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2

감사하며 살던 삶이 어느 순간 절망이 되었다.

by 안녕
헛된 희망, 더 큰 좌절




나는 종교가 없었다. 성당에 딸린 유치원을 다닐 때에도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성당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나에게도 종교를 권유하셨고 성당이든 교회든 다녀보고 선택하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개신교였던 한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자고 해서 한번 따라갔는데 엄청나게 컸던 그 교회는 정신없는 예배 시간이 너무 무서웠고 힘들었다. 또 다른 친구를 따라간 교회는 작은 교회였는데 나름 조용해서 몇 번을 더 따라다녔다. 그러다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성당의 그 엄숙함이 너무 좋아 계속 다니게 되었다.

신앙이 무언 지는 몰랐지만 종교만큼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어쩜 익숙한 그 무언가에 이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향한 끝없는 원망과 때로는 자책을 하며 살아왔지만 그곳에서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수녀님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레 성소 모임에도 나가게 되었다. 물론 사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관학교에 이어 2차 탈출 기회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성당에 다니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무언가 거슬리기만 하면 화를 내셨고 미사에 가는 것도 못마땅해하셨다. 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선뜻 꺼낼 수 없었고 그저 기회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을 했던 어머니는 아들도 아닌 딸 하나 정도는 수녀로 보낼 마음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머니에게조차 얘기하지 못했고 그대로 성인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서울에 왔을 때 가장 필요했던 것이 친구였다. 사람이 그리웠던 나는 서울에 온 지 석 달째 되어서야 성당에 가서 단체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먼저 말이라도 걸어오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예전의 나였다면 대단한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상당히 호의적이지만 성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다.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영광송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일주일 후, 다시 성당에 갔다.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시간 내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나는 미사가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오늘도 이렇게 가버리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저 안 잡으시면 다시는 안 올지도 몰라요!'

그렇게 협박을 하기도 하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그분은 나에게 아무도 보내주지 않으셨다. 미사가 끝나고 30분쯤 지나자 성당 안은 텅 비어 버렸다. 마지막 정리를 하시던 수녀님들마저 떠나자 그만 포기해야 했고 아무도 없는 그곳을 나와야 했다. 성당 마당에도 이미 사람은 없었다. 텅 빈 마당을 지나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왔어요?"

본당 주임 신부님이셨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신부님이 나를 불러 세웠고 나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었다. 나의 얘기를 들은 신부님은 마침 어느 청년 단체에서 사람을 뽑고 있다며 안내해 주셨다. 신부님이 미사가 끝나고 그렇게 오래도록 성당 마당에 계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내가 보였고 그래서 내가 나오기를 한없이 기다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위엄 있는 신부님은 그렇게 또 다른 인연으로 다가왔다.

가까스로 서울에서의 단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평범했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에서 모습을 비치는 유명한 인사가 되어있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친구 하나는 성직자의 길로 갔다. 그 후로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성당에서 위안을 받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갔다.




서울에서의 첫 직장은 공식적으로는 주 6일 근무였지만 전시회 일정이 잡히면 주말에도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럴 때는 전시회가 끝나고 평일 하루를 쉬게 해주기는 했지만 남들 일하는 평일에 쉬게 되니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직장인에게는 3년마다 이직의 고비가 온다고 한다. 3년째는 무사히 넘겼지만 6년째엔 나에게도 그 고비가 왔다. 해외 전시 때는 큐레이터로서 함께 나갈 수 있다고 했지만 IMF로 인해 모든 해외 전시 일정은 축소되었고 출국 전까지 모든 준비 과정에는 참여하지만 관장님 혼자서 출국하는 상황이 6년째 반복되고 있었다. 해외여행 대신 은근히 기대했던 출장의 기회가 나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는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고 싶었고 남들 쉴 때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직장을 쉽게 옮길 수는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유명인이 고객이었던 그곳에서는 유혹도 꽤 많았다.

그때 동창으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았다. 음악 관련 회사였고 일본어 가사 텍스트 작업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은 부담이었고 모험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새로운 변화에 겁이 났던 나는 두세 달을 고민하게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좋은 추억도 많은 곳이지만 아픈 기억도 남아있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직을 하면서 정든 그곳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후의 내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울에서의 두 번째 직장은 주 6일 근무에서 곧 주 5일 근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솔깃한 얘기도 있었지만 현실은 수당 없이 휴일에도 일해야 했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철야도 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상사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시작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그 일들은 또 다른 학대가 되어 내 삶은 망가지고 있었지만 지속적인 그 일들은 오랜 기간 나를 무디게 만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어젯밤 꿈에 내가 나왔었다며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성직자의 길로 간 뒤로 쉽게 연락할 수 없었던 그 친구의 연락은 뜻밖이었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친구는 말없이 그냥 다 들어주었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 이후로도 삶을 정리하는 시점에는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 얘기를 꺼내며 그들보다는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겠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내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고 끝없는 원망 속에서만 살았다. 그러자 억지로라도 '감사하기'를 해보라고 권했다.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의미 없고 영혼 없는 감사하기를 하던 어느 날, 나에게도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면서 직장이 있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사소한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하자 정말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하던 그 '감사하기'가 진심으로 다가왔다.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와 밥을 맛있게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어느 가족이 나왔다.

"아, 너무 행복해! 오늘 같은 날이 매일 있었으면 좋겠어."

그 순간 난 어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맞아, 저런 게 감사한 거지!'

김치에 밥을 먹는 게 왜 감사하지? 이 정도도 못 먹으면 그건 말도 안 되지.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이라고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쩜 그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해외로 여행 다니는데 고작 끼니 해결했다고 감사하다니! 이 삶이 왜 감사하지?'

그 순간 모든 게 절망이 되었다. 내가 감사하며 살던 그 삶은 보통의 사람들은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삶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무너졌다.

누군가 그랬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울어본 적이 있냐고? 평소에 웃으면서 즐겨보던 방송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방송을 보고 울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그 후로는 겁이 나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재미있고 유쾌한 방송을 보고 어떻게 울 수가 있는지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울고 있었다. 개그맨들의 몸짓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웃어야 할 것을 보고 울게 된 나는 그 후로 더 이상 그런 방송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다시 울게 될까 봐 지금까지도 그런 방송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게 되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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