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9

함정 2/2

by 안녕
Épisode 7.


로버트가 런던에 돌아온 것은 그날 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마리벨의 모습은 랜버트 저택엔 없었다. 아버지가 데려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로버트는 마리벨의 실종을 일단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발 벗고 찾아줄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로버트가 마리벨을 찾는데 방해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암튼 마리벨이 런던에 있기만 하면 찾을 수 있어. 아! 마리벨, 내가 구해 줄게. 그때까지 무사하기만 해 다오!'




이튿날 아침 맥코비가 편지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뭔가?"

"아서 님에게서 온 초대장입니다. 오늘 저녁 자기 집 파티에 초대한다는 겁니다. 참석하실지를 지금 알려달라는군요. 심부름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에나 처넣어 버려!"

그렇게 말했다가 로버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잠깐! 맥코비, 내가 참석한다고 일러서 돌려보내게."

맥코비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아서 같은 불량 청년의 파티에 로버트가 참석했던 일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버트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마리벨이 런던에 와 있다면 어차피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수다를 떠는 천박한 파티일수록 마리벨의 소문은 듣기가 더 수월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서의 파티는 소문대로 시끌벅적했다. 런던의 난봉꾼 귀족 청년들이 모두 모였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부터 취해서 허우적거리며 소녀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태를 부리는 자도 있었다.

아무리 마리벨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로버트는 파티에 참석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몇 사람이 카드놀이를 하자거나 술을 마시자는 것을 거절하고 혼자 쓸쓸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파티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저런 얼굴이 실연한 사람의 얼굴인 걸?"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순정파야, 로버트란 친구."

그들 중에는 로버트에게 들으라는 듯 빈정대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있자니 더욱 괴로웠다.

"로버트!"

지옥에서 만난 구세주도 그렇게 반가울 수 있겠는가! 앞에 서 있는 소년은 이튼 예비학교의 동급생 호지어였다.

"웬일이야, 호지어. 자네가 이런 델 다 나타나고?"

"자네야 말로 웬일인가, 로버트!"

로버트는 호지어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튼의 동급생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친구인 호지어가 있다면 파티는 그런대로 견딜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실은 자네가 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듣고 온 걸세"

"누가 그러던가?"

"아서의 하인이야. 자네 집에 먼저 들렀다가 우리 집에 온 모양일세. 로버트 님도 참석한다며 떠들어 대더라며 우리 집 집사가 일러주더군. 자네 혼자라면 아무래도 쓸쓸할 거리는 생각이 들더군."

"그랬었나? 고마워, 호지어!"

비로소 로버트는 샴페인을 주문해서 호지어와 한 잔씩 나누었다.

"그런데 말이야, 로버트. 실은 자네가 걱정이 되어서 왔어."

"무슨?"

"암튼 오늘 이 자리에서 자넨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해야 하네."

"무슨 말이야?"

"확실한 얘긴 아냐. 다만 아서가 자기 애인을 우리한테 소개한다는 거야."

로버트는 한 번 피식 웃었다. 너무나도 시시한 얘기를 정색하며 말하는 호지어가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웃을 얘기만은 아냐."

"아서 띠위가 누구를 사귀든 간에 나와는 관계없어, 호지어."

"그렇다면 자넨 왜 아서의 파티에 참석하고 있나?"

"그건..."

"알고 있네. 마리벨 때문이겠지. 자네도 소문을 들은 모양이로군."

"소문이라니?"

"... 확실하진 않은 얘기라 말할 수는 없네만..., 암튼 자네가 끝까지 잘 버텨주어야 할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야, 호지어. 어서 술이나 들게."

잔을 비우고 로버트는 삼페인을 한잔씩 또 주문했다.

"괜찮겠나 로버트?"

"이건 샴페인이야. 여자들도 마시는 술이라고."

"그런 뜻이 아냐... 실은 내가 여기 온 건 전적으로 내 뜻만은 아니야. 클라렌스 전하의 명령이야."

