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1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by 안녕
존엄하게 죽을 권리,
DIGNITAS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길 바랄 뿐이다.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나에게 욕심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나에게도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던 때도 있었다. 나만의 가족을 만들고 싶었고 내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 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면서 나도 상황에 따라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감이 사라지자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 결국 그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번 생에서는 나 하나만 무사히 잘 살아내 보기로 했다.




어릴 때 난 유난히 코피를 많이 쏟았다. 한번 시작되면 수건 하나를 가득 적시곤 했다. 목으로 넘어가던 뜨끈한 피가 응고되면서 커다란 핏덩어리를 토해내기도 했다. 주변은 어느새 사건 현장처럼 피바다가 되기 일쑤였지만 나는 그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 손은 약손' 같은 건 해주지 않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런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어머니가 내 옆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아프거나 다치면 야단부터 치셨고 아무리 아파도 결석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죽더라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지혈이 안되면 학교를 가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하신 셈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순간만큼은 좋았다. 하지만 반면에 야단맞는 것이 싫어서 아픈 것을 숨기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정문에는 두 개의 나무가 좌우로 심어져 있었다. 시멘트 바닥 위에 흙을 쌓아 나무를 심은 탓에 그 나무를 둘러싼 사각 난간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등교를 하는 날이 아니었고 집 밖에 나가지도 않던 내가 그날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아이가 그 난간에 앉아 난간을 잡고 몸을 뒤로 젖히며 놀고 있었는데 호기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나도 그날따라 처음 그 난간에 올라가 앉게 되었다. 그날 처음 본 그 아이는 나에게 자기를 따라서 한번 해보라고 했고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나는 그 아이처럼 난간을 잡고 몸을 뒤로 젖히고 말았다. 팔힘이 없지는 않았는데도 요령이 없었던 탓인지 손이 미끄러지며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잠시 정신을 잃고 깨어보니 옆에 앉아있던 그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화단을 보고 큰일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만큼은 야단을 맞더라도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통수를 감싸 쥐자 통증이 몰려왔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집에 가는 내내 겁에 질려 있었지만 어머니가 집에 없을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집에 계셨지만 피투성이로 나타난 나를 보고 놀라셨고 또 어디서 다쳤냐며 야단부터 치셨다. 누가 그랬냐며 다그치셨지만 혼자 넘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셨는데 걸어가는 내내 그다음에 벌어질 일이 두려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찢어진 상처는 열 바늘을 꿰매고 수습했다. 나중에 떨어진 딱지의 길이를 재 보니 10cm가 넘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이었다. 발목이 삐끗했는지 부어올랐고 참으면 낫겠지 싶어 사흘을 버티다가 통증이 심해져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병원에 가니 뼈에 금이 갔고 일부 뼈 조각이 뜯겨 나가 있다고 했다. 수술은 포기하고 깁스를 했다. 병원에선 깁스하는 동안 다리를 쓰면 안 된다며 목발을 주지 않았다. 학교를 가야 했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등교했지만 그때 이미 키가 160cm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발에 비닐을 감아서 절뚝이면서 혼자 등교를 했다. 석 달 후 다시 병원에 갔을 때는 그 병원이 사라져 버려 나은 건지 확인을 하지 못했다. 계속 걸어 다닌 셈이라 제대로 나았을지 불안하긴 했지만 빨리 깁스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나는 마당에 앉아서 혼자 석고를 부수기로 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깁스에서 해방되었을 때는 이미 밤이 되어있었고 온몸은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기쁨보다도 몹시 추웠던 기억만이 남았다.

