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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4

굳은살이 베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덧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by 안녕
마지막의 마지막은 누구나 혼자라는 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고 평범하지 못했던 나는 내 삶에 굴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창살 없는 감옥 속에 스스로 갇혀 살았지만 어느 날 죽기를 각오하니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오래도록 꿈꾸었던 퇴사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퇴근을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퇴근이 되어버렸고 그날 밤은 내 인생 통틀어 아주 길고 긴 밤이 되었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했다. 집에 오니 깨끗한 수돗물이 가장 반가웠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주었듯이 그곳을 떠나올 때도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그들을 위한 짐이 없었으니 택시를 불러서 알아서 타고 와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택시비도 부담이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캄보디아인 택시기사라 왠지 불안했다. 미리 말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택시가 왔단다. 요청한 시간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밥을 포기하고 급하게 아이들이랑 인사하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옆에서 자꾸 독촉을 했다. 인사하다 말고 짐을 챙겨 와서 먼저 실었다. 순간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등 떠밀려 택시에 올랐다. 뭔가 허전했지만 다시 돌아올 곳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렇게 울다 말고 얼떨결에 그곳을 떠나왔다.

30분쯤 이동하자 기사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 택시를 세웠다. 순간 불안이 몰려왔지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택시기사가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내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버리고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 마냥 버티고 앉아있었다. 한국인 관광객, 택시 등 태국 장기 밀매단의 이야기가 생각났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잠시 후 포기한 택시기사는 택시에서 내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우리를 팔아버리려는 건가 싶어 불안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택시는 꼼짝도 않고 마냥 서있으니 어느 순간 두려움보다 비행기 시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났을까? 어떤 남자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건 뭔가 싶어 잔뜩 긴장했다. 미안하다고 하는 걸 보니 그냥 합승인가 보다. 그제야 안도했다. 이럴 거였으면 인사할 시간을 더 가졌어도 될 뻔했다. 공항으로 다시 출발했고 아슬하게 도착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여행이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도회의 초대로 W의 양아들 S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W의 부탁도 있었고 캄보디아에 대한 아쉬운 마음도 있었으니 흔쾌히 서울을 구경시켜 주기로 했다.

캄보디아인 S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아 조금은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지인의 아들이니 그냥 조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태국 국경에서 부모에게서 도망쳐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왔다는 그는 어쩜 캄보디아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딱한 사연을 가진 조카라 신경을 많이 썼더니 W는 자기 아들에게 관심 있냐고 되려 질투했었다. 처음엔 농담이겠거니 했지만 정색을 할 때도 있었으니 진심인 것도 같았다.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솔직히 기분 좋은 농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날은 양아들의 과거사를 꺼내며 불쌍한 아이이니 용돈을 주라고 했다가 또 어떤 날은 관심도 가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면 W는 나에게 자신의 양아들을 부탁했고 나는 한국에 온 그를 챙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온 신경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캄보디아에 집중되어 있었고 캄보디아와 관련된 사람에겐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갈 때만 해도 교통비와 비자비 정도만 있으면 될 줄 알았다. 요한에게도 그 정도만 알려주었고 추가로 발생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부담하기로 했는데 돌아오는 택시비는 물론 씨엠립 관광까지 하느라 이미 한도 초과가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봉사하러 갔으면 봉사활동과 관련된 일만 하고 와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어떤 관광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가 방학을 하면서 W가 갑작스레 앙코르와트 관광을 제안했다. 씨엠립 공항으로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앙코르와트 관광을 위해 입국하는 셈이었지만 내 계획에는 애초에 없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당연한 듯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에 나 혼자 반기를 들지는 못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간 달러는 이미 누군가의 용돈으로 다 써버렸으니 2박 3일간의 씨엠립 관광 비용을 위해 신부님에게 50만 원을 따로 환전해야 했다. 요한뿐만 아니라 W의 관광비와 숙박비 그리고 식비까지 당연한 듯 내가 모두 부담하게 되었다. W가 강력하게 요청한, 원치 않는 마사지 비용까지 지출하며 그렇게 2박 3일을 놀다 돌아왔다.

