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3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보고 위안을 삼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작은 존재
나는 그동안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었던 것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집이 필요했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돈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 도움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틴 거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참고 살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쯤은 나를 되돌아보았어야 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더 이상 나에게 돈은 필요 없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직장 생활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많은 일들 중, 해외 봉사 활동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긴 시간이 필요했던 해외 봉사 활동은 직장인으로서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급 휴가라고 하더라도 몇 주씩 휴가를 주는 회사는 없었다. 최소한 사직서를 내고 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수입의 대부분이 전세보증금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사직서를 내고 무모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돌아왔을 때 다시 생활할 수 있는 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잠시 꿈을 미루어야 했다. 경비 등을 지원받는 봉사 활동이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으니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있어야 봉사 활동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았다. 저렴한 가격대의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 있는 돈은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안전한 숙소만 있으면 어디든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막막했다.
어느 봉사 단체에서 만난 W가 떠올랐고 캄보디아로 봉사 활동을 하러 떠나는 그녀의 송별회에 우연히 참석했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P의 도움으로 캄보디아에 체류 중인 W의 연락처를 받았다. 선뜻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서너 번의 메일을 주고받다가 방문 허락을 받았다. 해외여행도 익숙하지 않은데 첫 해외 봉사 활동이라서 혹시 민폐를 끼치고 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애써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항공료 등 모든 비용은 내 사비로 준비했고 현지에서는 숙식만 제공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공짜는 아니었다.
혼자서는 조금 걱정이 되어 봉사에 뜻이 있는 친구들을 모았다. 최소한 두 달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마침 직장을 잠시 쉬고 있는 성당 동생 두 명과 함께 떠나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의 아버지가 갑자기 다치셨고 아버지를 간호해야 한다고 해서 마리아는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다. 셋이서 떠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또한 운명이겠거니 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혹시라도 내가 아프면 요한이 내 몫까지 대신해서 일해 주겠다니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내고 떠날 수 있었다.
캄보디아 왕국 (ព្រះរាជាណាចក្រកម្ពុជា), 약칭 캄보디아(កម្ពុជា)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에는 타이 만을 끼고 있다.
캄보디아의 공식 종교는 상좌부 불교로, 국민의 95%가 믿고 있다. 캄보디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프놈펜으로,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다. 총리인 훈 센은 1985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며, 국왕은 노로돔 시하모니이다. 크메르 제국의 유적인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등으로 유명하다. 주요 도시로는 프놈펜, 시엠레아프, 바탐방, 캄퐁참 등이 있다.
나라 이름 캄보디아는 크메르 제국의 다른 이름인 '캄부자'(산스크리트어: कंबुज)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캉보주'(Cambodge)가 영어화 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원래는 구한말에 '금변국(金邊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캄보지아'(カンボジア)로 대체되어 들어왔었다. 1970년 이전 왕국시대에는 캄보디아로 불려 오다가,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공화국이 성립되자 국명이 크메르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975년 4월 크메르루주에 의해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국명은 또다시 민주 캄푸치아로 바뀌었다. 4년 뒤인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이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으로 바꾸었다가, 이후인 1993년에 현재의 국명으로 되돌아왔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는 기원전 2000년~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주로 중국 동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메콩 강 하류와 하구에서 농경과 어로, 목축을 통해 생활하며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한 집단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인도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 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에 알려진 첫 번째 국가인 푸난을 세웠다. 푸난은 1세기에서 6세기말 경까지 번영했으며, 이후에는 메콩 강 중류에서 일어난 쩐라의 공격을 받아 위축되다가 7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이 시기의 쩐라는 지방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쩐라의 왕인 자야바르만 1세가 681년 사망한 후, 쩐라는 육진랍과 수진랍의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으며, 이후 말레이 민족과 자바인의 압박을 받아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의 국가들은 점차 속국화 하였다.