그 후 얼어붙은 집 마당에서 미끄러져 팔을 다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난 아픈 걸 숨겼다. 그날 밤 엄청난 통증에 결국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깨웠다. 하지만 병원은 아침에 가야 한다고 해서 아침까지 그 고통과 싸웠다. 하지만 새벽 내내 끙끙대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고 날이 밝자마자 어머니는 병원 대신 어느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접골을 하는 곳 같았는데 거기서 뚝딱하고 팔을 끼워 맞춰주었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신경통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커서 병원에 가봤지만 뼈를 맞추면서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며 딱히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유난히도 나를 많이 따라다녔다. 오래도록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잠이 드는 순간부터 몸은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마다 알 수 없는 통증과 미열로 고생하다 간신히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직장 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그걸로 괜찮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니 이 또한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 두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상관 없어졌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배란통, 생리통 같은 통증에 대해서는 굉장히 너그러워졌다. 무한 반복되는 통증이어도 규칙적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예민하지만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포기가 빨랐다. 그렇게 본능적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몸에는 각종 염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컨디션이 가장 좋았을 때는 입원했을 때였다. 항생제나 진통제가 투여되는 동안에는 기존의 통증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을 찾아가는 경우는 정말 기나긴 시간을 고통받은 후였지만 진료받을 때 증상이 없으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면역력 문제라고 했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잘 먹고 잘 쉬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먹고 놀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잘 쉬어야 하는지 항변도 해보지만 답은 없었다. 참고 참다 간신히 병원에 갔는데도 답이 없으니 포기하는 일이 늘어갔다.

의사들은 본인의 전공 분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으면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고 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병원에만 가면 무슨 병인지 원인을 찾아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복부 통증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통증 중의 하나였다. 일 년에 한두 번 생기던 장염은 발생 주기가 점점 짧아졌고 웬만한 설사로는 병원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내 배에는 손으로 만져지는 덩어리들이 있었는데 검사해 볼 여력이 없던 나는 오랫동안 참기만 했다. 하지만 은근한 통증은 나의 삶을 흔들고 있었고 결국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먼저 대장 내시경을 해보기로 하고 사당동에 있는 대장 항문 전문 병원에 예약을 했다. 전날 새벽까지 장을 비우고 예약 당일 검사받으러 갔다.

대장 내시경이 끝나고 나를 억지로 깨워서 끌다시피 데리고 간 회복실은 칸막이가 있는 개별 침대가 아니었다. 1인용 리클라이너 수십 개가 놓여있는 넓은 공간에 환자들이 나란히 앉아서 마취가 완전히 깨길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붕~ 하고 가스를 내뿜는 소리가 들렸고 가스까지 빼낸 사람은 그 방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도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고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간호사가 나를 데리고 진료실로 안내했다. 용종 몇 개를 제거했는데 우연히도 아픈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관상 선종으로 10년쯤 잘 키우면 악성 종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란다. 하지만 통증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고 일 년 후 다시 확인하겠다고만 했다. 나의 첫 번째 대장 내시경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다시 복도로 나가니 간호사가 여전히 몽롱한 나에게 내시경 이후의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시경을 위해 집어넣은 공기를 빼내지 못한 채 마취가 완전히 풀려버리자 복부의 압박은 기존의 통증에 더해져 엄청난 고통으로 이어졌다. 병원 복도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회복실로 다시 옮겨졌다. 가스는 복부를 압박했고 그 압박은 다시 통증으로 이어졌다. 회복실 한편에 놓인 침대에 바로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있으니 담당의사가 왔고 천공일 수도 있으니 일단 입원을 해서 지켜보자고 했다. 하지만 내시경을 받다가 입원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원인 찾기에 한참 노력하던 때였지만 그런 비용은 아깝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자연스레 가스가 나왔고 부풀었던 배가 가라앉자 압박하던 통증도 사라졌다. 그런데 용종 몇 개를 제거하고 나니 오래도록 따라다니던 그 복통이 함께 사라졌다. 무의식적으로 찡그리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세상이 환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복통의 원인이 아무 상관없는 용종 탓이라 믿기로 했다. 하지만 6개월쯤 지나자 그 통증은 다시 돌아왔다.

학창 시절 화장실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던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참았던 습관 덕에 항문이 불룩 솟아있었는데 의사는 치핵이라고 했다. 어쩌다 항문이 찢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하루에 한 번 쾌변을 하고 있어서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했던 의사는 자기 분야인 항문의 치핵을 보고 수술하자고 했지만 문제가 없던 나는 수술을 거부했다.

