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

후회는 선택을 하는 순간이 아닌 과정에서 하게 된다.

by 안녕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에요!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아이였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은 뭐든지 맛있었다. 하지만 어릴 적의 상처로 인해 삼십 년 가까이 붉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폴로 베지테리언 (Pollo-Vegetarian)'으로 살게 되었다. 그 시작은 상처받고 있는 나를 지키기 위한 작은 거짓말에서부터였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마련한 집은 마루가 있는 낡은 기와집이었다. 동생을 가졌을 때 이 집을 샀는데 아버지 대신 만삭의 몸으로 이 집을 직접 수리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종종 듣곤 했었다. 나는 세 살 때부터 서울로 오기 전까지 20년 이상을 그 집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그 집은 햇살이 비치는 따뜻한 집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만들어 놓으신 간식이 기다리고 있던, 조금은 행복한 아이였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장남인 오빠가 최우선이었고 그 시절의 딸들처럼 나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집안의 기둥이었던 오빠에겐 항상 새 옷을 사주셨다. 하지만 난 오빠가 입던 낡은 옷을 물려받아 입었다. 유치원 행사 때도 남자 한복을 입었고 어쩌다 주변에서 얻어 온 여자아이 옷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인형놀이 같은 것에 흥미가 없으셨는지 내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하셨다. 남자처럼 옷을 입고 남자처럼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지만 행동은 조신하길 원하셨던, 뭐 그렇게 자랐던 것 같다.

어머니는 인형을 사주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주고 간 인형도 어느 순간엔 말도 없이 갖다 버리셨다. 항상 잠겨있던 옷장이 열린 날, 그 속에서 못난이 인형 삼총사를 보았다. 그 인형이라도 갖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제자리에 놓아두라고 하셨고 난 옷장 문이 열리는 그때만 잠깐 구경할 수 있었다. 오빠에겐 장난감이며 총이며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을 사주셨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사주지 않으셨다. 인형을 사달라고 하면 언제나 어머니는 돈이 없다고 대답하셨다. 누군가 소꿉놀이 세트를 갖다 주셨는데 집에서만 놀아야 했던 나에겐 같이 놀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어쩌다 오빠의 레슬링 상대가 되어주면 오빠는 나의 소꿉놀이 상대가 되어 주곤 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라지고 없었다.

동생에게는 내가 입던 옷을 물려줄 거라 생각했지만 동생에게도 새 옷을 사주셨다. 그때가 되어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장남도 아닌데 왜 나보다 우선일까?'

동생도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부모님은 결혼하고 3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너무 늦게 생긴 첫 아이라 귀하디 귀한 자식이었다. 오빠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주일간의 모든 기록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을 만큼 오빠에 대한 부모님의 애정은 대단했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었지만 오빠를 위해 카메라를 구입했고 오빠의 일상은 두꺼운 앨범 하나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겨버린 거다. 딸은 필요하지 않았던 그 시절, 내가 아들이었다면 동생은 낳지 않았을 거란다.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런 어머니가 미웠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가 뻔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사실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도 갖다 버릴 거라는 말에 정말 버림을 받을까 봐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되었다.

휴가 때마다 오시던 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가족 모두가 그리운 존재였고 나름 최선을 다하는 가장이셨다. 아버지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던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애교 없는 딸이라고 구박하셨다. 나는 그저 실수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도망쳐서 고아원으로 가버릴까? 새로운 부모님을 만나면 그동안의 나를 잊고 원래부터 해맑았던 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고아원 생활도 지금 내 처지와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밥만 굶지 않고, 학교만 무사히 다닐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조금은 무서웠다.

