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
나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순간의 관심이 좋아서 모른 척했던 적도 있었다. 집착으로 얼룩진 그것조차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나를 유괴하려고 했다면 나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자포자기 상태의 아이였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했던 외로운 아이였다.
내가 처음 하게 된 사회생활은 유치원이었다. 집 옆에 오래된 성당이 있었는데 오빠와 나는 종교가 없었지만 성당 부속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과 수녀님들은 너무도 친절했다. 따뜻한 말을 해주시는 그분들이 마냥 좋았다. 고작 일 년이지만 그분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졸업한 후에도 방과 후, 유치원에 들러서 간식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간식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선생님, 수녀님들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나는 유치원에 다닐 때는 수많은 원생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졸업 후에는 매일 같이 찾아가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분들도 그런 나를 귀엽게 봐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에서 유괴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치원은 문을 닫았고 나의 낙은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꾸었다. 난 부지런히 우리 집을 찾아 걷고 또 걸었지만 아무리 걸어도 집은 나오지 않았다. 집을 찾아가지 못할까 봐 겁이 났던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의 꿈이 두려웠고 아무리 무서운 집이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집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전쟁이 났는지 총을 든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꿈을 꾸었다. 위협적으로 집을 뒤지는 그들을 피해 몰래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지만 집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기 위해 간신히 도망쳐 나온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여러 꿈을 꾸면서 외딴곳에서 길을 잃는 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조차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찾아갈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어릴 적 살던 그 집이 꿈에 나오면 어김없이 가위에 눌리곤 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지만 꿈에서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사랑받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내 편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큰일을 겪더라도 괜찮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 줄,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 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어머니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듯 나도 어머니에게 그런 존재는 되지 못했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에서 나를 지켜주셨지만 커서는 내가 어머니를 위해 용기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난 여전히 공포 속에 갇힌 어린 꼬마가 되어버리지만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는 아버지를 보면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 오랫동안 폭력에 고통받는 어머니를 보고도 못 본체 해야 했던 어린 꼬마의 죄책감에서 나온 용기였다. 하지만 딸의 뒤늦은 반항에 아버지는 더 큰 분노에 휩싸이셨다.
"감히 네가... 감히 내게...!"
난 정치 따위 상관없었다. 나를 힘들 게 하는 건 내 주변 사람들이지, 정부 탓도 아니고 나라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 탓은 하지 못하면서 항상 정부 탓을 하셨다.
'정권이 바뀌어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게 아니잖아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모님의 정치 의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정치 전쟁이 만약 부모님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지금보다 더 한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선거 때마다 누구를 찍어라, 어느 당을 찍으라고 전화하셨다. 물론 아버지도 같았다. 내 주변에는 유독 자신이 추천하는 당에게 투표하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선거에는 관심도 없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선거 때마다 나에게 가장 먼저 전화해서 투표를 강요하는 사람이 추천하는 이는 절대 찍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추천하는 이의 라이벌에 투표를 해버리고 혼자 흡족해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황당해하던 사람들, 어느 순간부터 투표하라고 강요하던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내 의지로 투표를 한 적도 있었다. 나름의 소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는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다 당에게도 버림받았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족의 비리로 몰락하는 이가 많아서 권력을 이용할 가족이 없는 이를 찍었지만 외로운 이들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그 또한 가족처럼 믿고 의지하는 이로 인해 몰락해 버렸다.
사람의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구든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되면 누군가의 입김에 따라 똑같아지거나 아님 힘 있는 자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버림받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흐름을 지켜보기만 했던 나는, 국민의 의무를 다 하지 않는다는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버티기에도 너무 벅찬 국민이었고 누가 권력을 잡든 내가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만 달라질 뿐 매번 똑같은 정치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던 난,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에도 너무나 힘들었다.
자식들 교육에 신경 쓰던 어머니셨지만 강제로 학원을 다니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런 건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거였다. 억지로 학원에 끌려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굳이 학원에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오빠 친구들의 어머니들과 따로 모임을 가지면서 정보를 얻으셨고 그들과 은근한 경쟁을 하듯 오빠를 이런저런 학원에 보내셨다. 나중엔 동생 친구들 어머니들과도 모임을 가졌지만 내 친구들 어머니들과 모임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내 친구 어머니 중에는 친한 사람이 없어서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 친구의 오빠 중에는 오빠의 친구가 있었고 내 친구의 동생 중에는 동생의 친구가 있었다. 너무나 뻔한 거짓말을 하신 걸 보면 차별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싶다.