몇 달 후 아프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항문 부근이니 치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통증이 심해지면서 밤잠을 방해했고 급기야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열흘쯤 버티다 두 손 들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는 이 정도의 치핵이나 치열로 그런 통증이 생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술을 반겼다.

진통제로 버티다 며칠 후 수술을 받았다. 하반신만 감각이 없어지는 척추 마취를 했지만 뱃속은 마취가 되지 않으니 내 장기가 모두 항문으로 꺼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혹시 하반신 마비가 되는 사고를 겪게 되더라도 이 통증은 사라지지 않겠구나 싶었다. 수술시간 내내 배의 통증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30분이면 끝난다던 그 수술은 50분이 지나서야 마무리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직장 안까지 확인해 보겠다고 했고 얼마 후 의사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환자의 입장에서 의사의 당황한 듯한 탄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때 알았다.

"아, 이게 뭐지!"

직장이 괴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고름이 가득 차 있다고. 그래서 다시 추가 마취 후, 수술은 이어졌다. 통증과 열의 원인은 장 괴사였다. 물론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증상이 있으니 수술로 치료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이틀은 금식이었다. 링거액은 온몸을 붓게 했고 하루 만에 얼굴과 온몸이 퉁퉁 부어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평소에도 수분 섭취가 늘어나면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힘들었다. 링거를 줄여달라 요청했지만 안된다며 대신 많이 움직이라고 했다. 배변을 하면 수술 부위가 아물기도 전에 감염될 수 있어서 최대한 늦추어야 했지만 금식 중이었음에도 수술한 지 하루 만에 장을 비우게 되었다.

3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던 그 수술은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3주간이나 이어졌다. 3일 병가를 신청했던 나는 일주일 만에 간신히 퇴원했다. 하지만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고 통증이 사라지면 퇴원했지만 다시 실려가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끝내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일 년 후 다시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해서 두렵기는 했지만 복통이 일시적으로라도 사라졌던 경험이 조금은 힘이 되었다. 검사 전후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무사히 끝냈다. 괴사 되었던 부분은 잘 아물었지만 10cm 정도 기다란 흉터가 남아있었다. 이번 내시경에서도 용종을 제거했지만 암과 관련된 용종은 없었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단다. 하지만 나에겐 대장 내시경 검사가 더 힘들고 아팠다. 게다가 이번에는 일시적으로라도 복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일 듯 말듯한 용종을 매년 제거하느라 고생할 바에는 차라리 한 번에 몰아서 제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인생이 바닥이어도 암은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확신도 있었다. 10년은 버티자.

평소에도 통증이 시작되면 배가 부어올랐고 그 압박으로 통증은 더 심해졌다. 관공서에 갔다가 임산부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잠시 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대로 돌아왔고 아직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던 때라 날씬해진 모습으로 다시 가서 오해를 풀기도 했다.

회복하고 일 년이 지나자 항문 부근이 부풀어 올랐다. 피부를 뚫고 무언가 올라 오르는 듯 항문 주변은 거대한 화산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마냥 참았고 그날 밤엔 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업무가 많아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오후쯤 엄청난 통증에 소리를 지르며 병원으로 실려갔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처가 터져버렸다. 그 순간 내 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마치 마그마가 분출된 화산 같았다. 몸속의 고름이 피부를 밀어내자 피부는 부풀어 올랐고 부풀어 오르는 속도를 못 이긴 피부는 이내 찢어지며 터지고 말았다. 항문 주변에는 수십 개의 길이 원형으로 뻗어있었다.

