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난, 밥 주는 손도 물고 보는 유기견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 애증의 존재였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차별과 학대 속에서 자랐지만 학창 시절에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서 함께 견뎌야 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어머니에게 밥을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아버지는 꼭 그렇게 짜증 섞인 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떤 날은 어머니가 아버지 퇴근시간에 맞추어 미리 밥을 차려놓기도 하셨는데 그럴 때는 씻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밥을 먹으라고 하냐고 화를 내셨다. 어머니가 어떻게 하든 아버지에겐 그 모든 일이 짜증스러웠나 보다.
난 어머니가 헤어지기 싫으면 이혼으로 협박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싶었다. 어머니의 존재가 없을 때 느끼게 될 그 허무함에 대해 미리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도 지금처럼 어머니를 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이라도 최소한 존중받으면서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이혼을 거부하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화가 났다. 어머니가 불쌍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어머니가 선택한 일이니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도 나는 어머니와 성격이 맞는 편은 아니었다. 외향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집에 있는 걸 답답해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집에만 갇혀 살았던 탓에 외출이 낯설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나마 사회 활동을 하면서 나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세뇌당한 집순이'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집이 지옥 같았지만 딱히 나갈 곳이 없으니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게 가장 좋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집에 없어도 굳이 찾지 않았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머리카락 자르라는 잔소리를 잊지 않으셨다. 긴 머리카락에 대한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처럼 내 머리카락이 어깨를 내려오기만 하면 따라다니면서 병적으로 말씀하셨고 심지어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조차도 그만 좀 내버려 두라고 하실 정도였다. 다투기 싫었던 나는 어머니에게 내 머리카락을 맡기곤 했고 그렇게 고향에 갈 때마다 내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서 돌아오곤 했다.
학창 시절엔 조금만 부해 보여도 살 빼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통증을 줄이기 위해 체중을 유지하고 있으니 왜 안 먹느냐는 잔소리로 바뀌셨다. 난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해 차라리 굶는 게 더 편했다. 그래서 부모님 집에 가면 대부분 굶다가 오곤 했었다.
독립을 하고는 내가 혹시라도 밤늦게 돌아다니지는 않는지 불안해하셨다. 확인 수단이 필요했던 부모님은 나에게 가장 먼저 집전화 개설을 요구하셨다. 45만 원의 보증금이 필요했던 전화 개설을 하고 몇 달은 굶어야 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전화로 확인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는 왜 집에만 있냐고 나무라셨다.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놀기도 하라고 하셨지만 이미 집순이로 살아온 나에게 외출은 낯선 것이었다. 내 집이 생기고부터는 집이 가장 편한 곳이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집에서 가능한 일들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나마 편한 것은 해외여행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든 낯설고 어려워해서 누구에게나 익숙하지 않은 해외여행을 통해 나도 조금은 보통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머니도 여행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밥이나 차리지 어딜 가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서울에 오는 것조차 간신히 허락해 주고는 매일 전화해서 언제 오는지 묻곤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가능했다. 단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맞추어야 했다. 친구들과 같이 가는 여행에도 남편을 동행시켜야 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여행을 다니곤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 칠순 때 함께 보내 드린 유럽 여행 때는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본색을 드러내셨고 어머니에게 욕설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당하는 수모는 어머니에게 엄청난 상처가 되었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야만 하는 여행은 포기하셨다.
어머니 칠순 때는 둘이서 여행을 가자고 하셔서 어머니만 모시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손자의 출생으로 인해 연기를 해야 했고 집을 짓느라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하여 결국 2년이 지난 후에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어머니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도 양보하는 사람이 있으면 상황은 그럭저럭 잘 넘길 수 있었지만 그때는 나도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더 이상 내가 가여워해야 할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갈 수 있는 곳은 일본이나 아시아처럼 가까운 곳이었다. 그중에서 베트남 호찌민은 정말 무서운 도시였다. 수많은 오토바이의 질주에도 놀랐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던 각종 범죄 현장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곤 했다. 겁에 질려 일주일 내내 숙소였던 뉴월드 호텔에서만 지내다 돌아왔다. 그렇게 베트남은 단 한 번의 여행으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베트남의 다낭이 급부상하면서 다시 호기심이 생겼다. 어머니가 집을 짓는 동안 여행은 힘들다고 하여 나 혼자 다녀왔다. 다낭은 호찌민에 비하면 정말 조용했다. 어디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였지만 걷기에는 너무 더웠다. 그 열기 속에서 걸어 다닌다는 것은 나이 든 어머니에겐 무리일 것 같았다.
더운 나라보다는 추운 나라가 좋지 않을까 싶어 그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다녀왔다. 내 기준으론 러시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에 더 좋은 것 같았다. 걷기에도 편했고 관광객이 다니기에도 안전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에 좋았고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무엇보다 일본만큼이나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비행시간도 부담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베트남을 고집하셨다. 아마도 주변에 러시아에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가보니 좋더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가보고 싶어 하셨다.
