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0

용기란 두려움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것이다.

by 안녕
유리 멘털과 회복 탄력성




우리 가족은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눈으로만 인사할 뿐 말 한마디 없이 지나쳤다. 서로 다정하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았다. 혼자가 익숙해서 어쩜 따로 사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는, 그게 우리 가족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가족은 모여야 한다고 하셨다. 오빠는 내키지 않으면 거부도 했지만 나는 그 거절조차 하지 못하고 매번 집으로 향했다. 공포 속에 명절을 보내야 했던 나는 연휴에도 일을 시키는 회사가 고마울 때도 있었다. 너희는 왜 다른 집 자식들처럼 그러지 않느냐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라면서 보고 겪은 우리 집은 애초에 다른 집과 같지 않았다.

명절이 아닌 평소에도 어머니는 음식을 풍족하게 하셨다. 손님이 와도 밥을 꾹꾹 눌러 담으셨고 밥이 너무 많다고 하면 먹고 남기라고 하셨다. 힘들어도 대부분 꾸역꾸역 다 먹기는 하지만 버거우면 정말 남기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 남긴 밥은 도대체 누가 먹어야 하냐고 해도 음식은 무조건 풍성해야 한다고, 그게 예의라고 말씀하셨다.

평소 어머니는 아버지가 드시고 남긴 밥에 밥을 더 담아서 나에게 주셨다. 그게 불만이었던 나는 아버지 밥을 적당히 담아드리고 부족하면 나중에 더 드리겠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화를 내셨다. 그렇게 더 담아드리면 그걸 또 남기셨다. 자식도 새 밥을 먹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시는 걸까?

그렇게 어머니의 냉장고는 항상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밑반찬은 한 달은 먹을 정도의 양을 미리 만들어 놓으셨고 일주일이 지나면 어머니조차 드시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반찬통이 가득했지만 그중에는 이미 오래 방치되어 상한 것도 있었다. 반찬이 밥상을 채우고도 넘치지만 안 먹는 반찬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 집에 가면 냉장고 정리부터 하게 된다. 소재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인 반찬통을 모두 꺼내 같은 종류의 반찬통으로 옮겨 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싱크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반찬통부터 한 곳에 모아서 정리하고 고무패킹을 분리해서 세척부터 했다. 도어 칸에는 비닐봉지채 방치된 것들로 넘쳐나서 공간 활용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도어 용기에 담아서 정리해 두어도 나중에 보면 용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그곳엔 또다시 비닐이 쌓여있었다. 빈 통이 되어도 그 자리에 놔두고 다시 채우라고 해도 빈 통을 왜 넣어두냐고 하셨다. 무엇이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면 보기에도 좋았지만 어머니 손이 거치면 어느 순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꺼낸 대로 넣는 게 힘드냐고 물으면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하시니 어머니에겐 정리된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런 어머니도 나의 집에 오시면 잔소리를 하신다. 지인들은 깔끔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정리되어 있는 나의 집을 보고 병이라고 하는데 그런 나를 지적하는 어머니 집은 얼마나 깔끔할까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상상 밖의 어머니 부엌을 보고 내 집을 지적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저마다 자기 기준이 다른 거였다.

여행 당일 비어있는 나의 냉장고를 보시고 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지만 평소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지내다 보니 장기 보관이 가능한 것 위주로 구입했고 냉동이 힘든 채소를 구입하게 되면 며칠 동안 그것만 먹곤 했다. 커다란 양배추 한 통을 사면 쌈이나 겉절이, 피클 등으로 만들어서 다 먹곤 한다. 피클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다. 밑반찬은 아침에 소량씩 만들어 당일 소비가 기본이다. 그래서 나의 냉장고에는 반찬이 아닌 기본 재료가 들어있고 또한 최소한의 것을 준비해서 음식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반면 어머니는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엇이든 풍족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오시면 매번 음식으로 이견이 생겼다.

동생네 가족과 함께 오신 적이 있었는데 먼 길 오느라 입맛이 없을까 봐 팟타이를 만들었고 혹시 국물을 찾을까 봐 어묵탕을 끓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녁에 무슨 면이냐며 밥을 달라고 하셨다. 국물에 밥을 말아서 드시겠다면서 하필 제일 싫어하는 어묵이냐고 하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은 절대 만들어주지 않는 분이셨는데 우리에겐 어묵볶음을 그렇게도 자주 만들어 주셨다. 입맛이 바뀌셨나 보다 싶어 다른 국이라도 끓여드리려고 했지만 결국 어묵탕 국물에 밥을 말아서 드셨다.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외할머니는 딸들은 학교를 보내주지 않으셨단다. 어머니는 뒤늦게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가셨다. 외할머니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줄 장남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셨지만 결국 믿었던 장남에게 버림받았고 마지막엔 막내아들의 보살핌을 받다 돌아가셨다.