처음엔 급성 농양이라고 했지만 치루란다.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치핵, 치열과는 달리 '치루'는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항문샘을 따라 염증이 차오르면서 피부를 뚫고 나오는 병이었다. 피부를 찢어 구멍을 내고 통로를 만들어 주면 일시적으로 통증은 참을 수 있지만 만약 뚫어놓은 피부가 막히면 이와 같은 고통이 무한 반복된다고 했다. 수술 외의 치료는 없다고 해서 겁이 났지만 수술은 거부했다. 이미 상처는 터졌으니 고통은 없었고 수술이 간단히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의사는 마취 없이 상처 부위를 더 찢어냈고 거즈를 꽂아 통로를 만들었다. 거즈에 진물이 흡수되면 거즈를 교체하면 되었고 무엇보다 피부가 아물지 않게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 후 큰 수술을 받으면서 사용한 항생제로 인해 피부가 말끔히 아물어 버렸다. 진통제와 항생제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어느 정도 회복되고 비행기를 타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호주로 요양을 하러 갔는데 거기서 그 지옥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40시간 내에 피부가 터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시간을 버티기는 너무 힘들었다. 마취 없이 찢었던 경험도 있었고, 찢어지는 고통보다 찢는 고통이 덜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날 밤 난 소독한 손톱 가위로 부풀어 오르는 피부를 찢었다. 의학은 과학이 아니었다. 수술 도구도 사실은 집도의가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만든 공구에 불과했다. 화산처럼 분출되는 진물이 흘러나오고 드디어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는 구멍이 막히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피부는 다시 막혔고 결국 수술을 받아야 했다.

치루 수술은 더 간단한 거라 3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때에 퇴원하지 못했다. 수술 다음날 회진 때 상처가 잘 아물고 있으니 예정대로 다음날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중엔 추워서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웠다. 간호사가 와서 체온을 쟀지만 정상이라고 했고 내가 이불을 덮고 있어서 더운 거라며 그냥 가버렸다. 퇴근 전에 의사가 들렀다. 예전 수술 때 유난히 예민했던 환자라 신경이 쓰여서 다시 와봤다고 했다.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이불을 들추다가 열기를 느꼈고 몸을 만져보더니 왜 이렇게 뜨겁냐고 했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간호사는 정상이라고 했다니까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여전히 체온이 정상이라고 했고 의사는 환자 몸이 이렇게 불덩이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다시 체온을 잴 것을 요구했다. 37.5도였다. 평소 체온이 36.5도에 미치지 못했던 나에겐 미열이었다. 그제야 의사는 해열제 처방을 하면서 하루 더 지켜보자고 했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지만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3일이면 퇴원한다던 이번 수술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퇴원하지 못했다.

퇴원하면서도 겁이 났고 의사는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이상한 두통이 왔다. 왼쪽 머리를 강타하는 듯한 찌르는 통증이 번개 쳤고 그 통증의 반동으로 머리가 옆으로 젖히게 되는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참아보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곧 명절 연휴가 다가오고 있어 더 겁이 났다. 의사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타이레놀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입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과에 가보라고 했다. 동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으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수술 직후라는 얘기를 들은 의사는 심리적인 요인일 거라는 애매한 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 통증을 받아들였다.

내 몸은 유난히도 염증으로 인한 문제가 많았다. 두드러기 발진은 자주 생겼지만 약을 먹으면 금방 가라앉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엔 너무 자주 발병하니 병원에 안 가고 버티는 날이 늘어갔는데 약을 먹지 않아도 하루 이틀이면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발병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게다가 서너 달 만에 한 번씩 발병하던 주기도 점점 짧아지더니 일주일 만에 다시 발병하기도 했다. 모기에 물린 작은 상처는 염증이 되었고 몇 달 동안 덧나기를 반복하다 겨울이 되어서 가라앉았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면 흔적도 없던 곳이 함께 가려웠다. 그래서 벌레에 물리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여름에도 긴팔과 긴바지는 필수였고 집에서도 모기 퇴치에 유난을 떨었다. 아주 더웠던 여름날, 유난히도 모기가 많았던 산티아고 가는 길의 어느 알베르게에서 모기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두꺼운 겨울용 침낭 속에서 땀을 흘리며 잠을 잤던 적도 있었다. 그날은 아주 더웠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본능이 되었다. 그러던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베드 버그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정말 모든 게 지옥처럼 끔찍했다.