내가 처음 베트남에 갔을 때는 6월 초였는데 덥기도 더웠지만 잦은 스콜 때문에 걸어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두 번째는 5월 말에 갔었는데 너무 더워서 차라리 스콜이라도 내리길 바랐던 것 같았다. 비는 밤에만 내렸고 한낮에는 뙤약볕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갈 때는 조금 앞당겨서 5월 중순쯤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어머니 뜻대로 비행시간만 다섯 시간이 넘는 베트남 다낭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두 번째 까미노보다 더 최악의 여행이 되었고 코로나19에 접어들기 전 마지막 여행이 되어버렸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에 어머니가 서울로 오셨다. 그 와중에 무언가를 잔뜩 싸 오셨고 참외를 한 아름 챙겨 오셨다. 일주일간 집을 비우는데 과일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냐고 하니 베트남에 가져가서 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하셨다. 나는 참외를 먹으면 설사를 했었다. 그럼에도 먹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그냥 서울에 오신 거라면 며칠 동안 천천히 맛있게 먹었을 테지만 내일 당장 한국을 떠나서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우는데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서울은 무조건 물가가 비싸다고 생각하셨다. 어머니가 약을 먹고 있었는데 고관절이 아프단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여행을 어떻게 가려고 하냐니까 상관없단다. 걸을 수 있으시단다. 나도 왠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찍 자려고 했으나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 어머니와 달리 여느 때처럼 수많은 걱정으로 세시 넘어서 간신히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들어 아침 일찍 눈이 떠졌는데 열이 심해지고 있었다. 여행 당일이라 냉장고가 비어있는데도 어머니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집을 비우는데 냉장고는 당연히 비어있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다. 난 12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커피와 참외로 끼니를 대신했다. 먹어치우기 위해서였지만 그걸로 끼니를 때우냐고 뭐라 하셔서 억지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어머니가 가져오신 훈제치킨을 먹었다.
어머니와의 논쟁으로 오늘도 목이 아프다. 왜 그렇게 우기는지 모르겠다. 불리할 땐 기억력이 떨어졌다면서 매사 자신의 기억을 맹신하신다. 차라리 대화를 포기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이 심해지니 대꾸하기가 더 힘들었다. 오후가 되자 열이 조금 떨어지는 듯하더니 약 기운에 나른해졌다. 이 여행 괜찮을까? 자꾸만 두려웠다.
목동에 살게 되면서 공항버스를 타지 않게 되었다. 공항버스를 타게 되면 배차시간도 문제였지만 길이 막힐 때마다 늦으면 어쩌나 싶어 공항 가는 내내 불안에 떨곤 했다. 즐거워야 할 출발이 긴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매번 일찍 나서다 보니 공항에는 항상 3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김포공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면서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했다.
온라인 체크인과 좌석 지정이 끝나서 천천히 출발해도 된다고 얘기했지만 준비됐는지 묻자마자 어머니는 엘리베이터 앞에 나가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번 여행은 직장생활 중에 다니던 호화 여행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매번 패키지로만 여행을 다니셨고 좋은 호텔에 투숙하셨다. 하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에 실려서 하루 종일 시달리다 한밤 중에 돌아오는 터라 좋은 호텔의 의미를 모르셨다. 호텔에서 쉬고 싶은 날이 있어도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 힘에 부치다고 하셨다.
나와 함께 가야만 가능한 자유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어머니와의 첫 번째 여행은 마카오 여행이었고 그때는 일주일간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 묵었다. 그때는 직장이 있었으니 특급 호텔 숙박도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형편은 아니었다. 아낄 수 있는 것은 아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제대로 누리고 싶었다. 배낭여행 이후 나의 여행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젠 잠만 자는 숙소에 거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기내식을 먹고 바로 자야 하는 야간 비행에선 기내식도 패스했다. 짐도 간단하여 에어 서울을 이용했다.
어머니는 공항철도가 무료였지만 갑자기 아니라고 하셨다. 공항 갈 때 무료였다고 자랑한 적도 있었는데 서울은 아니라고 우기셨다. 때마침 직원이 있어서 물어보라니까 교통카드를 찍고 그냥 들어가 버린다. 상관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말없이 공항으로 향했다.
2시간 반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셀프 티켓 출력이 안 되어 창구로 가서 발급받았는데 출발이 30분 지연되었단다. 여유가 있어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 전에 옷이랑 짐을 정리했다. 누군가의 신발이 닿는 보안 검색대 바구니에 내 짐을 올려놓고 싶지 않아서 몸에서 떼어내야만 하는 것들은 가방에 미리 넣고 여권과 스마트폰만 들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왜 그래야 하냐며 그냥 들어가 버리신다. 그러더니 역시 보안 검사하면서 벗은 겉옷과 손에 들고 있던 짐들과 한참을 씨름하고 있었다. 그제야 옷을 캐리어에 정리해서 넣으시는데 어머니의 캐리어는 이미 가득 차 있어서 옷을 넣기에도 벅차 보였다.