외가 쪽 친척들과 교류가 더 많았지만 난 솔직히 친가 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적당한 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난 항상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에만 있었다. 거기엔 아무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계셔서 눕지 못하고 있으면 할머니가 구석에 베개를 놓아주며 몸으로 막아 나를 눕게 해 주셨고 가끔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다. 나에겐 그런 작은 관심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오히려 가장 옛날 사람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여자라고 막 대하신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으셨단다. 그래서 어머니도 할머니를 좋아하셨다.

그런 그곳에서도 사건은 있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를 방에 눕혀놓고 어머니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큰집 언니가 벽장에서 가위를 꺼내다가 내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했다. 시골에서 쓰는 그 묵직한 쇠 가위는 내 얼굴로 떨어졌고 아기 얼굴이 피범벅이 되자 놀란 어머니는 나를 안고 읍내 병원으로 가셨단다. 내 얼굴엔 지금도 2cm가량의 흉터가 왼쪽 눈 아래에 남아있다. 아들의 다리 화상 흉터는 걱정해도 딸의 얼굴 흉터를 걱정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안고 뛰었다는 얘기를 듣고 흐뭇해하던 기억이 난다.

차별도 당연하고 의지라곤 없이 순응하기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던 날은 스무세 살 때였다. 사실은 반항도 아니었고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반항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슨 공식을 물어보았고 내가 모른다고 하자 자신을 무시한다며 격분하셨다. 방으로 돌아가서도 한참을 소리 지르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리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정말 몰라서 그렇다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냥 얘기하면 또 혼날까 봐 아버지 방으로 갔다. 그렇게 설명해 드리면 화가 누그러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무시한 딸이 자신의 방까지 쫓아와서 대들었다고 표현하셨고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에게 향하던 주먹은 어머니가 몸으로 막았고 대신 어머니의 피부가 찢어졌다. 피를 보고서야 간신히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딸에게 무시나 당하는 자신은 죽어야 한다며 제초제를 사 오셨고 안 드시던 술을 드시고 협박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그 약을 드시기도 전에 먼저 술에 취해 잠이 드셨다.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어쩜 차라리 아버지가 그 약을 드시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남편이 잘못될까 봐 불안해하셨고 폭력을 행사하던 남편을 위해 딸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셨다.

혼자 사는 이모네로 도망을 쳤지만 어찌 보면 쫓겨난 셈이었다. 남에게 위로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던 나는 이모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혼자서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이모네로 오셨다. 나도 놀라고 아버지도 놀랐다. 아버지는 내가 그곳에 있는 줄 모르고 나의 패륜 범죄에 대해서 하소연하러 오신 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방을 몰라 밤새 기다리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모를 밤새 앉혀놓고 술을 마셨다. 방이 하나뿐인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를 피해 주방에 숨어서 공포 속에 밤을 보내야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준다 싶으면 매일 같이 찾아갔고 그러다 상대가 싫은 티를 내면 자존심이 상했다며 격분해하셨다. 그 이후 이모도 아버지의 전화를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이모는 남동생을 양자로 정해놓은 터라 우리 부모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대하고 있었던 때였다. 혼자 살던 이모도 나와의 동거가 힘들었고 이모 집에서도 눈칫밥을 먹게 되어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사과하라는 어머니의 호출이 있기도 했다.