매사에 주눅 들고 눈치 보던 나였지만 그래도 한 번씩은 고집을 부려보기도 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의 휴가에 맞추어 어린이 공원으로 나들이 가던 날이었다. 사진 찍는 날이니 예쁜 옷을 입고 싶었던 나는 어머니가 어디선가 얻어온 블라우스를 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이유인지 오빠가 입던 티셔츠를 입으라고 하셨다. 그 블라우스도 그렇게 예쁜 옷은 아니었고 어두운 브라운 색상의 평범한 블라우스였지만 난 여자 옷이라는 이유로 그 옷을 입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화를 내셨고 아버지도 어머니의 편을 들어서 나를 나무라셨다. 하지만 난 그 옷을 입겠다고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고집을 꺾기 위해 피부가 터질 정도로 종아리를 때리셨다. 난 끝까지 버텼고 결국 그 블라우스를 입게 되었다. 그때는 아마도 다섯 살 어린 마음에 오기가 생겨서 떼를 썼었던 것 같다. 아직은 두려움이 없던 시절의 기억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내가 잠들었을 때 아버지는 내 종아리에 조용히 약을 발라주셨다. 따끔한 느낌에 잠이 깼지만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무자비하게 때리던 어머니와는 달리 지극히 이성적으로 매질을 하셨다. 피멍이 들고 피부가 터졌지만 그날 밤의 기억으로 마음의 상처 따위는 없었다. 미안함이 묻어있던 아버지의 손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몇 장 안 되는 나의 어린 시절 사진 중에 어린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문득문득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고학년에 올라가는 오빠에게 비싼 보르네오 책상을 사주셨다. 나에게도 책상을 사주셨지만 한눈에 보아도 오빠의 책상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책상에 딸린 조명 외에도 스탠드형 보조 조명이 있는 책상이었다. 솔직히 여느 때처럼 돈이 없어서 내 것은 일반 책상을 샀다고 하셨더라면 나는 또 그 말에 흔들려 잠자코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똑같은 책상이라고 우기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거짓말이 더 서운해서 아니라고 울었다. 울면 맞을 것임을 알았지만 차별에 대해서 항변을 했던 것 같다. 보조 조명 하나 때문에 훨씬 더 비쌌던 그 책상은 사실 나에게 필요 없었다. 집에서 나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가 몇백 원으로 무마하셨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변명할 기회를 놓쳐버린 어머니는 결국 내 책상도 오빠와 똑같은 걸로 바꾸어 주셨는데 매를 들지도 않고 의외로 쉽게 바꾸어 주셔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구점 사장님이 똑같은 걸로 사주지 않으면 둘째가 서운해할 거라고 얘길 하셨고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바꾸어 주기로 얘기가 이미 되어있었단다.

어머니의 매가 무서웠던 나에게 떼를 쓴다는 건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떼를 쓴 적이 몇 번 없었지만 떼를 쓰던 그 꼬마가 그대로 자랐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꿈을 이루었을까?

요즘 육아를 다루는 방송을 보면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애태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아이가 좋아하는 걸로만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그게 그렇게 안타까웠다. 그럴수록 아이는 편식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스마트폰 중독의 시작도 어찌 보면 부모의 탓이었다. 육아에 지친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에게 폰을 쥐어주며 영상을 보여주곤 한다. 아이가 영상을 보는 잠시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겠지만 그사이 아이는 서서히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는 뒤늦게 그런 아이를 나무라며 폰을 뺏곤 했다. 어쩜 아이들의 습관은 부모의 뜻에 따라 바뀌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우리를 매사에 차별하셨고 그건 식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밥상 위에 올라온 고기반찬에 내 젓가락이 닿을라치면 이내 어머니의 손이 먼저 다가와 내 젓가락을 쳐내셨다. 아무거나 잘 먹었던 나는 키가 컸고 오빠보다 덩치가 좋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만 먹으라는 얘기를 자주 하셨고 입이 짧았던 오빠에게는 뭐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는 오빠가 좋아하는 걸로 챙겨주셨지만 오빠는 먹기 싫다고 거부했다. 오빠의 편식 때문이었음에도 오빠만 챙기던 어머니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서러웠다. 그래서 난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불고기, 제육볶음 등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들과 조용히 작별을 했다. 내가 더 이상 고기반찬에 손을 대지 않자 어머니는 오히려 안도하는 듯 보였다. 여러 차례 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었지만 잘 참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머니는 오빠가 남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셨다. 하지만 난 먹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앞으로도 계속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제야 어머니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셨는지 왜 그러냐고 다그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차별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상황을 넘기고 싶어서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눈치 보며 먹는 고기가 제대로 소화될 리는 없었으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렇게 둘러대었다. 그 후엔 어머니는 고기가 남아도 당연한 듯 나에게 권하지 않았다.

내가 고기를 포기하면 적어도 오빠가 싫어하는 생선은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작전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선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생선에 다가가는 내 젓가락을 너무도 티 나게 쳐내셨다. 생선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꼬리지느러미를 잡고 잘라갔다. 살이 잔뜩 붙은 채로 말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 후 나는 꽤 오랫동안 육류를 먹지 않았다. 나의 작은 반항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질 거라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나의 거짓말처럼 진짜로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무 오래도록 먹지 않아서인지 육류 거부증이 생겨버린 거였다. 음식 속에 고기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먹으면 복통과 설사로 이어졌고 고생을 하다 보니 그 후로는 정말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고3 때 어머니는 군대에 간 오빠 대신 나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이제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하지만 고기를 보면 마음이 아파서 끝까지 거부했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에서도 고기는 골라내고 먹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카레라이스에 일부러 고기를 잘게 다져서 넣었다. 그럼에도 난 고기 조각을 골라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아버지가 계실 때였지만 먹을 수 없게 된 고기를 무서운 아버지가 계시다고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편식을 한다고 혼내셨다. 그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그 순간 울컥했다. 차별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싶어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너무 놀란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유난히 고기가 많이 들어있던 그 카레라이스를 공포 속에서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체해서 대부분 토했지만 그럼에도 그날 밤에는 밤새도록 토하고 설사하며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야 어머니는 고기 강요를 그만두셨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회식 자리에서도 난 된장찌개와 밥만 먹어야 했고 운이 좋으면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아마 서른다섯쯤 되었을까? 다이어트를 하면서 설사를 하려고 용기를 내어 고기를 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육식이 열 번 먹으면 열 번 모두 하던 설사가 어느 순간 아홉 번으로 줄었고 계속 반복되자 여덟 번, 일곱 번, 여섯 번... 몇 년이 지나자 나중에는 어쩌다 한 두 번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음식으로 기억되었는지 아님 이제는 먹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독립하고는 끼니 걱정을 하던 때가 많아서 내 의지로 고기를 사 먹지는 못했다.