이후 9세기에 자야바르만 2세가 등장하여 자바인들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였으며, 종래에는 앙코르를 수도로 하는 왕조를 세웠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번영하였으며, 앙코르 와트와 같은 유적들도 이 시기의 군주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가 끝난 후 점차 약화되어 14세기에는 서쪽의 아유타야와 남쪽의 따웅우 왕조 (현재의 미얀마), 그리고 동쪽의 베트남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연명했다. 1431년에는 아유타야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를 함락당하고 현재의 프놈펜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18세기말에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떠이선의 난과 미얀마인의 아유타야 침공의 여파로 국토가 황폐화되기도 하였다.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식민지로 남아있다가 1954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국으로 독립했지만, 베트남 전쟁 등의 영향으로 인해 크메르루주가 득세하는 등 계속해서 정권이 불안정했다. 크메르루주 등의 준동과 베트남의 개입으로 인해 내전이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 중 킬링필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기 킬링필드는 1969년에서 1973년 베트남 전쟁 중이던 미군이 퍼부은 폭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에 쏟아부은 포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 5천 톤마저 능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불법 폭격이었다. 죄 없는 수십만 민간인들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평생 불구가 됐다.
2기 킬링필드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민주 캄푸차 시기에 캄보디아의 군벌 폴 포트(본명 살로트 사르)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Khmer Rouge : 붉은 크메르)라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루주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강제노역을 하게 하거나 학살하였다. 서방 언론에서는 이 부분만 크게 부각하여 사람들에 널리 알려져 있다.
크메르루주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에 기반한 농업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도시 인구를 강제 이주시키고 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고문, 학살, 노역이 가해졌다. 그러면서 농업정책도 실패하여 캄보디아 인구의 25%가 크메르루주의 학살 및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를 실각시킴으로써 집단학살은 끝났다. 현재까지 2만 개가 넘는 집단매장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러한 집단매장지를 소위 킬링필드라고 부른다.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학살이 시작된 것이 “인구의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2001년 1월 2일 캄보디아 정부는 크메르루주 지도부 일부를 심판대에 세우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9년 2월 17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었고, 2014년 8월 7일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에게 반인륜 범죄 혐의에 대한 유죄 및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1989년 이후 베트남군이 철군하였고, 1991년에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유엔의 임시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1993년에는 망명해 있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불러오고 보통 선거를 통해 정체를 입헌군주제로, 국명을 캄보디아 왕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총리 훈 센에 의한 쿠데타가 한 차례 있었지만, 1993년 이후로 정치는 대체로 안정되어 왔다.
씨엠립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W는 이미 현지에 익숙해져 있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여기저기에서 불러주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양자를 삼았다는 스무 살 넘은 캄보디아인 아들과 학교 관리 직원이라는 캄보디아인이 함께 차를 타고 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왔다. 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이동하였고 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남자 기숙사로 갔고 나는 그녀를 따라 봉사자 숙소로 갔다.
숙소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큼직한 철문이 있었고 건물 외부에 문이 하나 따로 있었는데 내가 머물게 될 숙소는 외부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구조라 방문을 열쇠로 꼭 잠그고 다녀야 한단다. 그녀는 간단히 안내해 주고는 철문 안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마당 옆에 있는 두 개의 계단 아래에 방문이 있는 구조라 방문 앞엔 쓸려 들어온 흙과 나뭇잎 그리고 날벌레 사체들이 쌓여있었는데 문을 열자 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딸려 들어왔다. 골동품 옷장과 싱글 침대가 전부인데도 폭이 좁아서 고시원을 연상케 했다. 그나마 안쪽으로 욕실이 있어서 나름 원룸이지만 낡고 오래 방치된 곳이라 쾌쾌한 냄새가 났다.
아직 주변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침대에 누워있으니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산짐승이 내 방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철문은 무엇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일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두 시간 만에 잠이 깼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지만 두꺼운 커튼 때문에 방 안은 지하처럼 어두웠다. 무심코 커튼을 열다가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커튼을 도로 닫고 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주변 산책을 했다. 울타리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평범했지만 교문을 나서는 순간 무서운 곳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스마트 폰 지도를 보면서 동네 산책을 하려고 정문을 막 나서려는데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직 인사 전이라 그 당시엔 누군지 몰랐지만 밖은 위험하다며 알려주고는 다시 농구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경기를 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분이 아니었으면 첫날부터 소매치기 오토바이에게 폰을 뺏겼을지도 모른다. 잠시 나가는 것조차 누군가와 동행을 해야 했으니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교문 밖으로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다 같이 사제관에 모여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에 제지하셨던 분이 주임 신부님이셨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울타리 안에는 초, 중, 고등학교가 있었고 학생들이 지내는 여자 기숙사, 남자 기숙사, 봉사자 숙소, 사제관 그리고 농장까지 있는 꽤 넓은 곳이었다.
