람도 공작님이고 데려가겠다는 분도 공작님이시니 분부대로 따를 수밖에."
"마리벨을 맡긴 건 아버님이지만 데려간 사람은 분명히 아버님이 아닙니다. 남작! 마리벨을 찾아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책임을 면치 못 할 거요!"
로버트는 대들었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남작이 아니었다.
"날더러 책임지라고?"
"그렇습니다. 마리벨을 보내라는 아버님의 서명이 든 편지를 받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것 봐. 마리벨이 내 집에 와있다는 사실은 공작님과 나밖에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까 런던에서 마리벨을 찾으러 왔다면 그건 분명 공작님께서 보내신 거야. 편지나 위임장 따위보다는 그 사실이 더 믿을 만한 거라네. 그러니 나로선 마리벨을 데리러 온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로버트로서는 교활한 밍거스 남작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없어진 마리벨을 놓고 이제 와서 남작과 입씨름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로버트는 다시 런던으로 마차를 몰았다.
'마리벨이 위험하다. 이건 분명 음모야. 마리벨을 구해야 해!'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그렇게 더딜 수가 없었다.
로버트가 카디프를 떠날 즈음 마리벨을 태운 마차는 런던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사랑하는 로버트!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기다려요, 로버트! 마리벨이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마차는 이미 템스 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런던의 안갯속을 달리고 있었다.
마리벨은 커튼을 걷고 템스 강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안개 때문에 강 건너 람베드 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밝은 날이라면 멀리 랜버트 저택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잠시 후 람베드 다리를 건너 십여 분만 더 달리면 랜버트 저택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데 마차는 람베드 다리를 그냥 지나쳐 곧바로 웨스트민스터 사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봐요! 방향이 틀리잖아요. 랜버트 저택은 되돌아가 템스 강을 건너야 하잖아요."
"알고 있어, 아가씨."
청년의 얼굴은 무섭게 변해 있었다. 마리벨은 속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역시 그랬구나. 랜버트 가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었구나!'
"내려줘요! 내려줘요!"
"소란 피우지 마! 얌전히 굴지 않으면 주먹맛을 보게 될 테니까. 너 같은 고아 계집 하나쯤은 목을 졸라 템스 강에 처넣어 버릴 수도 있어."
청년에게 목을 졸린 채 마리벨이 당도한 곳은 웨스트엔드에 있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수고했네, 짐!"
저택 현관 앞에 마중을 나온 사람을 보고 마리벨은 깜짝 놀랐다. 로버트와 함께 참석했던 파티에서 만나 낯이 익은 아서였기 때문이다. 그가 로버트의 라이벌인 안토니와도 잘 어울려 다니는 불량 청년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왔어, 마리벨!"
"돌려보내 줘요, 난 랜버트 댁으로 가겠어요."
"저런! 아직도 그 애송이를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로버트는 정신병자라고.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언제 미칠지 알 수 없는..."
"아니에요, 로버트 님은 이제 다 나았어요. 건강하고 씩씩한 청년이에요."
"이봐, 로버트는 안토니에게 작위도 재산도 다 빼앗길 거야. 그러니까 거지나 마찬가지야."
"어림없어요. 랜버트 가문은 로버트 님이 상속받게 될 거예요. 아무도 그걸 막을 수는 없어요."
"마리벨이 로버트를 그렇게 두둔하는 건 이해할 만하지. 여태껏 신세를 져 왔으니까. 사실 로버트 덕분에 호강을 했었잖아? 그렇지만 널 호강시켜 줄 사람은 로버트뿐만은 아니라고. 나도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싫어요. 랜버트 댁으로 가겠어요. 어서 날 돌려보내 줘요!"
"그렇게는 안될 걸. 난 널 돈 주고 사 왔어.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내고. 내가 여태껏 산 여자들 중에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르고 말이야."
이쯤 되면 애원을 하거나 설득을 해봤자 헛수고라는 것이 너무도 뻔했다. 상대는 양심이나 수치심 같은 건 깡그리 던져버린 사람이었다.
아서는 마리벨을 방으로 클고 가서 짐승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로버트는 잊어버려. 이제부턴 내가 그놈을 대신해 줄게. 그런 애송이보다는 내가 백배는 더 나을 거야."
마리벨은 침대를 가운데 두고 가능한 멀리 달아났다.
"로버트 님은 당신 같은 악당이 아니에요. 그런 더러운 입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놈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너도 로버트 따윈 잊게 될 거야. 계집이란 언제나 새로운 연인을 좋아하게 되는 법이거든. 너도 어쩔 수 없을 거야. 로버트에게 하듯 내게 매달리게 될 걸!"
마리벨은 좁은 방에서 아무리 달아나려고 애써도 헛일이었다. 아서는 마리벨을 껴안고 마룻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금방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마리벨이 아서의 손등을 힘껏 깨물었기 때문이다.
"이런 앙큼한 것! 이번엔 그냥 안 둔다!"
"다시 한번 날 건드리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마리벨은 기를 쓰고 달아났다. 그러나 침대를 두 바퀴도 못 돌고 다시 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형편없군, 아서. 그까짓 계집애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다니!"
안토니였다.
"안토니! 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아!"