육식을 하게 되자 갑자기 제사상에 올랐던 엄마의 산적이 생각났다.

"엄마, 나 어릴 때 먹었던 그 산적이 먹고 싶어."

어머니는 처음 있는 나의 요구에 지방이 없는 육산적을 만들어 주셨다. 고기보다, 나만을 위해 만들어 주신 음식이라 더 좋았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어머니에게 사랑 한번 받아 보고 싶었다. 독립하고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어머니의 생신날에 꽃과 케이크를 배달시켜 드린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내 생일날에 가족에게 초가 꽂힌 케이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어서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했었나 싶기도 했다. 그 후 어머니는 내 생일날에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며 용돈을 보내주기 시작하셨지만 두 아들에게도 똑같이 용돈을 보내주셨다. 그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항상 미역국을 끓여주셨지만 그래서 난 그 미역국이 너무 싫었다.

한 번은 내 생일 무렵에 볼일이 있다며 어머니가 서울에 오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웃백에 갔지만 정말 밥만 먹고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날도 케이크가 아닌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내가 조개를 좋아했다며 만 원짜리 조개 한 마리를 넣고 끓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비싼 고기 대신 싼 조개를 넣고 끓였던 것뿐인데 내가 조개 넣고 끓인 미역국을 좋아했다며 굳이 비싼 조개를 넣고 끓이셨다. 가성비를 따지던 난 차라리 스테이크 한 덩이 사다가 구워 먹는 편이 나았다. 어머니는 나를 모르셨고 나도 어머니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오빠가 직장 때문에 서울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와 오빠는 당연한 듯 체부동의 내 원룸으로 왔고 어머니는 혼자서 부지런히 집을 보러 다니셨다. 내가 독립할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지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혼자서 집을 보러 다니던 어머니는 많은 난관에 부딪혔고 세상 물정 모르는 오빠와 다투기도 했다. 힘들다고 울기도 하셨지만 굳이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항상 돈이 없다던 어머니는 독립하는 오빠에게 신축 빌라를 얻어주셨다. 그 뒤에도 오빠는 전세보증금이 부족할 때마다 어머니에게 종종 돈을 빌리기도 했다. 나도 그런 상황에서 전화를 한 적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집에 무슨 돈이 있냐며 화를 내셨다. 오빠의 부탁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지만 나의 부탁은 들어주신 적이 거의 없었다. 딸도 이제야 자식 취급을 해주나 싶었지만 결정적일 때는 역시 아들뿐이었다. 뭐 본인의 재산으로 누구에게 주든 그건 상관없었다. 오빠에게는 가능한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많았지만 그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오빠에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엉덩이와 다리에 커다란 화상 흉터가 있었는데 자라면서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짐작하건대 어릴 때 엄청난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몇 년 전, 큰 이모에게서 그날의 사고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갑자기 생겨버린 나를 낳고 집에서 산후조리할 때였단다. 이사 오기 전의 집은 주방 아궁이 위로 쪽문이 있어서 방으로 연결된 구조였단다. 아버지 없이 홀로 산후조리를 해야 해서 큰 이모가 와계셨는데 열린 쪽문으로 오빠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그만, 물을 끓이고 있던 큰 솥에 떨어지고 말았단다. 거동할 수 없었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큰 이모가 오빠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셨고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오빠의 다리와 엉덩이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게 되었다. 성장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치료가 되었지만 자라면서 흉터 제거 수술로 고민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었다. 그렇게 원치 않는 딸로 인해 아들에게 생긴 사고는 아마도 어머니의 기억 속에 평생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떼쓰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하곤 했다. 나는, 태어나 보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 3년 만에 태어난 귀하디 귀한 첫째 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아부어도 모자란 상황에 얼떨결에 생겨버린 나로 인해 오빠에게 사고가 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머니는 무의식 중에 나를 미워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머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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