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크로스의 결투 1/3
Épisode 8.
비가 퍼붓는 런던 거리를 헤매던 로버트가 랜버트 저택으로 돌아간 건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런던의 구석구석을, 마리벨이 있을 만한 곳을 모두 뒤졌지만 그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마리벨!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만나자마자 또 너를 잃어버렸구나. 무심한 마리벨! 내게로 와. 돌아와, 마리벨!'
마지막 기대를 걸고 랜버트 저택에 돌아왔지만 역시 마리벨은 와 있지 않았다.
'아, 마리벨!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로버트는 비와 슬픔으로 축축해진 몸을 거실 소파에 던졌다.
처음 마리벨을 만났던 도버의 백양나무 별장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겁먹은 얼굴로 아장아장 걸어 다가오던 마리벨! 오빠 앙투안의 편지를 읽어주자 즐거워하던 마리벨! 마리벨과 함께 처음 런던에 오던 날, 랜버트 공작을 찾으러 윈저 궁에 갔다가 유랑극단 패거리에게 묻어 궁 안에 함께 들어가던 마리벨!
마리벨과의 추억은 무엇 하나 생각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실 로버트로서는 마리벨을 연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로버트는 그녀를 앙투안이 나타날 때까지 돌보아 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약속을 굳게 지켰다. 그래서 끝끝내 앙투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대신 오라비 역할을 해주려 했었다.
그러나 해밀튼 부인의 파티에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차츰 그의 가슴에 마리벨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날 파티장에서 마리벨은 미인으로 소문이 난 해밀튼 부인의 딸 패트리셔보다 훨씬 아름답고 기품 있게 행동했으며 모든 사람들의 찬탄과 부러움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았었다.
근엄하신 클라렌스까지도 마리벨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날 로버트는 마리벨과 동행했다는 사실에 어깨가 우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마리벨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은 파티가 끝난 이튿날 이튼으로 돌아가서부터였다.
여느 때 같으면 이튼에서의 공부가 즐거웠을 것이다. 엄격한 규칙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선생님과 예의 바르고 정직한 친구들을 사귄다는 보람 때문에 한 번도 학교 생활에 싫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해밀튼 부인의 파티 이후, 로버트는 학교 공부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는 런던의 마리벨이 애타게 보고 싶어 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마리벨 생각으로 보내다가 수업을 끝내고 런던에 돌아왔을 때, 그토록 그리던 마리벨이 없어진 사실을 아는 순간, 로버트는 넋이 다 빠져 달아난 것 같았다.
도무지 자기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즐거워야 할 여름방학도 마리벨 없이는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마리벨을 찾아냈지만 다시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 마리벨!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네가 없다면 내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 랜버트 가의 재산도 작위도 하나같이 허접쓰레기일 뿐이야. 마리벨!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너 하나뿐이란다.'
로버트는 결심했다. 다시 마리벨을 찾는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고. 어떤 장애도 딛고 일어서서 마리벨을 아내로 맞으리라고.
밤은 점점 깊어갔고 창밖의 빗줄기도 심해졌다.
복도에서 허둥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맥코비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
"무슨 일인가?"
"클라렌스 공께서 오셨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전하께서 이 밤 중에?"
"그렇습니다, 도련님!"
맥코비가 물러가기도 전에 클라렌스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일이십니까, 전하!"
"미안하오, 밤늦게 찾아와서."
"별말씀을..."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을 용서하시오. 그러나 그대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오."
로버트는 클라렌스의 할 말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오후 아서의 파티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클라렌스의 귀에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방금 호지어가 내게 다녀갔소. 아서의 파티가 끝나는 즉시 내게 다녀가라고 명령했었지."
"다 들으셨겠군요. 부끄럽습니다, 전하. 그런데 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있소. 분명히 아서와 안토니의 수법은 비겁했소. 하지만 로버트,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그대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요."
"전하, 전 남의 동정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내 말을 계속해서 들으시오. 여자를 위해 남자가 목숨을 바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오. 하지만 그것도 여자 나름이 아니겠소?"
"여자 나름이라뇨?"
"공작 집안의 후계자가 출생도 모르는 고아 때문에 목숨을 건 결투에 뛰어들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소. 남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오!"
"실례입니다만, 클라렌스 전하!"
로버트는 벌떡 일어섰다. 마리벨을 모욕하는 사람이, 설사 그를 아껴주는 클라렌스 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말해 보게, 로버트!"
"방금 하신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무리 전하께서 국왕 폐하의 아드님일지라도 마리벨을 모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그대는 마리벨을 두둔하기 위해 나를 모욕할 셈인가?"
"황공하오나 전하, 전하께서 국왕 폐하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신 것은 전하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정하신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리벨은 자기가 잘못해서 고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하느님이 정해주신 운명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정해주신 운명으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높고 낮음이 어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로버트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지만 차분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있던 클라렌스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대는 왕자와 고아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런 셈입니다, 전하!"
"무엄하다, 로버트!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내 앞에서! 지금 그 말을 왕가에 대한 모욕죄로 다스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자택 근신을 명한다!"
