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

이제 그만 이혼하시면 안 돼요?

by 안녕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 핑계를 대셨다.

"너희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
"너희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이혼 못 한다."
"너희가 결혼할 때까지는 이혼 안 할 거다."

그래서 난 비혼을 선언해 버렸다. 때마침 오빠도 비혼을 선언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동생 핑계를 대셨다. 어느 날 동생도 독신을 선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이혼하지 않으셨다.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부모님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니도 같이 싸웠었지만 그럴수록 아버지의 폭력은 걷잡을 수 없도록 커져만 갔고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래야 빨리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집은 공포의 장소가 되었고 집에 있는 동안은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부모님의 싸움을 보더라도 말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난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냥 못 본 척해야 했다. 그때마다 오빠와 동생은 집에 없었고 혼자서 공포를 견뎌야 했지만 그 순간에는 숨을 용기조차 없었다.

지금도 난 해맑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친구를 보면 마냥 부러웠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 두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너희 부모님은 안 싸우시니?"

"왜 안 싸워? 맨날 싸우시지. 어제도 우리 아빠는 엄마한테 혼났는 걸."

그 친구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살았고 심지어 생리대 심부름까지 시킨다고 했다. 난 어머니에게조차 생리대란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는데 아버지에게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아버지를 가진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너의 아버지가 부럽다며 나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오며 가며 만난 나의 어머니께 대신 항의를 하고는 자랑스러워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난 어머니께 더 혼났다.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왜? 너희 어머니, 내 말 잘 들어주시던데!"

해맑은 얼굴로 도저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친구에게 더 이상 나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처럼,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르고 자랐으면 좋겠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나 많은 걸 겪고 자라면서 두려움을 먼저 알았던 것 같다. 외국에 나가도 밝고 예쁜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언제나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예쁠수록 사랑받을 확률이 높았고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늘 들어왔던 말이 있었다. 대학 등록금까지는 지원해 주겠지만 졸업하면 각자 벌어서 결혼하라는 것이 부모님의 뜻이었다. 결혼자금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내가 살 집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나는, 결혼할 돈으로 차라리 혼자 살겠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결혼해서 부부 사이가 안 좋아져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내 편을 들어줄 친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아파트 정도는 있어야 결혼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니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자 비혼을 선언했다. 오빠와 나는 각각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혼자 사는 것이 더 좋았지만,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동생은 혼자 사는 게 힘들다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아들과 함께 살게 된 부모님은 동생 앞에서도 싸우셨고 그제야 동생은 내가 받았던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느끼게 되었다. 임용 시험을 준비하던 동생은 수입이 없었다. 성실하셨던 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직장 없이 지내는 걸 못 보셨고 자연스레 동생에 대한 잔소리가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을 때 다행히도 동생은 깨어났지만 동생은 부모님이 아닌 나의 병간호를 원했다. 나는 휴가를 내고 동생 곁을 지켰다. 그리고 동생은 회복되자 비혼을 선언해 버렸다.

동생이 임용시험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로 취업하자 어머니는 동생에게 차를 사주셨다. 보험료와 기름값을 지원해 주시더니,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동생이 생활비를 안 낸다고 하소연을 하셨다. 그것도 잠시 동생이라도 결혼을 시키고 싶었던 부모님은 열심히 동생을 설득했고 동생은 다시 결혼을 생각해 보기로 했단다. 주변 사람들이 동생이 타고 다니는 차가 작아서 여자들이 싫어하는 거라고 하자, 어머니는 동생의 소형차를 중형차로 바꾸어 주셨다.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오빠도 집이 우선이었고, 나조차도 차량 유지비가 부담이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동생은 몇 년 후, 부모님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그런 동생에게 신혼집으로 30평대 아파트를 사주셨다.

시실 난, 우리 집이 가난한 줄 알았다. 그런데 커서 보니 여기저기 땅을 많이도 사두셨더랬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차피 두 아들에게 줄 게 뻔해서 딸이던 나는 애초에 욕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혹시, 딸에게도 물려줄 의향이 있으시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가장 작았던 제주도 땅을 달라고 했다. 언젠간 제주도에 돌아가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생활비가 없다고 전화로 다시 돈! 돈! 돈! 하시더니 가장 먼저 그 땅을 팔아버리셨다. 그래서 생활비로 쓰신 줄 알았는데 그 돈으로 동생의 차를 중형차로 바꿔 주신 거였다. 일 년이 채 안되어 동생이 결혼하게 되자 다른 땅도 팔아서 동생 신혼집을 마련해 주셨다.