필요한 것은 베트남 현지에서 구입해도 되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없는 게 없고 물가 자체가 워낙 저렴해서 가서 사는 편이 나은 것도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곳곳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롯데마트가 있었고 'SPEED L' 어플을 통해 무료 배달도 가능했다. 막상 가보면 사고픈 게 많아질 테니 캐리어는 빈 상태로 가져가시라 조언해 드렸으나 어머니는 사 올 물건이 있을 리 없다고 하셨다. 집에서도 같은 옷만 입으시면서 꼭 그렇게 옷을 많이 챙겨 오셨다.
바닥에서 짐을 정리하는 어머니에게 한소리 했더니 잔소리하지 말라고 짜증을 내신다. 서로 예민할 때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었다. 짐과 한참 동안 씨름하고 있는 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혼자서 출국심사를 받았다. 그래도 걱정스러워서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출국심사를 받고 온 어머니는 나를 찾지도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어쩌나 싶어 두고 보는데 반대로 마냥 걷고 있었다. 다리도 아픈 데 갔던 그 길을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어머니를 뒤따라갔다. 걸음이 빠른 어머니는 다리가 아파도 속도는 줄지 않았다. 간신히 따라가서 붙잡으니 안내표가 저쪽으로 되어 있었다며 우기신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체 서로 침묵을 지키며 셔틀을 타고 게이트에 도착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깎아 온 참외를 먹는데 속이 안 좋았다. 그 와중에 에어 서울은 출발시간이 또 지연되었고 25분이 되어서 탑승을 시작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줄을 서지 않고 12시 넘어 마지막으로 탔다. 하지만 면세점 쇼핑을 잔뜩 한 승객이 많았는지 기내용 캐리어를 넣을 공간이 없었다. 승무원에게 도와달라 요청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짐 때문에 출발이 지연될까 봐 나만 애가 탔다. 그 와중에 출발이 또 지연되고 있었다. 뒤늦게 누군가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캐리어를 치워주어서 간신히 집어넣었다. 에어 서울은 한 시간 반이나 늦게 출발했다.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이제 신경 쓸 일이 없어진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비행 내내 끙끙대며 힘들어하셨다. 그러길래 왜 두 시간짜리 낮 비행을 마다하고 굳이 다섯 시간짜리 밤 비행을 고집하시냐고. 어머니와 함께 스페인에 가려던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유럽 가는 비행기에서 그렇게 고생하셨다더니 안 봐도 보였다. 현지시간으로 3시쯤 다낭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새벽인데도 입국심사가 길어져서 35분쯤 공항을 나섰다.
한번 다녀왔던 다낭은 이미 익숙했다. 새벽에 도착하기 때문에 공항 부근의 구시가지 호텔로 예약했다. 다낭의 호텔은 특급 호텔이어도 지어진 지 오래되었으면 시설이 별로였다. 특급 호텔보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 더 좋았지만 리모델링을 한 곳도 많았으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같은 호텔 내에서도 룸마다 컨디션이 달랐고 다낭 호텔의 가장 큰 문제는 배수시설이 좋지 않다는 거였다. 같은 호텔이어도 어느 룸에 배정받느냐에 따라 후기는 정말 달랐다.
구시가지에 예약한 호텔은 시설이 별로라 씻고 잠시 쉬다가 바로 비치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용다리로 알려진 드래곤 브리지의 불쇼와 물쇼를 보기 위해 하루 더 예약했다. 다낭의 관광 명소는 변두리에 있어서 택시를 타고 부근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울에 오신 후에야 다리가 아파서 오래 걸을 수 없다고 실토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오행산에 오를 수도 없었고 바나 힐까지 간다고 해도 그 넓은 곳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호이안까지 가서 뙤약볕에 걸어 다닐 수는 더더욱 없었다. 멀리 갈 수 없으니 대부분 다낭 바닷가에만 있기로 했다.
공항을 나와서 호텔까지 30분을 걸어야 했지만 새벽이라 의외로 시원해서 택시 기사들의 호객 행위를 뿌리치고 걸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한참을 앞서가신다. 제발 천천히 걸으시라고요. 다리가 아프다면서 자신의 걸음 속도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4시쯤 White Snow Hotel에 도착했다. 로비는 불이 꺼져 있어 직원을 불러 깨웠고 늦은 체크인을 신청해 둔 상태라 별문제 없이 체크인을 마쳤다. 한강이 보이는 705호는 가격 대비 괜찮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음에 안 드신 지 계속 트집을 잡고 계셨다. 아니 서울에서부터 이미 짜증이 나신 상태였다.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터라 나도 순간순간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샤워가 아닌 목욕을 하셔서 한 시간이 기본이고 난 배낭여행에 익숙해져 10분이면 끝냈다. 그래서 먼저 샤워를 하겠다고 하니 굳이 먼저 씻겠다고 하셨다. 옷을 챙기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쉬다가 천천히 준비하고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니 짜증을 내면서 막아섰다. 나라면 벌써 씻고 나왔을 시간쯤에야 간신히 욕실에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욕실에서 나오시더니 배수가 안된다고 짜증을 내셨다. 다낭에서 그런 후기를 많이 봐서 그럴려니 했다. 그런데 수건이 하나뿐이라며 또 짜증을 내셨다. 그러나 이미 수건 다섯 장을 확인한 후였다. 가서 보니 하나 걸려있던 발수건을 수건으로 착각하신 모양이었다. 세면대가 막혀서 속옷을 제대로 빨지 못하겠다며 또 짜증을 내셨지만 세면대 배수구의 마개를 닫아둔 상태였고 치약이 없다고 짜증이셨지만 어메니티도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사용했다면 자연스러웠을 일이 어머니가 먼저 들어가서 생긴 일이었으니 기다리다 지친 나도 같이 투덜댔다. 한 시간 동안 더운물을 사용한 욕실 안은 수증기가 가득 찼다. 숨이 막혀 환기를 시켜야 했는데 샤워해 보니 욕실이 넓어서 배수도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짜증을 냈던 어머니는 만사가 싫으셨던 거였다.