이 모든 게 면역 문제라고 했다. 몸의 여기저기에서 각각의 이름으로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사실은 면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자가면역 질환은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완치가 불가능하고, 증상이 있으면 증상에 대한 치료만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어디 부러지거나 꿰맬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병원은 가지 않게 되었다. 통증이 있으면 진통제, 열이 있으면 해열제로 버티며 몇 년째 병원에 가지 않으니 매달 내야 하는 지역 건강보험료는 부담이었고 아깝기만 했다.




자가면역 질환(autoimmune diseasse)

자가면역 질환은 세균, 바이러스, 이물질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입니다. 자가면역은 인체의 모든 장기와 조직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증상이 주로 나타나는 곳은 갑상선, 췌장, 부신 등의 내분비 기관, 적혈구, 결체 조직인 피부, 근육, 관절 등이 있습니다. 면역세포들이 우리 몸의 어느 부위를 공격하는가에 따라 증상과 질병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전신의 모든 세포가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고(루푸스), 특정 장기의 세포만 파괴하기도 합니다(자가면역성 갑상선 질환, 제1형 당뇨병 등). 또 류머티스 관절염처럼 특정 장기 또는 전신을 그때그때 선택적으로 침범하기도 합니다. 100여 가지 정도의 질병이 있습니다.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에 비해 4배 정도 많습니다. 유럽과 북미주의 경우 전체 인구의 5%가 이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주로 20~50세에 발병합니다.

자가면역 질환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건강을 자극하는 생활습관, 남녀노소의 발병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호르몬의 영향이 있습니다. 또한 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후에 이 질환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스트레스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가면역 질환의 증상은 침범된 부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자가면역 질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만성 피로, 미열, 탈모, 피부 질환, 안구 증상, 수면 장애, 관절과 근육 이상, 체중 변화, 우울증, 감각 이상, 기억력 감퇴, 식욕 변화, 소화 장애 등이 대표적입니다.

자가면역 질환을 진단하기 위해 병력 청취, 신체검사, 피검사, 방사선 검사 등을 시행합니다. 환자에게 증상과 기간을 확인하며 가족 중에 비슷한 질환이 있었는지 묻습니다. 환자의 객관적인 징후를 찾는 과정으로 관절이나 임파선이 부었는지, 피부색의 변화는 없었는지 확인합니다. 루푸스나 관절염 환자들은 혈중에 자가항체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환자라도 누구나 자가항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가면역 질환이 없어도 항체가 양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피검사만으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 증상과 자가항체가 같이 있다면 진단에 도움이 됩니다.

자가면역 질환은 종류와 증상이 다양한 만큼 치료 방법도 각기 다릅니다. 치료는 병의 종류, 심각도, 증상에 따라 결정합니다. 일반적인 치료 목표는 증상 완화, 기능 보존, 병의 발생 기전 차단입니다. 스테로이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 면역 억제제 등으로 치료합니다. 그러나 장기 복용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관절에 염증 생기는 '류머티스 관절염'
류머티스 관절염은 관절을 둘러싸는 활액막에 염증이 생긴 질환으로 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다. 류머티스 관절염은 다발성 관절염을 특징으로 하는 원인 불명의 만성 염증성 질환이다. 초기에는 관절을 싸고 있는 활막에 염증이 발생하지만 점차 주위의 연골과 뼈로 염증이 퍼져 관절의 파괴와 변형을 초래하게 된다. 관절뿐만 아니라 관절 외 증상으로 빈혈, 건조 증후군, 피하 결절, 폐섬유화증, 혈관염, 피부 궤양 등 전신을 침범할 수 있는 질환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 관절 안에 있는 활막에 염증이 생기면서 혈액 내의 백혈구들이 관절로 모여들게 되고, 그 결과 관절액이 증가하여 관절이 부으면서 통증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염증이 지속되면 염증성 활막 조직들이 점차 자라나면서 뼈와 연골을 파고들어 관절의 모양이 변형되고, 관절을 움직이는 데 장애가 발생한다. 류머티스 관절염은 전형적으로 초기부터 손가락, 손목, 발가락 관절 등이 주로 침범되며, 병이 진행함에 따라 팔꿈치 관절, 어깨관절, 발목관절, 무릎관절 등도 침범된다. 이러한 관절에 통증, 뻣뻣함, 종창(염증이나 종양 등으로 인하여 부어오른 것) 등의 증상이 수 주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