다행히도 동생은 해맑은 아이를 신부로 맞았다. 밝은 성격의 며느리를 맞이해서 정말 좋아하시던 부모님. 하지만 해맑은 얼굴로 시부모님께,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며느리를 아버지가 은근히 불편해하셨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어머니에게 시키면, 아버님이 하시라고 대놓고 말하는 며느리에게 아버지는 화가 나셨겠지만 아직은 잘 참고 계셨다. 지켜보고 있자니 조금은 아슬했지만 한편으론 통쾌했었다.

한 번은 동생 집에 갔을 때, 처가 식구들이 놀러 왔었다. 그 가족들 속에 있는 동생의 얼굴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행복한 표정의 동생은,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가족의 한 구성원 같았다. 처가 식구들 속에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라도 행복해서 정말 다행이야.'

내 집이 생기고 제일 먼저 어머니께 이혼하시라고 했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면서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서울에 와서 나와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만히 계셨다. 사람들 앞에서는 어머니가 센 척 큰 소리를 치시고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고 계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공처가인 줄 안다. 하지만 창피를 당하셨다고 생각한,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집에 오면 반드시 어머니께 보복을 하셨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여전히 모른다.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라도 큰소리 한번 쳐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며느리 핑계로 이혼을 안 하실까 봐 동생네 앞에서 부모님 얘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물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자리였다. 처음엔 며느리 앞에서 부모의 민낯을 드러내자 어머니가 무척 당황하셨지만 며느리라도 의지하게 해 드리려고 털어놓았더니 그 후부터는 며느리에게 하소연을 했고 그때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적당히 혼을 냈다. 며느리도 다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이혼하시라고 했다. 이혼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제발 그렇게 참고 사시지 마라, 우릴 위해 제발 이혼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갑자기 아버지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반찬투정은 안 하시지 않니?"

김에 소금을 뿌렸다고 밥상을 엎은 건 반찬 투정이 아니었나 보다. 몸에 안 좋은 고기반찬을 올렸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밥상을 엎은 건 기억도 못하셨다. 자신의 건강을 끔찍이도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그 기준이 수시로 바뀌셨고 어떤 날은 고기가 없다고 화를 내셨고, 어떤 날은 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와서 화를 내셨다.

"무슨 소리야?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너무 기가 막혔다. 그럼 앞으로는 우리들 핑계 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을 못 가서 아버지의 만행에 대해서 다시 하소연을 하셨다.

"아버지 같은 사람 없다며?"

"얘가 미쳤나? 내가 언제? 얘가 헛소리를 다 하네."

"아, 그래? 그럼 이혼하면 되겠네?"

그럼 또다시 입을 꾹 다무신다. 어머니에게도 이제는 둘러댈 변명이 없으셨나 보다. 혹시 생활비 때문에 그러나 싶어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도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데 지장 없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드렸다. 혹시라도 빈 손으로 쫓겨난다고 해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설득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럼 이제라도 하고 싶은 것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시라고 했지만 아꼈다가 우리에게 줄 거란다.

"난, 그 돈 필요 없다고!"

이혼이 싫으면 따로 사시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집까지 지어서 여전히 함께 살고 계신다.

"이젠 더 이상 이혼하라고 안 할게. 하지만 지금부터는 엄마가 선택한 인생이니 그 삶에 대해서는 엄마가 책임지셔야 해요."

낡은 집에 사시는 게 보기 힘들어서 이사를 하시라 했지만 그 동네를 떠나기 싫었던 어머니는 망설이셨다. 그러다 건축에 자신 있다던 아버지는 기어이 일을 벌이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가 선택해서 계약했던 건설사와 초반부터 마찰을 빚어서 공사는 무기한 중단되었고, 그 손해는 건물주인 부모님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그러자 집을 완성하기는 해야 하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앞세우셨고 어머니는 졸지에 모든 일을 떠맡아 혼자서 진행하시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가정주부가 건설사와 작업 인부 등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집을 지으면 십 년이 늙는다고 했지만 일을 벌이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고생하셨다. 집을 짓는 내내 아버지는 뭐라도 마음에 안 들면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하시곤 했다. 집을 짓는 기간 동안 부모님은 동생네에 거주하셨는데 어느 날은 임신한 며느리에게도 일을 시키셨단다. 아버지는 언제나 본인이 우선이었다.

