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9

나의 눈물을 흘리게 하려면 당신도 울어야만 합니다.

by 안녕
아홉 살 인생




우리가 어릴 때 아버지는 외양선을 타셨다. 일 년에 한 번쯤 집에 오실 때는 진기한 것을 많이 갖고 오셨고 그중에는 먹을 것도 있었다. 그 시절 귀했던 바나나를 챙겨 오시던 아버지를 우리는 은근히 기다리곤 했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아버지는 국내로 이직하여 제주도와 완도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셨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오셨고 오실 때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셨다.

그렇게 가끔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당근'을, 아버지 없이 홀로 삼 남매를 키우셔야 했던 어머니는 '채찍'을 맡으셨다.

여름방학이면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계시는 배에 가서 생활을 하곤 했다. 휴가를 떠난 선원의 빈 선실이 오빠와 나의 방이 되었고 우리는 방학 내내 거기서 생활했다. 새벽마다 제주항의 눈부신 불빛에 잠이 깼고 어쩌다 승객들과 마주치면 내가 왠지 승무원이 된 것 같아 우쭐해지곤 했다. 물론 큰 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상에서의 생활 덕분에 커서도 뱃멀미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제주도의 어느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급하게 제주도로 이사하게 되었다. 집은 어머니 친구가 잠시 살기로 하고 간단한 짐만 챙겨 들고 제주도로 갔다. 저녁에 배를 타고 새벽에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여느 항구처럼 제주 먼바다에서 대기하다 항구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입항을 했다.

우리의 새로운 집은 어느 다세대 건물의 2층이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2층짜리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주변에 시장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는데 사이렌이 울렸다. 그날은 현충일이었다.

다음날 오빠와 나는 전학을 위해 학교로 갔다.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옆 동네 초등학교가 더 좋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는 굳이 우릴 제주 북 초등학교로 데려갔다. 동네를 빠져나와 논과 밭을 지나가야 했던 나름 먼 길이었다. 첫날은 어머니가 따라오셨지만 다음날부터는 오빠와 단둘이 이 길을 걸어와야 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학교에 불이 났고 아직 교실이 마련되지 않아 교실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임시방편으로 학생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일찍 입학해서 4학년인 오빠와 2학년인 나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학교를 가야 한단다. 그 말은 학교 가는 이 길을 나 혼자 걸어 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 이름과 같은 담임 선생님은 친절하셨다. 제주도 사투리가 심한 반 친구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선생님이 나서서 통역을 해주시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길을 잘 기억해 두어야 했다. 혼자서 이 길을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무서웠지만 그보다도 어머니가 더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긴장 속에 학교를 찾아갔고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했지만 하루 만에 친구를 사귀는 건 나에겐 힘든 일이었고 게다가 그 학교 학생들은 우리 동네에 살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 아홉 살 아이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그 넓은 들판이 아직까지도 꿈에 종종 나오곤 한다. 한참을 걸었는데 낯선 곳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닌 것 같아 걸어왔던 그 길을 되돌아왔다. 다시 길을 찾아내긴 했지만 헤매느라 한 시간가량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꾸지람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은 말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어릴 때 기억처럼 정말로 그렇게 멀었던 길인지 새삼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때 살았던 그 동네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회사로 전입 신고를 했던 탓에 실제 살았던 집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게다가 지금은 많이 바뀌어 더 찾기 힘들어졌다. 도시화가 되고 있는 제주도는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나니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고 나와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밥을 직접 해 먹으며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밑반찬은 미리 만들어 두고 가셨지만 밥은 직접 지어서 먹어야 했다. 아홉 살, 열 살짜리 아이 둘이서 일주일 동안 부모님 없이 지내는 게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쌀을 씻어서 전기밥솥에 넣고 손등까지만 물을 채우면 된다고 하셨다. 우리가 잘하는지 직접 시켜보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자상한 분은 아니셨다.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 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고만 하셨다.