구강·안구건조 유발하는 '쇼그렌 증후군'
쇼그렌 증후군은 여성에게 잘 나타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세포가 침샘이나 눈물샘 등을 공격해 염증을 유발하고 조직을 파괴한다. 대표적인 증상은 구강건조와 안구건조이다. 특히 입이 잘 말라 음식을 먹기 불편해지고 충치·치주염 등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살균효과가 있는 침이 너무 적게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질 분비물 감소로 인한 질염·말초신경장애로 인한 손발 통증 등을 겪을 수 있다. 쇼그렌 증후군은 완치가 안 되므로 평소 생활습관을 통해 증상을 완화해야 한다. 평소 입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물을 충분히 마셔야 한다. 침 분비를 늘리는 레몬·과일주스 등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 식후에는 반드시 양치를 하고 흡연을 피해야 한다. 항우울제·혈압약·수면제 등은 입과 눈을 건조하게 할 수 있으므로 복용 전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장내 정상 조직 공격하는 '크론병'
크론병은 염증성 장질환의 한 종류로 입부터 항문에 이르는 소화기 전체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마찬가지로 면역세포가 장내 정상적인 세균과 조직을 병원균으로 인식해 공격하는 게 원인이다. 크론병이 있으면 갑자기 극심한 복통이 생기고 설사를 자주 한다. 이외에도 식욕 감퇴·피부염·항문질환 등을 겪을 수 있다. 크론병은 완치가 어려우나 평소 식습관을 조절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평소 술·커피·기름진 음식·유제품·섬유소 등 장을 자극하는 음식을 적게 먹는 게 좋다. 증상이 심하면 염증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기도 한다.




밤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열과 싸워야 했고 아침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의 통증과 싸워야 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이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어느 순간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는 게 보였고 살이 빠져 헐렁하던 반지가 관절에 걸려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은 반지를 끼지 못하게 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은 인자가 있어도 관절의 변형이 심하지 않으면 진단을 내리지 않는단다. 조기에 병원을 찾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입안의 열감으로 인해 한겨울에도 얼음을 물고 있어야 했지만 반면 샤워하고 나서 바로 따뜻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발톱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손 저림은 단순한 저림에서 끝나지 않고 뻐근한 통증으로 이어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몇 년 동안은 충분히 자고 일어나도 극심한 피로와 함께 몸이 힘들었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점차 나아졌다. 대신 숨 쉬기가 힘들어 계단 운동은 포기하고 걷기를 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뻐근해질 때도 있고 답답했다. 예전에는 진열장 불빛에 노출되면 얼굴이 시뻘겋게 불타올랐고 식은땀을 흘리다 못해 두통으로 이어졌는데 어느 순간 햇볕에도 발진이 생겨 흉터로 남기도 했다. 집에서는 주로 창가에 앉아있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뜨거워져서 나중엔 두통으로 고생했다.

혓바닥엔 수시로 염증이 생겼고 입안도 마찬가지였다. 빈혈이 있지만 애매한 경계치라 빈혈약은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다. 비싼 빈혈약을 처방받아먹어도 부작용만 생길 뿐 나아지지 않아 포기했다. 소변검사에선 단백뇨가 검출되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거라고 했다. 당뇨 검사는 경계치라 공복혈당 장애라고 했다. 허리 수치를 제외한 대사증후군으로 보건소에서 관리를 받고 있지만 스스로도 관리하고 있어서 더 이상 노력할 부분은 없었다.

지금도 복부의 통증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소리 지를 정도의 통증이 아님에도 밤낮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다 보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최소한 인간답게 살고 싶었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만약 내가 군인이 되었더라면 지금쯤 해외파병을 자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군인으로 포장된 채 말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좋아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은 나에게 곧 욕심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만 않아도 살 것 같았다. 더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을 줄 알았지만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스위스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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