새벽 다섯 시, 한국시간으로 일곱 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리된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는 교체하지 않았는지 누군가의 체취가 남아있어서 새 수건을 가져다 깔았다. 이미 동이 트고 있어서 밥을 먹고 자기로 했다.
다섯 시간이 넘는 비행은 어머니에게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낯선 길을 속보로 걸었으니 더 힘드셨던 것 같다. 내가 대중교통 이용을 힘들어한다는 것을 모르시니 더 짜증이 나셨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머니를 깨우니 일어났고 6시쯤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의외로 이것저것 잘 드셨다. 룸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노닥거렸는데도 아직 7시 반이다. 어머니는 다시 주무셨고 9시 반쯤 먹구름이 보여서 혼자서 빅씨 마트에 다녀오려고 준비하니 어머니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호텔에서 빅씨 마트까지 걸어서 십분 남짓이지만 어머니는 도착과 동시에 녹초가 되어버리셨다. 후다닥 쇼핑을 하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하니 어머니의 관심을 끌 무언가가 필요해서 3층 잡화코너로 먼저 갔더니 힘든 것도 잊고 쇼핑에 빠져버리셨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이제는 내가 힘들어서 빨리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어머니는 기운이 넘치셨다. 역시 쇼핑은 없던 기운도 나게 했다.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아버지 선물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지하로 모시고 갔다. 망고를 사러 식료품 코너로 갔고 빅씨 마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간식을 담고 있는데 그제야 어머니도 힘든지 망고나 사서 빨리 가자고 독촉을 하셨다. 이번엔 내가 눈치를 보며 쇼핑했다. 어머니는 맛만 본다면서 망고를 2.5kg 샀고 난 여행 말미를 위해 후숙 시켜 먹을 초록 바나나를 1kg 샀다. 장바구니는 이미 가득이라 과일 봉지와 주스는 어머니가 들었는데 이마저도 힘들어해서 과일 봉지까지 내가 들었지만 그 주스 한 병조차 힘들어하셨다.
베트남에는 연유 커피, 코코넛 커피 등이 유명했고 한 번에 걷기 힘들까 봐 수시로 카페에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거부하셨다.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 한잔의 여유를 모르셨다. 나 혼자 카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는 갈 수 있었다. 커피도 마시고 더운데 땀도 식힐 겸 카페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냥 호텔에 돌아가자고 재촉하셨다.
12시쯤 호텔에 도착하니 룸은 청소되어 있었으나 시트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시트가 원래 지저분한 건지 교체를 안 한 건지 항의할까 하다가 쉬어야 하는데 직원이 들락거리는 것도 싫고 해서 오늘도 그냥 새 수건을 가져다 깔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마저도 거부하셨다.
향신료에 거부감 있는 어머니는 동남아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한적이었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방송에서 백종원 씨는 맛있게 먹더라며 음식에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고수와 향신료에 거부감이 없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럼에도 소용없었다. 예전에 어머니와 마카오에 갔을 때도 한국인이 많이 가는 레스토랑에 가서 한국인이 가장 잘 먹는 음식을 시켰는데도 어머니와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먹지 못하는 걸 시험 삼아 도전할 수는 없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으니 길거리의 쌀국수는 감히 도전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망고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혼자 왔을 때 맛있게 먹었던 망고를 사 왔지만 아직 딱딱해서 후숙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맛을 보더니 이런 망고가 아니라 작고 노란 망고가 맛있는 거라고 우기셨다. 와서 먹어 봤다고 말씀드렸고 후숙을 위해 미리 더 사다 두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런 건 먹지 않겠다고 하셨다.
여기 와서 잠만 자는 어머니, 쉬는 것도 좋았지만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서 레스토랑으로 가기로 했다. 다낭 대성당 가는 길에 있는 Pho 24에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17시까지 영업이라 시간이 촉박한 데다 검증된 메뉴가 두 가지뿐이라 좀 더 가까운 Ẩm Thực Xèo로 가서 반세오를 먹기로 했다.