"클라렌스 전하!"
"자택 근신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이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돼! 명령이다!"
클라렌스는 랜버트 저택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도록 문을 세차게 쾅 닫고 나갔다.
'아! 클라렌스 공마저! 내가 믿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게 되었구나!"
로버트는 힘없이 소파에 쓰러졌다.
당시 클라렌스가 거처하는 윈저 성까지는 런던에서 템스 강을 끼고 마차로 두 시간은 달려야 했다. 클라렌스는 왕복 네 시간의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로버트에 대한 무한한 우정은 증명하고도 남았다.
어둠이 덮인 윈저 성에는 클라렌스의 사촌 동생 마가렛 공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가렛, 네가 웬일이냐?"
"어떻게 되었어요? 로버트 님이 결투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러 가셨다더니..."
"어쩔 수 없어. 놈은 고집불통이야."
"어머나! 그럼 결국 결투를 허락하셨다는 거예요?"
"아니, 하지만 결국 결투는 이뤄지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죠?"
"로버트를 잘 알거든. 보통으로는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난 놈을 바짝 약을 올려주었단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해 준 거야."
"그래서요?"
"역시 놈은 물불을 가리지 않더군. 내 앞에서 말이야. 난 왕가에 대한 불경죄를 물어 즉석에서 한 달 동안 근신 명령을 내렸지. 어떤가, 마가렛? 이만하면 나도 꽤 모사꾼이지?"
"어쩜! 훌륭해요, 오빠. 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공주는 오빠의 품에 안겼다. 클라렌스는 품 속의 마가렛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을 보고 놀랐다.
"마가렛, 너도 로버트를 사랑하는 게 아니냐?"
"하지만 그분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 먼발치에서 로버트 님을 바라볼 뿐이에요!"
전부터 마가렛이 로버트를 대하는 태도에서 남다른 점을 느끼긴 했었다. 그러나 오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는 적잖이 놀랐다.
"로버트 놈! 행복한 녀석이야."
마가렛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로버트 님이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전 오늘 밤 잠을 자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젠 괜찮아요. 로버트 님을 차지할 수는 없어도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하거든요."
클라렌스는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로버트를 누구보다 좋아한단다. 4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야. 그때도 녀석은 오늘처럼 당당했었지. 오늘 난 로버트가 더욱 좋아졌어. 로버트가 아니면 아무도 그렇게 나에게 대들지 못했을 거야. 앞으로 내 곁에 영원히 두고 싶은 사람이야."
윈저 성 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비는 그날부터 나흘 동안 계속되었다.
눈을 떴을 때 마리벨은 낯선 방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을 이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서 이 방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마리벨은 아서의 파티에서 도망쳐 나왔다.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로버트가 목숨을 건 결투를 하게 된 것을 보고 마리벨은 더 이상 로버트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소란한 파티에서 일단 도망은 쳤지만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비 오는 런던 거리를 맨 발로 무작정 헤매고 다녔다. 아서의 하인들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을 골목에 숨어서 보았다. 로버트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도 몰래 숨어서 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마리벨은 몹시 떨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템스 강을 건너 람베드 거리의 랜버트 저택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이라도 문을 두드리면 로버트가 나와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었던 로버트!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기는 날에는 한꺼번에 열이 내리고 몸이 가뿐해질 것 같았다.
'안 돼! 마리벨! 더 이상 로버트를 괴롭혀서는 안 돼! 그건 너무나 뻔뻔스러운 짓이야!'
마리벨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그리고 템스 강을 건너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이스트엔드 쪽을 향해 달렸다.
런던에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산다는 이스트엔드, 거기라면 자신의 처지에 알맞은 삶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빗물이 고인 시궁창에 박혔다. 그러나 마리벨은 다시 일어나 달렸다. 자꾸만 달렸다.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그 이후의 기억은 아무리 애써도 이어지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 열린 방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마리벨은 깜짝 놀라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누구죠, 당신은?"
"크리메이느! 설마 날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크리메이느?"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불쑥 나타난 청년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를 크리메이느라고 부르지 않는가. 크리메이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오! 크리메이느!"
청년은 침대 언저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을 잘못 보고 있군요. 전 크리메이느가 아니에요!"
그러나 청년은 막무가내였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마리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크리메이느! 마지막으로 우리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축복하자!"
그러더니 청년은 황급히 창 밖을 내다봤다.
"안 되겠다, 크리메이느! 우린 완전히 포위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 크리메이느가 아니라고요!"
"이젠 마지막이다! 자, 함께 죽을 시간이다!"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 어쩌다가 이런 미친 사람의 손에 구원을 받았단 말인가!'
마리벨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자! 이렇게 된 이상 깨끗이 목숨을 끊고 저 세상에 가서 맺어지자. 사랑하는 크리메이느!"
청년은 품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 한 자루를 꺼냈다.
"이봐요! 절 잘 보세요. 전 그 여자가 아니에요. 전 마리벨이라고요."
청년은 마리벨의 호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에 꿇어앉아 코 앞에 칼날을 세우고 마치 기도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짧은 생이었지만 그대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을 난 더없는 행복으로 생각한다!"