간호장교의 꿈이 무산되었을 때, 나는 산업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은 돈이 많이 드는 미대는 안 된다고 반대하셨다. 그래서 난 집에서 취미로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물감을 살 수 없었던 나는 유화 대신 연필로 그릴 수 있는 그래픽 디자인에 빠져있었다. 그때는 부모님이 알로에 농원을 운영하고 계셨을 때였다. 9미터짜리 대형 간판이 필요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타이포그래피를 잘했던 걸 기억하시고는 9미터짜리 거대한 철판을 갖다 주시며 며칠 내로 간판을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하셨다. 더운 8월이었지만 철판 사이즈 때문에 마당에 펼쳐놓고 엎드려서 작업을 해야 했다. 고3 여름방학 때라 보충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틈틈이 작업해야 해서 며칠이 걸렸던 것 같다. 30cm 플라스틱 자가 전부였던 나는 내 몸만 한 거대한 글자 하나에도 고심을 해야 했다. 초안이 끝나고 글자에 페인트를 칠해야 했는데 페인트가 번지지 않도록 글자 테두리에 테이프로 고정해야 했지만 완전히 접착되지 않았는지 페인트가 번지자 아버지는 분노하셨고 그날도 난, 엄청난 공포 속에서 야단을 맞아야 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서도 고맙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집을 짓는 도중에 조카의 돌잔치가 있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는 부모님과 함께 동생네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작은방에서 주무시고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고 계셔서 나도 커다란 소파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어머니를 깨워서 밥을 차려달라고 하시던 아버지는 조용히 식사를 하시고 계셨는데 같이 밥을 먹자고 할까 봐 일부러 자는 척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식사하시는데 소파에 누워있다고 야단맞을까 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또 뭐가 기분 나쁘셨는지 어머니에게 나직이 욕을 하고 계셨다. 욕설은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공포였고 그 공포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던 나는 너무 놀라 잠이 깨버렸다.

'여기에서도 이러고 사셨구나!'

아버지의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욕설 때문에 나는 지금껏 욕을 내뱉어 본 적이 없다. 내가 마냥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단어를 쓰는 사람에게 하지 말라 요구하면 너한테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며 핀잔을 주곤 했다. 하지만 화를 낼 수 있는 다른 단어도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이 이해가 되지도 않았지만 그 말을 들으면 마치 아버지가 옆에 있는 기분이 들어 온몸이 떨렸다. 나중에라도 나에게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욕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연락을 끊었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은 최소한 내 앞에서만은 욕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집이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며느리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으셨는지 아버지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고 계셨고 식사를 하시는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제발 그만하세요! 어머니가 무슨 잘못을 했어요?"

믿는 구석이 있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동시에 겁을 먹은 나는 울음이 터져버렸다. 잠자던 동생이 방에서 달려 나왔다.

"무슨 일 있어, 누나?"

"아버지가 아직도 어머니에게 욕을 하고 있잖아."

"에잇 ××, 내가 무슨 욕을 했다고! ×××!"

난 아버지의 그 욕설을 듣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주 잠깐 생겼던 용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도 욕하고 있네. 당신은 욕이 일상이라 이젠 구분도 안 되죠?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봐."

어머니의 말씀에 한순간 말이 없어진 아버지는 그럼에도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셨다.

"넌 당장 올라가!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오래된 기와집을 허물고 어머니가 뛰어다닌 덕분에 1년 만에 가까스로 완공한 3층짜리 집에는 아직 가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협박에, 집에 못 간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하지만 자식이 먼저 아버지께 사과드려야 한다는 어머니의 전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에 오기 전에도 나를 죽이겠다고 아버지가 달려든 적이 있었다. 무슨 공식을 물어보셨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공식이었다. 공대를 졸업한 오빠와 수학 교육과를 졸업한 동생, 집에는 이과생이 두 명이나 있었지만 만만했던 문과생인 나에게 굳이 물어보셨다. 그러곤 내가 모른다고 답하자 아버지는 자신을 무시해서, 일부러 안 가르쳐 준다며 자존심 상해하셨다. 영문도 모른 체 일방적으로 당한 일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나에게 사과를 강요하셨다.

"엄마를 위해서 할게. 하지만 내가 잘못해서 하는 건 아냐. 그리고 이게 아버지에게 하는 마지막 사과야. 다시는 이런 거 시키지 마요."

어머니가 더 힘들어질까 봐, 결국 난 아버지에게 잘못을 빌었지만 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수시로 꺼내면서 못된 딸이라고 두고두고 욕하셨다.