주무시던 어머니는 일어나셨고 준비해서 나갔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갔지만 어머니는 그조차도 걷지 못하셨다. 바가지요금으로 택시 기사와 씨름하는 게 싫어서 애초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으로만 정해두었던 터라 택시를 타기엔 너무 가까웠다. 호텔에서 500미터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한국인에게 알려진 곳임에도 한산했다. 반세오, 해물볶음밥, 스프링롤, 분짜 중에서 새우 반세오 두 개와 분짜를 선택했다. 깔끔한 한상 차림이라 좋았다. 잘 드시긴 하셨지만 딱히 맛있지는 않으신 것 같았다. 뭐라도 더 시키려고 하면 됐다고 하셨다. 음식 값이 삼천 원도 안 하는 거라고요! 진작 알았으면 어제도 와서 먹을 걸 하고 보니 오늘이 다낭에서의 첫날이다. 너무 긴 하루에 둘째 날로 착각을 했던 거였다.
다섯 시 반쯤 Nha Tho Con Ga 대성당으로 갔는데 가는 길에도 여전히 힘든 내색을 보이더니 성당에 도착해서는 언제 그랬나는 듯이 곳곳을 신나게 구경하셨다. 뒷마당의 동굴 성모상을 보고 미사를 참석하고 통 크게 기부도 하셨다.
(미사 시간 05:15 08:00 10:00 15:00 17:00 18:30)
Cầu Rồng Đà Nẵng 불쇼를 잘 볼 수 있는 유람선 대신 근처 카페에서 코코넛 스무디를 먹고 오려고 했으나 21시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한강변 쪽으로 걷다 보니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날씨가 무덥지 않아서 다리 건너 Cầu Tình yêu Đà Nẵng 사랑의 부두에 다녀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무리라 이번에도 갈 수 없었다. 호텔에 돌아와 라루 맥주 한 캔을 나누어 마시고 씻고 쉬었다. 사다 둔 옥수수와 바게트를 먹고 장부를 정리하는 동안 어머니는 주무셨다. 20시 반쯤 깨우니 피곤하다며 그냥 잤으면 좋겠다고 한다. 억지로 나가서 볼 정도는 아니라서 알았다고, 그냥 주무시라고 했으나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자기 전에 씻으려면 땀을 흘려야 한다며 굳이 또 나가시겠단다.
Cầu Rồng Đà Nẵng 불쇼는 토요일과 일요일 21시에만 구경할 수 있어서 토요일 밤에 출발했던 거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겨우 이걸 보려고 여길 온 거냐고 타박하셨다. 어머니는 아마 홍콩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라도 마시자니까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라루 스페셜 맥주 한 캔을 나누어 마시고 샤워하고 누웠다.
다섯 시쯤 눈이 떠졌다. 다낭에선 처음으로 잔 셈이다. 어머니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샤워했다. 6시쯤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평일이라 그런가 오늘은 한산했다. 분짜와 용과, 마카로니 쌀국수가 새로 나왔다. 거의 두 시간 동안 느긋하게 커피 마시며 쉬다가 룸으로 올라왔다.
빅씨 마트에 가려고 했으나 왠지 피곤하다. 어머니도 힘들다고 꼼짝 않고 얘기만 하신다. 망고가 제대로 익었으면 다 먹고 또 사러 갔을 텐데 여전히 딱딱했다. 그래도 더 사다 놓으면 돌아갈 때쯤엔 익을 거라고 했으나 계속 한국에서 먹었던 망고 타령을 하셨다. 그대로 체크아웃하기엔 왠지 억울해서 짐을 정리해 두고 9시 반쯤 빅씨 마트로 갔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기어이 따라나서신다. 선물용으로 몇 가지를 보여드리고 어머니가 원하는 작고 노란 망고를 샀다. 찜해 둔 선물은 롯데에서 배달시키기로 하고 돌아왔다. 샤워하고 11시 50분 체크아웃했다.
혼자라면 또 걸었겠지만 거리가 있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리셉션에 목적지를 알려주고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하니 대기 중이던 택시 기사를 불렀는데 공항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 기사는 실망을 했지만 그래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용다리를 따라 해안까지 Sea Phoenix Hotel Da Nang에 무사히 도착했다. 미터로 딱 십만 동 나왔다. 바로 체크인했다. 욕조 딸린 킹 베드가 있는 1004호 수페리어 더블룸은 시티뷰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시아 파크 대관람차가 창 밖으로 보였다. 14층 수영장은 루프탑이라 우측으로 Núi Ngũ Hành Sơn Đà Nẵng 마블산인 오행산이 보였고 좌측으로는 해안 따라 Chùa Linh Ứng 보였다. 12층 피트니스도 구경했다. 그런데 카드로만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어 어머니랑 같이 움직여야 했다. 카드 없이는 에어컨 작동이 안 되니 혼자 룸에 남는 것도 무리였다.