청년은 칼날을 높이 들어 마리벨을 향해 겨누었다.
"미쳤군요, 당신! 안돼요."
갑자기 청년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나하고라면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말하던 그대, 그건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에요.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마음이 변했구나, 크리메이느! 좋다. 이제 넌 나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배반자로서 내 칼에 쓰러지리라. 자, 이것이 배반자의 최후다. 에잇!"
"악!"
청년의 칼끝이 마리벨의 가슴을 향해 곧바로 날아와 꽂혔고 마리벨은 순간적으로 로버트와 앙투안을 생각하며 덧없이 칼에 찔렸다.
마리벨은 자기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 피를 보았다. 아, 로버트! 앙투안! 뜻하지 않게 미친 사람을 만나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청년은 마리벨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 다시 자기 가슴에 푹 박았다. 기침소리처럼 한두 번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고 청년은 침대 아래로 쓰러졌다.
그런데 마리벨은 자기가 죽었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칼을 맞은 곳이 아프지도 않았다.
'아, 죽음이란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잘했다! 멋져!"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환성을 질렀다. 마리벨은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바닥에 쓰러졌던 청년이 일어나 싱긋 웃었다.
"어때? 내 연기가?"
"박진감이 있었어, 레안드르. 참 훌륭한 연기였어!"
어리둥절해 있는 마리벨을 사람들이 빙 둘러쌌다.
"이제 비로소 깼군요, 아가씨!"
"놀라게 해서 미안해. 우린 잠시 연극을 한 것뿐이야."
"연극이라고요?"
마리벨이 소리쳤다. 죽은 자기의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가 되어 나온 것처럼 새삼스럽게 들렸다.
"그래, 아가씨. 자, 봐! 이건 연극용 단검이라고. 찌르는 순간 칼날이 칼자루 속으로 쏙 들어가고 동시에 빨간 물감이 쏟아져 나온다고."
그제야 마리벨은 사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배우?"
"아직 배우라고 할 것까진 없지. 그냥 연극배우 지망생이라고 해두지. 여긴 배우 지망생들이 함께 모여 사는 싸구려 모텔이야."
"아가씨가 사흘 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 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레안드르가 발견하고 데려다 눕혔어. 사흘 밤을 꼬박 앓더군."
"이젠 다 나았나 보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날 연습용으로 이용했군요. 너무 했어요, 여러분!"
가난한 배우들의 친절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마리벨은 짐짓 눈을 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대신 아가씨를 살려주었으니까, 피장파장이지 뭐. 그렇지 않아, 여러분?"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를 크게 질러대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아가씨, 집은 어디지? 우리가 바래다 줄 수도 있어."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여긴 런던의 이스트엔드, 가난뱅이 중의 가난뱅이가 사는 동네 라오."
"아가씬 옷차림도 귀족 냄새가 나는데 웨스트엔드쯤 살고 있는 귀족이겠지?"
"무슨 사연이 있는 아가씨인 거야, 집은 어디지?"
"집... 집이라고요?... 집은 없어요. 일하던 집에서 쫓겨난 하녀예요. 여러분이 쫓아내면 당장 갈 곳이 없답니다."
"하녀라고? 차림새도 태도도 맵시도 하녀의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귀족 집의 하녀였거든요."
떠들며 웃어대던 사람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리벨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마리벨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한꺼번에 침울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갑자기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여긴 술집 이층이야."
"이런 곳이라야 여관비가 싸거든."
다시 침묵을 깨고 배우 지망생들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가씨를 업어 온 저 레안드르란 친구는 프랑스로 돌아갈 배 삯을 벌기 위해 이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어. 연극을 배우러 런던에 왔다가 고생만 하고 돌아가게 되는 거지."
마리벨은 레안드르라는 청년을 유심히 보았다. 처음 보는 순간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무척 진지하고 훌륭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프랑스가 고향인가요?"
"그렇소."
"저도 프랑스에서 왔어요."
"그래요? 이거 반갑구먼."
레인드르는 진실로 마리벨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본래가 무뚝뚝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레안드르 씨, 나도 프랑스에 가고 싶어요. 데려가 줘요."
레안드르는 그 말을 듣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들어줄 수가 없어. 나도 배 삯을 벌어야 할 처지니까 말이야."
"배 삯은 내 힘으로 일을 해서 벌겠어요."
"그렇다면 굳이 나더러 데려가 달랄 필요는 없어. 배 삯만 있으면 누구든지 도버 항에서 깔레 항으로 떠나는 배를 탈 수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 제게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 달라는 거예요. 일을 해야 배 삯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레안드르는 마리벨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아래층 가게에 일자리가 하나 비어있긴 한데, 잠깐 내려가서 알아보고 오지."
잠시 후 레안드르가 다시 올라왔다.
"됐어, 프랑스 아가씨. 내일 오후부터 일을 해도 좋대."
그렇게 해서 마리벨은 그날 즉시 이스트엔드의 노동자 가게에 취직이 되었다.
이스트엔드에서의 마리벨은 출발부터 무척 운이 좋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