"하지만 자네가 그 계집앨 다치게 할까 봐 그러는 거야. 우리의 계획이 성공할 때까지는 그 계집애에게 상처를 내서는 안돼"
"하지만 내 손을 물어 피가 나는 걸!"
"참아! 자넨 너무 박력이 넘쳐서 탈이야. 힘으로 매사를 처리하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머리만 쓰려는 놈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힘과 머리를 골고루 섞어서 써야지. 자, 이제 나와 함께 머리를 쓰러 가세. 이 따위 계집앨 차자하는 건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아서는 씩씩거리며 안토니를 따라 나갔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한동안 마리벨은 그대로 침대 옆에 쓰러져 소리 없이 울었다.
앞일이 막막했다. 그대로 아서에게 짓밟힐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생길 경우 죽을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오빠 앙투안은? 언젠가 자기를 찾아올 앙투안이 자기의 죽음을 알고 미친 듯이 슬퍼하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무슨 수를 쓰든 달아나야 했다. 아더에게 짓밟히는 것도 죽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달아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2층이었다. 타고 내려갈 나뭇가지도 빗물받이 홈통도 없었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리벨은 방문을 밀어보았다. 이상하게도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자물쇠는 안에만 있고 밖에서는 잠글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살금살금 나가 복도에 들어섰다. 그러나 복도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맞았어! 내가 도망가게 내버려 둘 사람들이 아니야.'
마리벨은 힘없이 돌아섰다. 그때 옆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와 아서의 목소리였다.
마리벨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잘 들리지 않았다. 그 방 앞으로 다가가 조금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귀를 바짝 갖다 댔다.
"그러니까 내일 저녁 자네가 파티를 여는 거야. 파티엔 물론 로버트를 초대해야지."
"로버트가 참석할까?"
"물론 참석하지 않겠지.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소문이니까. 파티가 끝나면 내일 저녁 안으로 온 런던에 소문이 날 건 뻔한 일이잖아."
"좋아, 그럼 내가 파티에서 할 일은?"
"자넨 사람들에게 자네의 새로운 애인을 소개하겠다고 발표하는 거야. 그리고 마리벨을 데리고 파티장에 나타나면 돼."
"그 계집애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면 돼."
"좋은 수가 있다! 마리벨에게는 로버트가 파티에 참석했다고 하면 돼."
"맞았어. 그럴 땐 자네도 머리가 꽤 돌아가는군."
"그런 다음은?"
"모두들 수군거리겠지. 로버트가 마리벨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건 자기 애인을 빼앗긴 게 부끄러워서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말이야."
"그럴 듯 해. 그리고 소문이 런던 시내에 아침 안개가 퍼지듯 골고루 퍼진다 이 말이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마리벨이 아니라고 앙탈을 부리면?"
"소용없어. 그땐 이미 승부가 끝난 다음이야. 너희 집에서 잠을 자고 너와 함께 나타난 마리벨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어?"
마리벨이 엿들은 두 악당의 음모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두 악당은 그들의 계획이 성공이나 한 듯이 술잔을 부딪히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안토니, 로버트가 가만히 있을까?"
"가만 안 있으면 어떡할 건데? 그 일로 더 떠들수록 자기만 불리해질 텐데."
"결투를 신청할지도 모르잖아!"
"그건 더욱 바라는 바야"
"주먹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지만 말이야..."
"왜 겁나나?"
"자네도 알잖아. 로버트의 검술은 영국 최고 수준이래. 그의 가정교사였던 마들레느라던가 하는 자가 프랑스 최고의 검객이었다는 걸 자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 봐, 로버트가 결투를 신청하면 결투 방법은 자네 쪽이 결정할 권리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자넨 자네에게 유리한 걸 선택하면 되는 거야."
"권총 말인가?"
"그런 셈이지."
"정신 나갔나? 이튼 출신들은 모두가 명사수라는 걸 모르나?"
"그러니까 자넨 역시 머리가 나쁘다는 거야. 매사에 머리를 쓸 줄 알아야지!"
"머리를 쓰다니? 머리를 쓴다고 해서 곧바로 날아오는 총알이 비켜나가는 수라도 있단 말이야?"
"자넨 아직 멀었어. 암튼 자넨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뒤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해할 수 없는 걸..."
"하하... 친구, 내 말을 믿어. 여태껏 내가 계획한 일이 실패한 적이 있었나?"
"하긴 그렇긴 해..."
"걱정 말고 술이나 마저 들게. 자, 안토니 랜버트 공작을 위해서 축배 할 생각은 없나?"
"좋아! 안토니 랜버트 공작을 위해서!"
"안토니 랜버트 공작을 위해서!"
두 악당은 술잔이 깨어져라 큰소리가 나게 술잔을 부딪혔다.
그들의 흉계를 다 듣고 난 마리벨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가슴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와 한동안 침대에 엎드려 있던 마리벨은 차츰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로버트에게 닥칠 위험이 걱정이었다.
'내일 파티에 나가 주자. 그리고 저 두 사람의 흉계를 알려야 해. 그런데 로버트가 꼭 참석해야 하는데..."
결투가 벌어진다면 악당들은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른다. 확실한 건 정당한 결투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