단층 건물인 봉사자 숙소는 철문 안으로 3개의 방이 있는데 W와 또 다른 한국인 봉사자가 하나씩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공용 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함께 간 요한은 남자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은 방문 없는 방이라 학생들이 지나다니며 들여다보곤 한단다. 게다가 공용 욕실을 학생들과 함께 사용하고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내 방은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임시 도서관 선생님이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시부터 15시 30분까지 수업이 있었는데 각 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한두 시간씩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1시간짜리 1학년 여학생 수업, 1시간짜리 1학년 남학생 수업 그리고 2시간짜리 1학년 남녀 학생 수업이 6학년까지 있다 보니 매일 5시간씩 일주일 동안 총 24시간의 수업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우린 매 시간마다 수업이 이어졌고 하교 시간까지 쉴 틈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지만 요한이 한국에서 챙겨 온 애니메이션 '라바'를 틀어주자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영상에 한 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캄보디아에서 처음 접한 라바의 매력에 푹 빠졌고 그곳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이 나자 선생님들도 굳이 와서 함께 보고 있었다.
남녀 학생 모두 함께하는 수업 시간에는 주로 영상물을 틀어주었고 남녀로 나뉘는 소규모 수업 시간에는 미술이나 음악 수업을 했다. 기부 물품이 쌓여있는 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들기에 필요한 재료 등은 얼마든지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법 퀄리티 있는 수업이 되었다. 의사소통을 위해 교실에 함께 있던 W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오후 3시 반, 수업 종이 울리면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도 이미 땀범벅이 되어 녹초가 되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몇몇 아이들과도 친해지게 되자 학생용 스쿨 트럭을 타고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곳의 스쿨버스는 일반 차량이 아닌 트럭을 개조하여 운행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차량 구입 시 차값보다 더 비싼 거액을 세금으로 지불해야 한단다. 그래서 중고차라고 해도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트럭을 타고 등교와 하교를 하고 있었다. 길에는 서울 시내를 달리던 우리나라 시내버스가 노선번호와 광고판을 그대로 붙인 채 다니고 있었다. 유리창이 깨진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이 되곤 했지만 그 시간이 좋았다. 여러 마을에 들러서 아이들을 내려주고 돌아오면 한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그 사이에 날씨는 변화무쌍하게 변했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길이 어느 순간 갑자기 스콜이 쏟아져 진창길이 되기도 했다.
저녁 5시 반, 기숙사 학생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공지사항 등을 전달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때 아이들은 모두 씻은 후라 다들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아침마다 샴푸 했던 나는 샤워만 해서 머리카락은 말라있었는데 어느 날 아이들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머리를 안 감으세요?"
그 말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한 깔끔' 하던 내가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다니!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샴푸부터 한단다."
일어나자마자 샴푸해도 뜨거운 마당에 서서 아침 전체 모임을 하고 나면 9시 수업하기 전에 이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샤워는 수시로 하더라도 샴푸는 아이들처럼 저녁에 하는 게 맞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나중에는 나도 그렇게 바뀌었다.