어머니가 지어놓은 밥을 다 먹게 되자 밥을 지어야 했다. 나는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해서 손등까지라고 했지만 오빠는 손가락을 아래로 세워서 손등까지라고 했다. 오빠의 뜻대로 물을 맞추었고 그날 우린 죽을 먹어야 했다. 매일 밥을 하기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많이 하자는 오빠의 의견대로 한솥 가득 지은 탓에 며칠 동안 우린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할 뻔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가끔씩 들여다보던 옆집 할머니가 우리의 죽을 밥으로 바꾸어 주셨다.

어른은 아무도 없고 심지어 이사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동네도 낯설고 친구도 하나 없는 그곳에서 오빠와 둘이서 현실판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려먹고 오빠가 학교에 가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오빠가 오기도 전에 학교로 갔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 즈음에 돌아오면 오빠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노느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는 잘생긴 외모로 어려서부터 인기가 많았고 친구도 금방 사귀곤 했다.

오빠는 해가 지고 나서 집에 돌아왔으니 나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혼자였다. 쉬는 날에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 아이돌 노래 가사는 몰라도 그때 들었던 그 노래들은 아직도 가사를 기억하곤 했다.

어머니는 계몽사에서 출판한 60권짜리 동화책 전집을 오빠에게 사주셨는데 한 번도 뜯지 않았다. 제주도로 이사하면서 그 전집에서 30권 한 박스만 챙겨 오셨는데 그게 하필 31번부터 60번이었다. 오빠의 책이었지만 책에 흥미 없던 오빠 대신 내가 먼저 읽었던 그 동화책이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곳에 있는 내내 30권의 책을 여러 번 읽었고 그중에서도 '말하는 떡갈나무'는 내 얘기인 것 마냥 수십 번은 읽었던 것 같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의 손때가 묻은 그 동화책은 자연스레 내 책이 되었고 지금도 어머니는 그 동화책 전집을 나에게 사주신 줄로 알고 계셨다.

창밖을 내다보며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나의 낙이었다. 상처 난 가슴을 드러내 놓고 밖에 나와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아이가 젖을 빨다가 물어서 그렇다고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남편이 그랬다며 수군거렸다. 아주머니가 말한 그 집 아이는 이미 뛰어다니는 다섯 살 꼬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주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건너편 2층에 살던 언니와 자주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다 보니 각자의 집에서 창을 통해 대화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언니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놀았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 언니도 고작 열세 살에 불과한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였다. 오빠에게 물려 입은 인디언 꼬마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던 그 언니는 내 티셔츠에 그려진 꼬마 인디언을 스케치북에 그려주곤 했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잠이 들면 그림을 내 옆에 놓아두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었다.

먼 나라 같은 그 섬에서의 기억이 가끔씩 떠올랐다. 그 언니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하지만 추억에 젖어서 그 섬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는 좋은 추억도 있었지만 악몽 같은 일도 있었던 곳이었다.




옆집 아저씨는 햄스터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햄스터는 진귀한 동물이었나 보다. 어느 날은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이 궁금해서 계단을 올라가다가 옥상 출입문 옆에 놓여있는 햄스터 박스를 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동물이었지만 인형 하나 없이 지내던 나에겐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한참을 들여다 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차마 만지지는 못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곳에 아저씨가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아저씨는 웃으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아저씨의 물건을 몰래 훔쳐보다 들킨 기분이라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나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나를 꼭 껴안았다. 그러더니 내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소아성애자였던 그 아저씨는 할머니를 통해서 우리 집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고 그래서 어쩜 내가 그 아저씨의 목표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엔 그 아저씨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몰랐지만 나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나보다 힘이 센 아저씨에게서 한참 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저씨는 그 일이 끝나자 나에게 비밀이라며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집으로 도망쳐 온 나는 어머니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어놓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고 오히려 어머니에게 야단맞을 것이 뻔했다. 어른들 몰래 옥상에 올라간 내 잘못이기도 했다. 어쩜 어머니가 슬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서운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속상해하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난 한동안 방 안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옥상에는 왜 올라갔을까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숨어서 몰래 울었다. 울다 지쳤을 때쯤 그 햄스터가 생각났다. 갇혀있는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그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었고 햄스터는 그런 나쁜 악당에게 잡혀있는 희생양이었다. 나는 나를 구해줄 기사를 매일같이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런 기사는 동화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에서 그 햄스터의 기사가 되어주기로 했다.