"뭐라고? 클라렌스 전하?"

"자네 일 때문에 난 전하와 상의를 했다네."

로버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하까지 내 일에 끼어들게 하나!"

"잠깐, 내 말을 듣게. 이 파티는 무언가 음모의 냄새가 나. 그건 전하께서도 인정하셨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음모를 걱정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모두들 날 어린애 취급을 하려 드는지 말이야."

호지어는 로버트를 자리에 앉혔다.

"자, 그만 앉게. 암튼 전하께선 자기 대신 나를 보내서 자넬 돌보라고 하신 거야. 온 영국에서 가장 자넬 아끼시는 분이 바로 클라렌스 공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하께 실망을 끼쳐서는 안 되네."

로버트는 클라렌스의 처사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매우 불쾌하기도 했다.

그때 호지어가 로버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동시에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아서가 그의 새 애인과 함께 파티장에 나타난 것이다.

아서의 새 애인이라는 소녀를 본 순간, 로버트는 몸이 뻣뻣이 굳어오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마리벨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제 애인을 소개합니다! 이름은 마리벨, 프랑스 태생이죠."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로버트!"

"마리벨!"

로버트가 일어나 달려가려는 것을 호지어가 간신히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동시에 달려오려는 마리벨의 팔을 붙잡은 것은 아서였다.

"어떻게 된 건가, 로버트? 자네가 마리벨을 잃어버렸다더니 결국 애인을 빼앗긴 것이 부끄러워 지어낸 거짓말이었나?"

안토니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로버트 쪽을 쳐다보았다.

호지어의 부축을 받아 로버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마리벨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나! 정말 마리벨이잖아?"

"그렇다면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리벨이 돈에 팔려 아서의 애인이 됐다는 소문을 듣고 설마 했더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려고?"

그러나 그런 수군거림 따위는 로버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아서의 애인으로서 이 파티에 나타났다는 사실조차도 로버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마리벨이 무사히 눈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로버트, 미안해요!"

"사정은 나중에 들어도 돼! 어서 집에 돌아가자, 마리벨."

두 사람이 껴안은 것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호지어가 로버트를 잡아당기고 아서가 마리벨을 낚아채었기 때문이었다.

"조심해, 로버트. 마리벨은 내 애인이야. 여러 사람 앞에서 나와 자네가 동시에 창피를 당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아서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로버트. 전 랜버트 댁에서 부른다기에 마차를 타고 따라온 것뿐이에요."

"밍거스 남작이 마리벨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단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인 거라네"

"마리벨을 사들였다고?"

"아무렴. 내 하인이 멀리 카디프까지 가서 말일세."

비로소 로버트는 그간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버트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서를 쏘아보았다.

"너로구나! 엘렌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우리 집 집사 맥코비를 협박해서 마리벨의 거처를 알아낸 자가!"

대꾸는 없었지만 싱글거리는 아서의 얼굴이 로버트의 말을 시인하고 있었다.

"... 나보다 한 발 앞서 카디프에 가서 밍거스 남작에게서 마리벨을 훔쳐간 놈이 바로 아서 네놈이었구나! 그리고 마리벨을 네 애인인양 떠들어 놓고 내가 마리벨을 데려가겠다고 나서면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남의 애인을 빼앗아간다고 날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속셈이지?"

"로버트, 사실을 왜곡하지 마. 난 마리벨을 샀어. 훔친 게 아니란 말이야."

"비법하다, 아서. 그러나 너 따윈 아무래도 좋아. 누가 뭐래도 난 마리벨을 데려갈 거야. 자, 돌아가자. 마리벨!"

이번에는 이서도 마리벨을 잡지 않았다. 그 대신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말하자면 로버트가 마리벨을 되사가겠다는 뜻인 거지? 그래도 좋겠지. 난 신사니까 양보할 수는 있어. 단 내가 지불한 돈의 두 배는 받아야겠어. 이게 내가 자네에게 베푸는 선심이야. 그렇잖은가, 친구들?"