처음엔 습한 게 싫어서 화장실 양동이에 담긴 물을 모두 비우고 통을 씻어두었지만 석회가 들러붙은 양동이는 깨끗하게 잘 닦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자체 정수시설이 있어서 빗물을 모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양치 후에 헹굼은 생수로 해야 했다. 샤워기가 없으니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샤워는 직수를 사용했는데 며칠 만에 단수가 되어버렸다. 이곳에서는 당연한 일이란다. 자체 정수시설이 있는데 왜 단수가 되는지 의아했는데 아무리 빗물이라고 해도 석회로 인해 수도관이 막혀서 그렇단다. 관을 교체해야 해서 복구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단수, 단전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되는대로 폰을 미리 충전해 두어야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다. 변기라도 문제없이 사용하려면 양동이에는 항상 물을 꼭 채워두어야 한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저녁 7시부터 사제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그 이후는 자유시간이다. 금요일 저녁에는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며 맥주를 마시곤 했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던 나조차도 그곳에서는 생수가 더 비싼 탓에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시곤 했다. 한국에서 보드게임을 몇 개 챙겨갔지만 그곳에는 이미 없는 게 없었다. 루믹 큐브도 그곳에서 배웠다. W와 그녀의 양자 S, 요한과 나는 매주 금요일마다 그렇게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며 한 주를 마무리했다. 토요일엔 늦잠을 자도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주말 기분'을 그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1달러를 걸고 게임을 했지만 애초에 S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 시작한 게임이라 돈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웃고 떠드는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맥주 30캔 한 박스가 고작 10달러인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 통틀어 최고의 멋진 경험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뜨거운 날씨도 전혀 문제없었고 의약품조차 풍족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까짓 단수쯤이야 문제 되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1달러의 가치는 달랐다. 고작 일주일 만에 1달러가 마치 열 배, 백배의 가치라도 되는 듯 느껴졌다.
'This is Cambodia!'
모든 게 그 한마디로 정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그곳에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물이 나와도 '우와~'를 외쳐댔다. 이런 삶을 주시려고 퇴사를 하게 하셨나 보다며 감사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였다.
뜨거운 캄보디아의 날씨는 나에게 너무나 잘 맞았다. 한국에서는 비가 오는 날엔 유독 아팠지만 그곳에서는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아프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작 두 달을 계획하고 떠났었는데 그 짧은 일정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한국에 돌아오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다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없어서 아쉬운 물품들을 모두 챙겨서 말이다.
한 달이 되기 직전, 비자 갱신을 위해 국경을 넘어 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캄보디아였지만 차로 십분 거리에 태국과의 국경이 있었다. 카지노가 있는 호텔은 태국에 있었지만 그곳은 여권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 부근에 있는 작은 건물이 출입국 관리사무소였다.
학교 도서관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러 신부님도 같이 움직였다. 차는 차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출국심사와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다. 관광객들 사이에 줄을 서서 스탬프를 받고 지문을 등록하고 태국으로 출국했다.
태국에 도착하자 먼저 가구들을 주문하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신부님을 따라서 태국 어느 가톨릭 학교를 방문했는데 그곳 신부님이 학교 시설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주셨다. 건물 자체가 신식이었는데 캄보디아 학교와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도시 학교와 시골 학교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보는 시설마다 우와~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우린 한국 사람이지만 태국 신부님은 '캄보디아에서 온 우리'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나조차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캄보디아에서 온 사람이었고 좀 더 잘 사는 태국인이 밥을 사는 게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태국 신부님은 우리를 허름한 어느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는데 아무거나 다 시켜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쌀국수를 시켰다. 한국에서도 맘껏 드세요, 하고는 나는 짜장! 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나는 메뉴판의 티본스테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고기를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고기 맛을 알리는 없었지만 한국에서도 티본스테이크가 얼마나 비싼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티본스테이크가 10달러였다. 이건 무조건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남이 사주는 음식은 비싼 걸 시켜본 적이 없었다. 누가 사주겠다고 해도 가장 저렴한 것을 시키던 내가 그 순간에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먹어도 되냐고 묻고 있었다. 태국 신부님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한국 신부님께도 허락받고 주문했다. 티본스테이크는 아주 크고 두툼했다. 그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정말 모처럼 맛있게 다 먹었다. 너무나 맛있게 먹는 걸 보고 흐뭇해하시던 신부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향신료 때문에 쌀국수는 못 먹는다고 나처럼 티본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던 요한은 두 신부님이 쌀국수를 너무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는 맛을 슬쩍 보더니 결국 쌀국수까지 추가로 시켜서 먹었다. 그곳은 태국 신부님이 자주 가는 단골집이라더니 정말 제대로 된 맛집이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그곳 봉사자들과 어울리며 현지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자 신부님이 장기 봉사자로 추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퇴사 후, 아무 계획이 없었던 나에게 그 소식은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내가 그곳에 장기 봉사자로 파견되면 수도회에서 정식 지원되는 생활비를 그곳에 보탤 수 있었다. 나는 돈이 필요 없었고 숙식만 해결되면 사비로라도 다시 가려던 참이었지만 장기 체류 시엔 비자 문제가 걸림이 되었다. 매달 비자 갱신을 위해 국경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그 또한 민폐가 될 수 있는 사항이라 공식적인 방문이 절실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좀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기부금도 선뜻 내놓았다. 아이들이 마냥 이뻤고 아이들 간식비로 쓰이길 바랐다.