이모는 부모님을 챙기는 한편 동생에게는 용돈도 챙겨주고 가끔은 오빠를 챙기기는 했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친척에게조차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지만 그걸로 특별히 서운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모가 우리 가족에게 잘했으니 너도 보답해야 한다며 이모의 생일에 용돈을 보내라는 어머니의 요구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모가 동생에게 했듯이 나도 챙겨주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의지면 몰라도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모에게는 딱히 감정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그런 돌발 요구는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며느리의 생일에도 나에게 연락해서 축하해 주라고 하셨다. 보통은 반대가 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내가 나이도 더 많은데 왜 그래야 하냐고 했더니 둘이 무슨 문제가 있었냐고 하셨다. 우리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문제라고요! 어머니의 서열에서 딸은 며느리에게도 밀려났나 보다. 어머니 폰에 나는 그저 '딸'로 저장되어 있었지만 며느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며느리'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가도 어머니의 그런 무의식적인 차별은 때로 나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나는 적어도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종종 그 일을 언급하시며 천하의 나쁜 딸로 몰고 가셨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악마가 꿈틀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자주 안 보는 편이 모두에게 좋은 것 같은데도 어머니는 자꾸만 오라고 요구하셨다. 나도 무서웠다. 그때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면 쉽게 무너지곤 했다. 유리 멘털이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일은 아무리 가벼운 일이라고 해도 쉽게 대응하지 못했고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그 충격은 천천히 크게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그래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으면 그만큼 회복이 쉬웠다. 그래서 매사 부정적인 성격이 되었는지 몰라도 쇼크로 쓰러지는 일은 줄일 수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미리 생각하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계획에 없던 일을 겪어도 툭툭 털어내 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를 놓쳐도 위약금을 물고 바꾸면 그뿐이라는 그들은 회복 탄력성이 좋은 반면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가 잘못했는지 먼저 곱씹어 보느라 항변할 기회조차 놓치곤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아버지가 또 그러면 경찰에 신고해야지! 그러나 아무리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경찰이 와도 어머니가 먼저 돌려보낼 것이 뻔했고 아버지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실 테니 경찰에 신고한 딸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명문대생 부모 살해사건

이○○은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가정 폭력 피해자이며, 동시에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 낸 살인자이다. 부모의 가부장적 양육 태도에 의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으며 이 사건은 가정환경의 중요성과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아동 학대의 대물림을 세상에 알렸다.

2000년 5월 24일 오전 7시 과천 중앙공원. 쓰레기를 수거하던 환경미화원에 의해 쓰레기봉투 안에 사람의 발목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출동한 경찰은 쓰레기 수거장에 있던 모든 쓰레기봉투를 열어 하나씩 확인하여 왼쪽 손, 왼쪽 발, 왼쪽 대퇴부와 성인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오른쪽 발과 몸통과 대퇴부를 수거하였다.

발견된 시신을 근거로 피해자인 모친 (50세)과 부친 (59세) 부부의 차남 이○○ (李垠錫 • 당시 24세 • K대 산업공학과 2학년 휴학)이 2000년 5월 21일 새벽 양주를 마신 상태에서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 주공 4단지 자신의 집에서 모친을 망치로 살해하고 약 4시간 후 부친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후 이틀에 걸쳐 시신을 토막 내 규격 쓰레기봉투와 쇼핑 봉투에 넣어 집 근처 중앙공원 쓰레기통, 과천시 별양동에 소재한 과천중앙고등학교 앞 홍촌 천변, 과천 경마장 부근과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P호텔 쓰레기장 등 10여 곳에 유기하였다가 5월 25일 경찰의 가택 수사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사건 직후 경찰서 진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며 울먹이면서 “멸시와 형제간 차별하는 부모를 내 인생의 방해자라고 생각하여 범행했다.”라고 말하고서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존속 살해를 상대로 삼은 재판부의 판결이 무기징역으로 약간 느슨히 이루어진 데는 이○○이 자라 온 가정환경의 특수성, 그 사람의 부모가 양육 과정에서 보인 무관심 내지 히스테릭한 가정 폭력이 감안되어 있었다. 이○○의 부친은 전형이 될 만한 군인으로서 가정에는 무심했고 모친은 이○○과 이○○의 형을 어린 시절부터 스파르타식의 엄한 가정교육으로 길러 왔다. (이○○의 일기에서 발견된 부모의 강압스러운 교육 방식 중에는 이○○이 유치원생이던 시절에 신발끈을 제대로 못 묶는다고 때렸다거나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밥을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집어던져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는 것도 있었음) 이○○의 모친은 본인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독재자가 되고 싶어 했으나 여자라서 그 비뚤어진 꿈을 이루지 못했으며 차선책으로 제2의 육영수가 되기 위해 장교와 결혼했으나 정작 남편 역시 육군 장교가 아니라 해병대 장교인 탓에 군사반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남편은 중령으로 제대했기 때문에 출세는커녕 최소한의 생계유지만 가능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래서 아들인 이○○에게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라고 강요했으나 이○○은 이를 거절하고 K대학교에 진학했다. 이 탓에 이○○의 모친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을 학대했으며 이○○이 공군 복무 중이던 기간에는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부 관계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이○○의 형은 중학교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친구의 부모가 같은 방을 쓰는 것에 충격받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의 부모는 이미 이○○의 형이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각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이○○의 부친과 모친도 그 부모에게서 비슷하게 양육받으면서 자라 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의 부친도 그 사람의 부친(즉 이○○의 조부)에게서 형과 차별받으면서 자라났고 해병대 장교로서 자수성가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의 모친도 그 자신의 모친(즉 이○○의 외조모)에게서 강압스럽게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소설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이○○의) 외조모에게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명문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였던 이○○의 부친과 혼인한 것도 본인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거나 장교인 남편이 전 대통령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군인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치에 입문해 독재자가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영부인이 되기를 바란 점도 있었지만, 남편이 일찍 전역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자 남편에게는 미련을 끊고 아들들의 출세에 매달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의 형은 이○○의 범행을 전해 듣고 "그럴 수도 있다. 나는 동생을 이해한다."라며 이○○을 두둔하는 내용을 발언하는 바람에 공범 의혹이 일었지만 공범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정 진술에서 이○○의 형은 동생이 물론 용납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부모가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갖는 만큼의 애정만 우리에게 줬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이○○을 변론하였다. 이○○의 형은 일찍부터 이○○과는 달리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독립해 집을 나간 상태였고 어려서부터 자신의 부모와 가정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으며 부모의 강압스러운 교육 방식에 계속해 반항하고 싸우는 등, 이○○과는 반대되는 과격한 성격을 소유했다고 알려졌다.