아무도 몰래 그 옥상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무섭고 떨렸지만 다행히도 아저씨는 없었고 햄스터 박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도망치게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만질 수가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망설이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한 마리를 집어 올렸다. 그 순간 그 햄스터는 내 손가락을 깨물었고 난 그만 햄스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햄스터는 옥상에 있는 작은 창고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나도 너무 놀라서 그냥 도망치고 말았다.

그날 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햄스터가 없어진 걸 알게 된 아저씨는 옆집 아이가 햄스터를 만진 것 같은데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라고 할머니에게 시키고 있었다. 어쩜 그 아저씨는 내가 복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랬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왜 그랬는지 묻는 게 두려웠던 그 아저씨는 자신의 어머니 등을 떠밀고만 있었다.

나는 모른다고 얘기했고 어머니는 나가서 그대로 전했지만 심증이 있었던 아저씨는 자신의 밥줄이었던 그 햄스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되찾고 싶은 마음이 컸던 그 아저씨는 저 꼬마가 평소에도 햄스터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봤었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의 추궁이 이어졌지만 나는 만진 적 없다고 똑같이 거짓말을 했다.

그날 밤 아저씨는 햄스터를 찾아 건물을 뒤지고 다녔고 새벽녘에야 그 햄스터를 창고에서 간신히 찾아냈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아저씨는 그 햄스터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꼬여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밥벌이가 되냐며 의아해하던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 그 햄스터가 좀 더 깊숙이 숨었더라면, 아니 더 멀리 도망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햄스터에겐 조그만 박스가 세상의 전부였고 그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 멀리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기사가 되어주는 것도 실패했다. 그 뒤에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유린되었을지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 벌을 받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가끔은 그때 털어놓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어머니인데 나를 안아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어머니가 서울에 오셨을 때, 그때 내가 입을 다문 게 잘한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싫어하셨고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사건은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어머니에겐 세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니었던 나는 찾아서라도 보곤 했고 여느 때처럼 그날도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강진 여고생 살인사건》

2018년 6월 16일 13시 30분경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16세(고1, 2002년생) 여고생 이 양이 집을 나선 뒤 실종되었다가 2018년 6월 25일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