서너 배 비쌌던 그 노랗고 작은 망고도 후숙이 필요했고 맛을 본 어머니는 또 실망하셨다. 예전에 어머니와 마카오에 갔을 때 길에서 팔던 노란 망고를 기억하셨다. 관광객을 상대로 팔던 거라 며칠 지난 그 망고는 완전히 익어있었다. 흐물거리던 망고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베트남에는 맛있는 망고는 없다고 단정하셨고 더 이상 망고는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더워서 해가 지면 롯데 마트에 가려고 했는데 먹구름이 몰려와서 바로 출발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걸어갔는데 너무 추웠다. 30분 정도 걸렸지만 땀 대신 떨면서 갔던 것 같다. 게다가 도착 무렵 스콜이 쏟아졌다.
일단 4층 로사 몬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었다. 마트를 둘러보다가 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장바구니를 잃어버렸다. 혹시나 싶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장 볼 때 유용하게 쓰던 커다란 장바구니였는데 누군가 주워간 모양이다. 요긴하게 잘 썼으면 했다. 어머니는 왜 간수를 못해서 잃어버렸냐며 두고두고 잔소리하셨다. 평소라면 나도 아까워하고 있었겠지만 액땜한 셈 치기로 했다. 나와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동생네엔 플래팅을 위한 작고 예쁜 사과 모양의 고무나무 도마를 사주려고 하니 도마는 무조건 커야 한다며 전화까지 해서 기어이 특대 사이즈로 구입하겠다고 하셨다. 게다가 이모들에게도 똑같이 도마를 사 주려고 해서 얼른 다른 것을 추천했다. 어머니는 얘기만 꺼내면 종류당 다섯 개씩 이상을 구입하려고 하셨다. 사람들 취향에 맞추어서 추천해 주었으나 저렴한 가격을 듣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다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쇼핑에 빠지셨고 나중엔 한국에서 파는 것까지 구입하려고 하셨다. 어떻게 들고 가려고 하냐니까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하지 말란다. 어머니의 캐리어에는 이미 공간이 없었다. 나중엔 통나무도 아니고 고무나무도 아닌 도마까지 사겠다고 하셨다.
푸드코트엔 한국 음식이 많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관심이 없으셨다. 직접 구운 피자를 먹고 싶었는데 조각 피자보다 피자 한판을 사려고 했더니 갑자기 햄버거를 먹자고 하셨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맥도날드에 모시고 갔던 기억에 찾으셨던 것 같다. 결국 롯데리아에 가서 비싼 햄버거를 먹었다. 얼음은 빼고 콜라를 요청하니 컵의 1/3만 채워주어서 경악했다. 게다가 같이 주문했던 내 햄버거는 어머니가 다 드시고 난 이후에 나와서 먹지 못하고 포장해 왔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쳐서 또 걸어서 돌아왔다. 이 또한 마지막 걸음이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씻고 '스피드 엘' 어플로 배달을 시켰다. 백만 동 주문을 하면 오만동 쿠폰이 생겼다. 정리하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여섯 시쯤 너무 추워서 잠이 깼다. 30분쯤 어머니를 깨워서 아침을 먹으러 갔다. 화이트 스노우 호텔보다 퀄리티 있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3층 식당은 추워도 너무 추웠다. 에어컨을 잠시라도 꺼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9시에 신청한 롯데 마트 배달은 9시 10분쯤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와 함께 로비로 내려갔지만 도착했다던 롯데 배달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주소가 잘못되었다며 다른 곳으로 배송되어 한 시간 늦게 온단다. 룸으로 올라가기 번거로워 로비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로비도 너무 추웠다. 뒤늦게 배달이 와서 한 시간 만에 룸으로 돌아왔다. 롯데에도 작은 망고가 있어서 주문해 드렸는데 역시나 딱딱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후숙을 다시 설명해 드려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한국에서 후숙 하려고 며칠을 두었지만 맛있게 익지 않았더라며 우기셨다. 일단 선물은 일부만 구입해서 정리해 넣어보라고 했다. 넣을 공간도 없는데 어떻게 가져가려는지 모르겠다.
룸 클리닝 시간 즈음에 튜브를 들고 14층 수영장에 가서 입으로 바람을 넣었다. 물놀이하기 좋을 것 같아 옷을 갈아입으러 혼자 룸에 돌아오니 룸 클리닝은 끝났으나 어메니티 칸은 텅 비어 있었다. 룸에 갈 거라던 어머니는 수영장 야외 의자에 앉아서 졸고 계셨다. 옷이 젖는 게 싫다고 수영은 안 하시겠다던 어머니는 어느새 일어나 수영장에 발을 담그셨고 난 튜브에 몸을 실어 둥둥 떠다녔다. 강렬한 햇볕에 수영장 가장자리는 발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빅씨 마트에서 사 왔던 망고를 창가에 두고 나갔다 들어오니 말랑하게 후숙 되어 있어서 어머니는 롯데에서 구입한 망고 대신 빅씨 망고를 맛있게 드셨다. 방치해 두었던 초록빛 망고가 노랗고 말랑하게 후숙 되는 것을 보시더니 그제야 더 사다 둘 걸 하고 아쉬워하셨다.