재판
2000년 12월 1일 수원지방법원 형사 11 부장판사 백춘기는 1심에서 "피고인의 범행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뿐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족 간의 신뢰를 무참히 짓밟는 것으로서 그 행위의 위험성과 사회적 악영향이 인간 범죄사에 기록될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며 "피고인에게 가장 엄중한 책임을 추궁함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는 판단에서 법이 허용하는 최고형을 선고한다"며 "피고인의 부모가 다소 매정하게 교육시켜 왔던 것으로 보이나 피고인에 대한 꾸준한 지원과 사랑을 간직해 온 사정 등에 비춰볼 때 피고인에게 일방적인 학대만을 일삼던 비정상적인 부모라거나 최고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고 현역병으로 군 복무까지 마친 피고인의 입장에서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을 지녔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속살인과 사체 유기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이 선처를 탄원하고 “이 씨의 범행은 모든 사람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부도덕한 것이지만 정신감정, 심리분석 결과와 성장 과정 등을 종합해 보면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감 피해의식 등으로 인해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점이 인정된다”는 서울고등법원 형사 4 부장판사 박국수에 의해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은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나도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나쁜 마음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현실에선 대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집을 지을 때 3층에는 내가 살고 2층엔 부모님이 살기로 했었다. 내가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기억에 남으셨는지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라는 아버지의 뜻도 담겨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으려 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씁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반항이었던 그날 그렇게 쫓겨나고 집이 완성되자 3층은 남에게 전세를 줬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곤 했었다. 차라리 후회라도 하게 제발 돌아가시길 빌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서로 토닥이며 그렇게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혼자서는 집안일이 힘든 아버지는 만만한 누군가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을까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람은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고 한다. 하지만 난 위험에 처하면 지금보다 가장 최악의 순간을 기억해 내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나은 상황이니 괜찮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한 위로 같은 거였지만 그래서 습관적인 나의 무의식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도 기억해 내곤 했다.

솔직히 나에겐 기억해 낼 행복한 순간이 별로 없었다. 반려견 몽이와의 만남이 유일했지만 그 또한 떠나보낸 아픈 기억만 남아버렸다. 잘 극복해 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홀로 살다 홀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로 발견되기는 싫었던 나는, 생존 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주변에 부탁해 두었다.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수도 있었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의지로 결정하고 싶었던 나는 최소한 치매는 걸리지 말았으면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과도한 배려에서였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싫었지만 어쩜 나를 위해서는 차라리 기억을 잃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모든 걱정은 잊고 그냥 잊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치매라는 것이 최근의 기억부터 지워진다고 했다. 이제야 모든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났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셈이다. 간신히 벗어난 과거 속에 갇혀 살게 된다면 그것만큼 엄청난 공포가 어디 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히 과거의 그 어느 날에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일들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공포였다. 다시 산다고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따위는 발명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보았던 영화 '나비 효과'처럼,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반드시 비극이 되는 존재가 된다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주인공의 그 마음처럼, 나 또한 태아로 돌아가 나의 목에 탯줄을 감아버리는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는 나 하나가 사라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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