"마리벨은 물건이 아니야!"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자, 어쩔 텐가? 마리벨을 내게서 사 갈 텐가? 아니면 강탈해 갈 텐가?"

"아서! 넌 그러고도 신사라고 할 수 있나?"

로버트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돈은 두배든 세배든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자기도 마리벨을 물건 사듯 산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아서의 말대로 마리벨을 그냥 빼앗아 가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서가 자기의 애인이라고 공표한 여자를 빼앗아 간다면 로버트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로버트, 그냥 돌아가세. 이건 이 자들의 함정이야."

"그래요, 로버트. 제발 부탁이에요!"

호지어와 마리벨은 이 곤란한 입장에서 로버트를 빼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로버트가 이런 경우에 선택할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엔 없었다.

"아서! 자넨 칼을 좋아하나? 아니면 총인가?"

"아무래도 난 총이 좋네."

"그래? 그럼 총으로 하자. 시간과 장소는?"

그제야 여태껏 능글맞던 아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무슨 얘기야, 로버트! 난..."

"무슨 얘기냐고? 얘긴 이제 끝났다!"

로버트의 하얀 장갑이 아서의 얼굴에 던져졌다. 결투 신청이었다.

"로버트, 자넨 이래선 안되네. 이래서는 클라렌스 공이 날 보낸 의미가 없잖나!"

그러나 로버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여자 문제로 생명을 걸었다는 비난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토록 비열한 인간과 거래를 하지 않고 최소한의 명예나마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결투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로버트! 자넨 날 오해하고 있어. 누가 결투를 하자고 했나?"

"결투 신청은 내가 했지만 사태를 그렇게 만든 건 너야."

"암튼 난 결투는 싫어..."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안토니가 나타났다.

"아서, 로버트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기 바라네."

안토니는 아서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한 번 꿈쩍했다. 염려 말라는 자신만만한 눈짓이었다.

"안토니! 자넨 양자이긴 하지만 로버트와는 형제가 아닌가? 어째서 형제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지?"

호지어가 안토니에게 따지고 들었다.

"자네 말 그대로일세. 난 양자이긴 하지만 랜버트 공작의 아들이니 난 로버트의 형이 분명해. 난 형으로서 로버트의 용기를 칭찬하고 싶네. 랜버트 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결심한 로버트 말일세."

더없이 교활한 안토니는 모든 일이 자기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즐기고 있었다.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호지어는 잠시 로버트와 아서의 결투를 상상했다. 로버트는 이튼의 동급생 중에서도 명사수에 속했다. 아서 같은 뜨내기에 비하면 승산은 로버트에게 있었다. 다만 결투가 정정당당하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좋아, 안토니. 아서가 이 결투를 받아들인다면 후견인은...?"

"내가 맡겠네"

안토니가 호지어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난 로버트의 형으로서 아우의 후견인이 되어 주겠네. 그리고 아서! 자네의 후견인은?"

그때 데니스라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아서의 후견인이 되어 주지."

모두가 사전에 짜인 각본 그대로였다.

"로버트! 이건 이 자들의 함정이야. 자넨 결투를 해선 안 되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결투 신청을 철회하게!"

호지어가 애원하듯 로버트에게 말했지만 로버트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좋아, 로버트! 자넨 이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겠네. 시간과 장소는 나중에 연락하겠네."

여태껏 죽을 상이던 아서는 안토니가 로버트의 후견인이 되자, 힘을 얻은 듯 큰소리를 쳤다.

아서의 파티는 로버트와 아서의 결투가 이루어짐으로써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한시바삐 돌아가서 자기들이 보고 들은 이 어마어마한 뉴스를 가족과 친지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그밖에도 사람들에게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뉴스가 더 생겼다. 그것은 로버트와 아서의 결투가 성립되었을 때 결투의 원인이었던 마리벨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마리벨이 없어졌다!"

파티는 마지막에 가서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아서네 하인들이 마리벨을 찾으러 비 오는 거리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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