18시쯤 바닷가로 갔다. 프리미어 빌리지 리조트를 가로지르니 해변까지 금방이었다. 풍경이 좋은 미케 비치에서 발만 바닷물에 담그고 노는데 고즈넉해서 혼자 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18시 30분이 되자 나가라는 안전요원, 해변 입구에 발을 씻는 수도시설이 있었다.
돌아와서 샤워하고 어머니는 새우 라면과 라루 스페셜 맥주, 옥수수, 삶은 달걀을 먹었다. 나는 더운 곳 특히 낯선 곳에서 잘 먹지 못하여 계속 빈 속이지만 조식으로도 이미 충분하여 망고는 먹어보지도 못했다. 딱딱한 망고도 좋아하던 나는 망고를 실컷 먹으려면 밥을 포기해야 했다.
네시 반 눈이 떠졌는데 불안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7시쯤 아침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거의 비슷했고 오늘은 춥진 않았다. 8시쯤 룸으로 돌아왔고 9시쯤 룸 클리닝을 하러 와서 14층 수영장으로 피신했다.
2시 반쯤 미케 비치로 갔다. 패러세일을 타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안 타겠다고 하셨다. 무서워서기도 했지만 물속에 들어가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혼자서는 의미가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다가 나도 포기했다. 모래찜질을 하겠다는 어머니를 모래에 파묻어 드리고 난 튜브에 몸을 실어 바다를 둥둥 떠다녔는데 잠깐 깜빡한 사이 무언가에 걸려서 눈을 떴는데 해변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잠깐 사이에 먼바다로 떠밀려가서 안전선에 걸린 거였다. 두려움에 버둥대다가 손으로 노를 저어 간신히 해변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어머니는 여전히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뜨거운 모래가 아니라 춥다고 나오셨다. 4시 반쯤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무지개가 떴다. 햇살 속에 비가 내렸다. 옷이 젖으니 그제야 어머니는 바다로 들어가셨다. 물에서 나오는 순간, 마소재의 바지가 물을 가득 머금더니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다. 큰 이모가 사준 비싼 옷이라며 한참을 아까워하셨다. 바깥으로 나오니 싸늘했고 물속이 더 따뜻해서 계속 바닷물 속에만 있었다.
5시쯤 돌아와서 씻고 옷을 널어두고 호텔 옆 바빌론 스테이크로 갔다. 해산물 볶음밥과 함께 새우구이를 시키려고 했으나 그 흔한 걸 왜 먹냐는 어머니의 반대에 마가리따 피자를 시켰다. 급할 일도 없는데 허겁지겁 먹는 어머니 덕에 나도 마음이 급해져 장이 꼬였다. 제발 천천히! 즐기면서 드실 수는 없는 걸까? 어머니에겐 이곳도 그저 밥 먹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빨리 먹고 빨리 돌아가자고 하셨다.
호텔로 돌아와서 얼굴에 팩을 붙이고 빨래 건조를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 9시 반 어머니는 이내 코를 골았고 나도 피곤해서 불을 끄고 누웠다. 꿈을 꾸다 눈을 뜨니 자정이다. 한결 나아져서 빨래들을 재정비하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새벽 2시다.
다섯 시쯤 빨래들은 대부분 말라서 정리했다. 그리고 어머니 폰을 정리하다 작년 11월에 가족 모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빠가 모두 부르라고 했다는데 나에게는 얘기도 하지 않은 거였다. 내가 가지 않은 것과 얘기조차 듣지 못한 것은 달랐다.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7시 반쯤 식당으로 내려갔다. 먹는 양은 점점 줄었고 요거트와 커피만 몇 잔을 마시다 8시쯤 룸으로 돌아와서 짐을 정리했다. 남은 시간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죽은 이모부 이야기를 꺼냈다. 죽은 지 이십 년이 지난 그 사람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 걸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11시 50분쯤 체크아웃했다. 밤 비행기라 오후엔 롯데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다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로비에 있으니 어머니는 롯데에 가자고 재촉했지만 롯데에 가면 앉아서 편히 쉴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3시쯤 출발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한 시간 더 있다 가자고 한다. 호텔 외부에 셔틀버스 안내문이 있었다.
※Hội An 왕복 픽업 셔틀 (150,000동 10:10 14:10 16:10 ~ 15:00 19:00 21:00)
호텔 앞에 택시가 한대 서 있었지만 리셉션에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더니 큰 차가 왔다. 롯데 마트에 간다고 하니 승차를 거부했고 옆에서 대기 중이던 택시기사가 자기가 대신 가겠다고 했다. 고마워서 팁을 더 드렸다.