2018년 6월 16일 13시 30분, 이 양이 집을 나서는 것이 CCTV에 포착되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이 양은 SNS를 통해 '아버지 친구 김 씨가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다고 해 해남군 방면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8분 뒤 실종 학생이 약속 장소로 추정되는 공장 앞으로 가는 것도 CCTV에 찍혔다. 이에 김 씨도 13:50경에 가게를 나와 실종 학생이 향하던 공장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공장에는 CCTV가 없어 피해자가 무엇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14:16에 김 씨의 검정 에쿠스 차량이 이동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었으나 선팅이 너무 짙어서 실종 학생의 탑승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실종 학생은 실종 당일 15시경 수신된 친구의 문자도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실종 학생의 휴대전화는 도암면 야산에서 16시 24분에 전원이 꺼졌다고 한다. 한편 김 씨는 이 양의 집이 있는 성전면에서 도암면으로 20km 정도 이동한 뒤 도암면에서 2시간 30분을 머물렀다고 한다. 약 3시간 뒤 김 씨는 21시 20분에 자신의 차량을 몰고 군동면 인근 저수지로 간 뒤 21시 33분에 돌아온 것이 CCTV에 포착이 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김 씨의 휴대전화 위치 신호가 군동면 저수지에서 잡힌 것도 파악했다. 23일에 추가로 밝혀진 것은 이 양의 휴대전화 동선과 김 씨의 차량 동선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실종 당일, 이 양의 어머니는 딸이 실종되자 유력한 용의자인 아버지 친구 김 씨의 집을 혼자 찾아갔다. 그러나 김 씨는 23시 08분께 이 양의 어머니가 찾아온 것을 알고 뒷문을 통해 도망쳤다. 어머니는 17일 새벽에 경찰 측에 실종 신고를 하고 경찰이 김 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김 씨는 17일 6시 20분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 근처 철도 공사장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유서나 타살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가 16일 17시 20분에 자신의 자택에서 본인 소유의 차량을 세차하고 옷가지를 불태운 정황을 파악하고 차량 내부의 블랙박스도 꺼져 있었던 차량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김 씨의 시신도 부검해 사인을 찾아낸다고 한다. 이후 김 씨의 차량에서는 모발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김 씨와 이 양은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으며, 이 양도 김 씨의 가게(강진 시골 보양탕)에서 일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병력 500명과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도암면 일대를 수색하였다. 20일 경찰은 이 양이 아버지 친구 김 씨를 만나기 하루 전에 "내일 아르바이트를 간다.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다."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 달라." 하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이 양의 친구로부터 확보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계획범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한다고 했다.

또한 김 씨가 16일 밤에 저수지에 간 것을 파악하고 저수지도 잠수수색을 한다고 밝혔다. 23일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경찰 측은 덕서리로 수색 범위를 확대하고, 도암면 야산에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경찰이 아버지 친구라는 김 씨를 유력 용의자로 보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 : 김 씨는 실종 일주일 전 이 양의 학교 근처에서 이 양을 우연히 만나 "아르바이트를 시켜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김 씨는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 당부했고, 이 양은 친구에게 실종 하루 전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 달라.'라고 문자 메시지로 부탁했다.

이때 메시지에 'ㅋㅋㅋ'과 같은 장난스러운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해 위기감이 비교적 적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잘못된 보도이다. 실제로는 그런 표현이 없었다.

사건이 아직 실종사건으로만 알려졌을 당시 일부 사람들이 의문점을 가졌던 부분이다. 김 씨가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계획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 달라고 친구에게까지 말할 정도였다면, 피해자는 이미 용의자 김 씨에게 심각한 위협 혹은 수상함을 느꼈단 말인데도 스스로 용의자를 따라나섰으므로 이상했다. 다만 (용의자가 범인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피해자가 용의자에게 협박을 당했을 수도 있고, 용의자가 피해자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훨씬 연장자라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미성년자인 피해자는 이를 거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 이 양의 어머니가 찾아오자 황급히 달아난 점이다. 지난 16일 오후 11시 30분 즈음 집 초인종이 울리자 자기 가족들에게 "불을 켜지 마라."라고 말하고는 뒷문으로 도망쳤다.

셋째 : 김 씨가 자택에서 도망쳐 나온 뒤 다음 날 새벽 인근 공사장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점이다. 타살 흔적은 없었으며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넷째 : 실종 당일 김 씨와 실종 학생의 이동 동선이나 시간대가 비슷했다. 경찰은 실종 초기부터 김 씨의 차량 이동 경로와 이 양의 휴대전화 신호가 잡힌 지점들의 유사하단 사실에 주목했다.