부모님이 싸우시는 이유는 언제나 돈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다거나 한량처럼 사시는 분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성실하셨던 분임에는 틀림없었다. 또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찾아서 먹고 마는 지독한 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간이 망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으니 아버지는 직장 아니면 병원에 계신 셈이었다. 술과 담배를 하시지 않았으니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여느 가장들처럼 심신 미약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노는 일은 없었지만 입원하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항상 돈 걱정을 하셨다. 수업 준비물이 필요해서 말씀드려도 일단 돈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셨고 책값을 빙자한 거짓말을 해도 그냥 다 들어주셨다. 난 오빠가 방치한 물건들이 학년을 올라가면 필요할까 싶어 챙겨두었다가 쓰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무엇이든 일단 보관해 두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준비물이 필요해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꼭 필요한 것만 사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나라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신 고모가 주고 간 피아노였지만 난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 항상 피아노를 치는 친구가 부러웠고 젊은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음악 학원엘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가난한 줄 알았던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오빠는 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어머니께 한번 말씀드렸으나 역시나 단칼에 거절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데리고 언덕 위의 어느 가정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간판도 없는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뚱뚱하고 무서운 아주머니가 선생님이셨다. 방과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이 그곳에 맡겨지는 것 같았다. 매번 특정 아이들과 짜장이나 짬뽕을 시켜 먹고는 이를 쑤시며 건성으로 나를 지도해 주셨다. 정말 불편했다. 악보 보는 법을 알고 있는데도 같은 것만 무한 반복을 시키셨다. 집에서 쳐도 될 것 같았는데 학원비가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어렵게 다닌 첫 학원이라 이대로 그만 두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서너 달을 참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 항상 같이 밥을 먹던 아이들의 어머니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돌아가고도 분을 삭이지 못하신 선생님이 갑자기 나에게 손찌검을 하셨다. 너무 놀라 쳐다보니 뭘 쳐다보냐며 마구 때리셨고 바닥에 넘어지자 발로 걷어찼다. 자주 있는 일인 듯 아이들은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렇게 혼자서 맞고 또 맞았다. 계속된 폭행에도 왜 맞는지도 몰랐고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했다. 그러다 지친 선생님은 혼자서 연습하라고 하고 나가버리셨지만 남은 시간을 공포에 떨며 연습을 했고 끝나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못했다. 학원비가 아까워서 이달까지는 다녀야겠다는 마음에 다음 날에도 갔다. 선생님은 어떤 사과도 없으셨고 여전히 건성으로 가르치셨다. 하지만 학부모의 항의가 없는 데다 그렇게 참는 아이가 만만했던 건지 수시로 나에게 화풀이를 하셨다.
그렇게 한 달을 채우고 다시 학원비를 가져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피아노는 배우고 싶었지만 더 이상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유를 물으셨다. 하지만 그날의 일에 대해선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냥 치기 싫다고 했지만 학원에서 연락이 왔는지 아님 어머니가 연락을 했는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다시 그곳으로 가셨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 처음 보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반기셨다. 내가 잘못해서 잘하라고 혼 좀 냈을 뿐인데 그만두려고 하냐며 웃으셨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정말 물어보고 싶었으나 나는 그저 무릎 꿇고 앉아만 있었다. 어머니는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가르치라고 하시곤 나를 두고 가버리셨다. 또 그 학원비가 아까워 한 달을 의미 없이 참고 다녔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폭력은 없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어머니가 먼저 얘기를 꺼내셨다. 싫으면 안 다녀도 되지만 앞으로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피아노는 그렇게 그걸로 끝이었다. 나도 친절하고 예쁜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고 싶었을 뿐이었다. 일반 피아노 학원과 같은 비용이었는데 어머니는 누군가에게서 학원보다 더 잘 가르치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어떠한 검증도 없이 그냥 나를 보내셨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누군가 좋다고 하면 검증도 없이 보내셨고 결과와는 상관없이 혼자 만족해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는 오빠를 미술 학원에 보내셨다. 예쁘고 친절한 선생님이 가르치는 미술 학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좋았던 오빠는 미술에 흥미가 없었고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오빠가 그만두자 어머니께 내가 대신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고민하시더니 방학 동안만 다니게 허락해 주셨다. 미술용품은 사주지 않으셔서 오빠가 쓰던 걸 그대로 물려받아서 썼다. 이미 비어있는 색이 많았지만 사달라고 하면 학원을 보내주지 않을까 봐 계속 친구들에게 빌려서 썼다.
학원에서 그린 그림을 여름 방학 숙제로 제출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내게 묻지도 않고 오빠가 그린 걸 갖고 왔다며 내 앞에다 그림을 던져버리셨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반 친구가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얘기하라고 했지만 난 끝내 말씀드리지 못했다. 성적에 반영되는 걸 알면서도 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선생님의 그런 행동에 고작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받을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집에서 받았던 차별이 너무나 익숙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별이 유난히도 심했던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래서 더 기억이 남았다. 개별 시험은 만점에 가깝게 받아도 반 등수로만 따지는 어머니에겐 항상 야단을 맞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반 친구들과는 사이가 좋아서 졸업 후에도 꾸준히 모임을 하면서 연락하고 지냈다. 그러다 선생님에게 예쁨 받았던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선생님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셨다며 자신이 일하는 식당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분이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졸업 후 7년 만에 만나는 선생님이 반가워서 선물을 사들고 찾아갔다. 식사비 정도는 우리가 계산하려고 식사를 주문했다. 식사가 끝나자 선생님은 술과 비싼 음식들을 가지고 오셨고 우린 배부르다고 사양을 했지만 계속 음식을 권하셨다. 다 먹지도 못하고 남은 음식이 쌓이고 있는데도 음식이 계속 나오자 우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에게 돈을 받으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 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는데 반장은 선생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고 끝까지 믿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선생님이 몇십만 원짜리 계산서를 내밀었다. 식사비 정도만 생각하고 회비를 걷어서 왔던, 대학생인 우리들에게 이런 거금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가 난처해하니 선생님의 인상이 굳어졌다. 돈을 내고 가라는 성화에 반장이 아버지 카드로 결제를 먼저 하고 따로 돈을 더 걷기로 했다. 이 일로 인해 선생님에게 예쁨 받았던 친구들마저 다시는 선생님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이혼도 했다는 걸로 보아 선생님에게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분인지도 모르겠다. 교생 선생님이 와도 그들이 떠나간 후에 편지를 보내어 교감을 하곤 했다. 그 당시 나에게 아주 큰 어른이라 생각했던 선생님들도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아직은 어린아이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