어머니는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바지가 찢어졌는데 롯데 2층에서 코끼리 바지를 사드렸더니 이번엔 브랜드 의류에 관심을 가지셨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브랜드나 가치보다 얼마에 샀는지가 중요했다. 쇼핑이라도 하면 덜 힘들까 봐 빠뜨린 것은 없는지 다시 둘러보았다. 저녁거리로 볶음밥, 생선 튀김, 떡볶이를 사서 먹었다. 자전거 탈 때 필요한 헬맷을 하나 사고 싶었으나 부피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한국에선 비싸지만 이곳에선 일상품이라 오천 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일 것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야 어머니는 망고가 생각이 났는지 저녁을 괜히 먹었다며 후회하셨다. 저녁까지 먹고 나니 롯데 마트에 계속 있는 게 의미가 없었다. 어머니도 힘들어하셔서 그냥 공항에 가기로 했다.
롯데 마트를 나서려는데 베트남 전통 모자인 농에 관심을 가지셨다. 아버지가 주말 농장에서 쓰면 좋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들고 가려고 하냐니 쓰고 갈 거라고 하셔서 한참을 실랑이했다. 비행기 안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그 모자를 쓰고 있을 어머니를 상상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허접한 그 모자를 무사히 가져간다 하더라도 이내 망가져 버릴 텐데, 아버지는 그걸 보고 가만있으실 분이 아니었다. 욕먹을 일을 굳이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택시기사들 속에서 우버 기사를 만나서 9만 동에 합의를 보고 공항으로 갔다. 3층 출발선으로 가서 의자에 앉으니 20분이다. 카운터는 아직 오픈 전이라 물 한 병을 비우고 대기했다. 야간비행이다 보니 대기시간은 길어졌다.
저녁을 먹은 후라 배가 부르다면서 노랗게 익어버린 망고를 버리기 아깝다며 공항에 앉아서 손으로 까서 드시는 어머니가 보기 싫었다. 이미 물렁거려서 과즙이 줄줄 흘렀다. 한두 개쯤은 들고 와도 되었지만 혹여 압수당할까 봐 배가 부른데도 드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후숙 시키면 맛없다며? 남은 망고 봉지를 들고 게이트까지 들어갔다. 이젠 들고 와도 되는데 그걸 또 꺼내서 드신다. 배 고프냐니까 아니라면서 꾸역 먹는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만 드시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야간 비행을 핑계로 대화는 단절한 체 그렇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바로 옆에 역무원이 있었지만 무료 티켓 수령을 거부하셨다. 베트남에서 커피 값은 아깝다고 하시더니 교통비는 안 아까우신 걸까? 게다가 환승할인을 위해 카드 태그를 하라 미리 말씀드렸지만 고향에서는 안 해도 되었다며 우기셨다.
'아니, 왜 그러시냐고요!'
이제 내려야 되니 카드를 대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계속 버티셨다.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카드를 꺼낼 때까지 버텼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나를 밀치고 그냥 내리셨고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지갑을 뺏어서 카드를 대니 교통카드가 여러 개인지 다른 카드가 찍히며 이중 결제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무섭다며 신용카드를 쓰지 않으셨고 현금 뭉치를 들고 다니셨다. 그래서 장지갑을 사드렸더니 번거롭다며 여전히 동전지갑에 현금 뭉치를 넣고 다니셨다. 계산할 때마다 현금 뭉치를 모두 꺼내시니 혹시라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손에 잡기 편한 미니 반지갑을 사드렸더니 어디에서 쓰는지도 모를 적립 카드 여러 장을 넣고 다녀서 지갑은 현금이 아주 많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전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만 넣고 다니라 해도 소용없었다. 노인네가 교통카드는 몇 개씩이나 왜 들고 다니는지, 외국 나가면서 현금 뭉치와 동전은 왜 들고 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탓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나면 입을 닫아버리는데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앞장서서 집으로 왔고 어머니도 따라오셨지만 짐을 두고는 나가버리셨다. 아는 곳이 없으니 성당에 가셨을 것 같았다.
혼자서 짐을 정리하고 샤워했다.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졌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체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길로 고향으로 가버리셨다.
난 바로 후회했다. 그게 뭐라고?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울었다.
이 여행은 어머니에게도 상처가 되었겠지만 나에게도 큰 상처였다. 조금만 참을 걸, 그게 뭐라고 화를 냈을까? 그때 난, 밥 주는 손도 물고 보는 유기견 같았다. 물면 안 된다 걸 알면서도 무서워서 일단 물고 보는 유기견이 되고 말았다. 난 한동안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대하기가 미안하고 불편해졌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화가 왔지만 난 내 감정을 숨기려 뚱하니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어머니에게 메시지가 왔다.
"엄마가 죽을죄를 지었다."
난 이 메시지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될 일을 어떻게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내가 뭐라고! 그날 밤도 난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에게 나는, 또 다른 남편이 되고 말았구나!'
어머니와 자주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와 단 둘이 가는 여행이 두려워졌다.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게 뻔해서 이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나도 지쳤고 힘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여행을 갈구하셨다. 중재자 없이는 힘든 여행이라 이모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누구보다 바쁜 이모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다음에 가자!'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여행을 가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나 때문이었다. 내가 더 이상 착한 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