다섯째 : 이 양이 사라진 직후 귀가해 세차를 하고 옷가지로 추정되는 물건을 태우고, 사건 당일 자신의 휴대전화를 자신의 가게에 두고 간 점, 그리고 블랙박스를 끈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또한 김 씨의 첫째 아들이 말하길 김 씨는 생전에 자신과 차를 공유했는데, 아버지 김 씨는 평소 아들과 달리 차를 탈 때면 블랙박스를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의 차량에서 확보한 머리카락과 지문, 집에서 확보한 소각 흔적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22일 노컷뉴스 보도에 따르면 '근처 주민들이 6년 전 이사와 거주했던 김 씨가 지난 4월부터 본인 소유의 축사, 주택, 산 등을 처분하려고 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김 씨는 4월 4일과 5일에 인터넷에 관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경찰은 김 씨가 주거지를 옮기거나 큰돈이 필요해 주택을 매매했을 것이라 보고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24일 15시경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이 휴대전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야산에서 발견됐다. 시신은 체취견이 찾아냈다. 시신은 매봉산이라 불리는 야산 근처에 세워진 피의자 차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속보에선 부패는 심하지 않았고 옷이 상당 부분 벗겨져 있었으나 풀과 나뭇가지로 덮여있었다는 말이 나왔으나, 이후 열린 경찰 브리핑에선 이를 부정했다. 발견된 시신은 알몸이었고, 부패가 심해서 정밀 감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등은 발견하지 못했고, 시신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립글로스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2018년 6월 25일 22시에 DNA 검사 결과 이 시신은 이 양임이 확인되었다.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계속하였다. 추정 이유로는 시신 발견지점이 높고 가파른 산 속인 데다가 피해자의 체중에 비해 김 씨의 체격이 왜소해서 혼자서는 시신을 옮기고 유기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 그 외에는 같은 무게라도 시신 상태일 때가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는 점 때문에 해당 지점까지는 여고생이 살아서 자신의 발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2018년 7월 6일, 강진경찰서 측은 국립 과학수사 연구원 부검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양의 아버지 친구 김 씨가 이 양을 살인한 걸로 보고 김 씨를 피의자로 전환했다. 숨진 이 양 시신에서는 수면유도제인 '졸피뎀' 성분이 나왔다. 사건 이틀 전, 피의자 김 씨가 병원에서 같은 성분의 약을 처방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9월 11일 경찰은 이 양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아버지 친구가 사망한 상태이므로 이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에 송치한다고 밝혔다.




한 여고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후 실종되었고 먼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지목된 아버지의 친구는 여고생의 어머니가 찾아오자 도망쳤고 자살을 해버렸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여고생을 강제로 그 험한 야산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여고생을 비난하셨다.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갔냐며 따라간 여고생이 잘못이라고 흥분하셨다. 나는 그날 어머니에게 정말 큰 실망을 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아버지 친구였으면 믿었겠지.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데려갔는지도 모를 일이잖아!"

만약 그때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했다면 어쩜 나는 어머니에게 더 큰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아홉 살 아이가 옳은 선택을 한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젠가부터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람의 얼굴은 굳이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사람 얼굴을 기억하게 되면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이 평생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미지를 기억하다 보니 목소리가 비슷하거나 인상착의가 비슷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겪었을 때 기억에서 잘 지워낼 수 있었다.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일을 한동안 기억했는지는 모르지만 제주도를 떠나면서 내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는데도 제주도만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어른이 되었다. 더 끔찍하고 더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어느 순간 그 기억이 생각났다. 그날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극복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내 탓인 것만 같고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아마 순간순간 떠올랐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잊으려 했을 것이고 그렇게 잊혔던 것 같다. 어쩜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갔던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아주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어디에 가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마냥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집에서 아주 먼 어느 산부인과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 어린 딸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했던 것 같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서 일부러 집에서 먼 곳으로 찾아갔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순간 그날이 문득 생각났고 그때 무슨 진료를 받았는지 궁금한 적도 있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주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옥상에 올라간 내 잘못이 아니다, 그 아저씨가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아직도 가끔은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바랄 수도 없었다.

그 섬이 나에게 잘못을 한 게 아니라고 주문을 걸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새로운 추억을 많이 쌓으면 좋은 곳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내가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과 실제 그곳에 가보는 것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곳으로 돌아갈 준비를 여전히 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