하지만 그 뒤에도 어머니의 부탁으로 거짓 사과를 한 적이 또 있었다. 아버지가 미군부대에 납품을 하는 외국계 회사에서 운전을 하셨는데 어느 날 뒤에서 달려오던 덤프트럭에 추돌당하는 사고를 당하자 회사에서는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는 회사라며 나 몰라라 했고, 보상하겠다던 가해 차량은 시간이 지나자 트럭 조합원과 얘기하라며 돌변해 버렸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 심지어 입원해 계시는 동안 일을 못하게 되니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했고 화가 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대신 수습하라고 하셨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관련해서 어머니와 동생이 뛰어다녔지만 일반 사람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 가면 저리 가라, 저기 가면 여기 가라고 해서 헤매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고향으로 가서 해결해 드렸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아버지는, 해결되었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좋아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단번에 해결한 '그까짓 일'을 어머니와 동생이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거였냐며 비난하셨다. 옆에 있는 나에게도 전해질만큼,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욕을 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또 이성을 잃었고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하세요! 며칠 동안 두 사람이 뛰어다니며 고생한 건 안 보이세요? 아버지가 회사에 전화해서 정식으로 항의하면 쉬웠을 일을, 아버지가 하기 싫어서 어머니에게 떠넘긴 거잖아요. 고맙다는 말은 하지 못할 망정 이게 무슨 막말이세요?"

전화기 너머로 나에게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래고래 악을 쓰던 아버지는 전화를 끊으셨다. 솔직히 전화기 너머의 아버지라,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셨고 나를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병원에 계시는 아버지가 설마 집으로 달려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아쉬운 말 한마디도 못하지만 가족에겐 아니었다. 그날 난, 처음으로 아버지의 주먹질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만 그때 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를 구해낼 수만 있다면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다 못한 어머니가 또 대신 맞으셨다. 그러는 와중에 동생이 집에 왔고 아버지는 동생의 설득으로 병원으로 돌아가셨다.

동생은 어머니와 내가 아버지에게 당하는 걸 그날 처음 본 셈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라며 동생은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봉구비어로 갔다. 말로만 듣던 그곳에 처음 가본 나는 마냥 신기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셋이 모여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물론 그때도 어머니는 먼저 사과하라고 요구하셨다. 난, 다시는 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냐고 반항해 보았지만 어머니의 눈물에 무너져 또다시 사과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나를 때린 적이 없다고 하신다. 공중에다 주먹을 휘둘렀지 직접적으로 때린 적은 없다고, 물건을 던졌지만 내가 맞은 적은 없다고 하셨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서 생긴 작은 상처는 별거 아닌 일이었고, 나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맞으신 건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난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이미 나는 모든 고통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어쩌면 차라리 그냥 맞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아버지의 협박 때문에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이 있기 전, 큰 수술 후에 요양차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나는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다시 떠날 때까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때는 회사도 그만두고 무직인 상태였기에 그 어떤 잔소리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갑자기 왜 이러실까 하고 더 불안해졌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겪은 상황이라 아버지가 달라졌다고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더 머물다 오고 싶었지만 기차 티켓을 미리 예매해 둔 상태라 위약금이 아까워서 계획대로 돌아오기로 했다.

나는 약속시간에는 절대 늦지 않는 편이다. 일찍 도착하게 되더라도 기다리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더구나 비행기나 기차 시간처럼 늦으면 안 되는 경우엔 더 철저했다. 저녁 시간대의 기차라 길이 막힐 수도 있어서 일찍 집을 나서려는데 마침 아버지가 오셨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드실 저녁을 차리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아버지가 식사 중이니 다 드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하다 시간이 촉박해서야 집을 나섰고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는데 몇 계단 안 되는 꼭대기가 갑자기 아득해지며 자꾸만 멀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조여왔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쏟아졌고 속이 울렁거리며 두 다리가 굳어버렸지만 기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뻣뻣해진 다리를 한 발짝씩 움직였다. 하지만 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 난, 처음으로 기차를 놓쳤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집에 있는 내내 끊임없이 불안했고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서울에 도착하면 어머니께 꼭 전화를 했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걱정할까 봐 먼저 하던 일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연락드리지 못했다. 그때는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숨기고 싶었던 나는 혼자서 수습을 하고 뒤늦게 서울로 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연락 안 했다고 꾸중을 하셨다. 그건 좀 서운했었다. 오빠와 동생은 어딜 가든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 또한 당연한 일인 듯 넘어가셨다. 이게 야단맞을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 이후엔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지만 어머니는 핑계가 있을 때마다 나를 부르셨고, 난 무조건 가야 했다. 김장을 할 때도 며느리 대신 딸을 불러서 일을 시키셨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고 있었던 난, 일단 집에 도착하면 휴식이 먼저 필요했다. 하지만 한 번은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손자 목욕시간이라 빨리 가야 한다며 나를 재촉하셨다. 진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끌려 갔고 저만치 앞서가는 어머니를 따라가느라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나의 상태를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사실 그게 더 힘들었다.

'엄마, 나 지금 못 가. 나 많이 아파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던 난, 아버지의 협박을 핑계로 집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집에서 쫓겨난 딸이다. 처음엔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힘들었지만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에서, 딸이란 이유로 거절하지 못하던 그 감옥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내가 싫어서 안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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