신부님의 추천을 받아 연말쯤 수도회에서 봉사자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을 수료하면 내년 4월쯤엔 출국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마음 편히 지내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앙코르 와트는 가장 큰 관광자원이다. 관광산업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 중의 하나였지만 학교 등 기본적인 사회 간접 자본의 부족으로 농촌 지방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 불안정한 정치와 부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외국의 투자는 꺼려지고 있고, 외국 원조도 연기되었다. 이 나라의 경제 구조는 후진적이고, 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전기를 태국에서 수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입 비용도 비싸다.
캄보디아의 문화는 대표적으로 앙코르 시대에 만들어진 앙코르 와트 사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화려했던 유물들은 관리가 소홀한 탓에 파괴와 식민 시대의 약탈 등에 시달려 많은 손상을 입었다.
주민은 크메르족이 90%이며, 크메르어가 공식 언어이다. 나머지는 베트남계 5%, 중국계 1%, 기타 4%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메르어는 오스트로 아시아어군의 몽크메르 하위 계보이다. 인도차이나계의 프랑스어가 한때는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부는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 식민지 유물로 대부분 오래된 캄보디아 사람들은 제2 외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학교와 대학교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기금을 지원받아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캄보디아 프랑스어는 캄보디아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주로 정부기관에서 사용되는 방언이 섞인 프랑스어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은 많은 젊은 캄보디아인들과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용 활용범위가 넓은 영어를 더 선호한다. 주요 도시와 여행자 센터에서는 영어가 폭넓게 사용되며, 대부분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기도 하다. 시골로 내려가도 불교 사원의 승려 등을 포함하여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한다.
캄보디아의 대부분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한 채 부모가 만들어 준 팔찌 등을 관광객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길거리로 내보냈으니 우리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복 받은 셈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달에 한번 그 부모들을 불러서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대신 아이들이 벌어와야 하는 일종의 생활비를 대신 지불하고 있는 셈이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배우지 못하면 알지 못했다. 행주와 걸레를 구분할 줄 아느냐에 따라 일당이 다르다고 했다.
씨엠립에 가서 쌀국수를 사 먹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방금 전까지 바닥을 닦았던 걸레로 그릇을 닦아서 국수를 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순간 잘못 봤나 싶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캄보디아에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는 것은 음식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은 날은 반드시 설사로 고생을 했다.
사제관에서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는 현지인 두 명도 행주를 삶아놓으면 그걸로 신발 신고 다니는 바닥을 닦아서 새까맣게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내가 보이면 시꺼먼 걸레로 바닥을 닦았지만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 걸레로 접시를 닦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음식을 할 때엔 그릇을 다시 헹구어 사용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이들은 맨발로 다녔고 기부받은 크록스 샌들을 나누어 주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맨발로 다니곤 했다. 바닥이 잘 정리된 울타리 안에서는 신발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 하지만 문제는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맨발이라는 게 문제였다. 교실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상황이라 신발을 신은 아이의 발과 신지 않은 아이의 발은 같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실에 들어가면 그들의 발이 유독 신경 쓰였다. 교실에 들어갈 때 발을 닦으라고 방마다 입구에는 매트를 깔아 두는데 오물이 묻은 발이 아무렇지 않은 아이들은 건성으로 닦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정말 중요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생존과 연결된 청결도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