봉사 활동하러 갔던 캄보디아에서 다른 어느 여행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고 돌아온 상황이었다. 긴축재정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S의 입국으로 인해 나도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을 사주었고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차량이 필요했으니 요한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 모든 비용은 또다시 내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좋은 기억만 심어주려고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S가 캄보디아로 돌아갈 때는 현지에서 요청한 물품들을 모두 사비로 사서 보내주었다. 신부님과 W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물품까지 사서 보냈고 그렇게 또다시 제법 큰돈이 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가서 지낼 곳'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나도 기부를 꾸준히 했었다. 매달 몇만 원씩, 특별한 날엔 몇십 만원씩 꾸준히 기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게 버티고 있는 만큼 나보다 더 절실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한 번은 큰돈을 기부하고 싶어 제대로 된 원룸 전세를 얻게 되면 백만 원을 기부하기로 스스로와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서울에 온 지 3년째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도 잠시 그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이는 걸 알았고 다시는 기부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도 귀한 돈이었으니 그 후론 필요한 누군가에게 직접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기회가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는 푼돈에도 벌벌 떨었지만 남에게는 언제나 아끼지 않았다. 마음이 착해서라기보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우월감 같은 것에서 나온 마음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기부를 하고 생색을 내는 성격이 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 알아주면 은근히 기분은 좋았다. 또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생색내는 사람을 보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기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움받은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어떤 마음으로 기부된 돈이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앞으로 살게 될 그곳으로 떠날 날만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던 도중,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S가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도회 내부 사정으로 현지에 파견 나가 있던 봉사자들이 모두 입국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기한이다 보니 그들의 처지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 온 W를 만나자 왠지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워 데리고 다니며 대접을 하게 되었다.

졸지에 다음 계획이 사라지니 허무함이 곱절로 몰려왔다. 어쩐지 내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더라니 역시 내게 그런 행운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후 W는 S를 데리고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갔다. 대도시 프놈펜은 단전, 단수 같은 불편함이 없었으니 가겠다고 자원하는 봉사자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도 내 자리는 없었지만 내가 그리운 것은 두 달 동안 정들었던 아이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좋은 엄마를 둔 S는 이후에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했다. S를 데리고 나의 집에 처음 왔을 때는 게스트 룸을 내어주었더니 아들을 혼자 자게 할 수 없다며 안방의 내 침대를 차지했었다. 가족과도 수건을 공유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했던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웠지만 유난 떨지 말라는 그녀의 핀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한국에도 양자가 있었고 형제인 S와는 열 살 넘게 차이가 났다. 우리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서른 살이 넘은 청년을 갑작스레 데리고 와서 내 침대에서 같이 잔 적이 있었다. 그래도 S는 여러 번 봤던 사람이니 이해하려고 했지만 한국 양아들의 경우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연락을 잘 받지 않는다고도 했으니 진심으로 그녀를 엄마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고작 몇 살 적은 동생을 조카로 대접할 수는 없었다. 잘 곳이 필요할 때마다 그녀는 당연한 듯 나의 집으로 그들을 데리고 왔고 그때마다 나는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그들이 올 때마다 요한을 부르곤 했다. 나에겐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캄보디아에서 나와 함께 도서관 선생님이 되기도 했지만 방학을 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발사가 되기도 했다. 이가 기어 다니는 그들의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은 듯 손질해 주었는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었다. 단체 봉사활동을 왔던 이들과 신경전이 있기도 했지만 모두의 공통된 목적은 그곳을 돕는 것이었다. 의견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자신의 몫을 제대로 마치고 돌아왔던 요한을, 그녀는 은근히 싫어했고 다음부터는 부르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어쩜 나처럼 고분 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집에 오는 사람들에겐 가족이라 할지라도 청소나 설거지를 시키지 않았다. 내 집에서는 나만의 규칙이 있는데 그걸 타인에게 설명하면서까지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W는 나의 집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다고 했다. 어느 날은 W의 지인이 함께 왔고 그냥 있기 미안하다며 청소라도 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남이 청소하더라도 나중에 내가 다시 해야 하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더니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W가 갑자기 청소를 하겠다며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청소기 전원만 켜놓고 폰에 집중하고 있었으니 청소가 목적이 아니었나 보다. 그저 나의 유난스러운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닌데도 내 집에서조차 눈치를 보게 되었다. 게다가 프놈펜에 가면 나도 재워달랬더니 아들이 불편할 거라고 거절을 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그것도 내 침대에 당연한 듯 자고 가면서 둘이 사는 집에 내가 가는 것은 불편한 일인가 싶었다.

그 후로도 지나친 요구가 종종 있었고 그래서 몇 번은 거절하기도 했다. 돈이 없을 때는 만남 자체가 고민이 된 적도 있었고 몇 번은 얻어먹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내 경제 사정에 따라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일이 있어도 거절하지 못했던 탓에 은근히 힘들었다. 그래서 한국에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반갑기도 했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캄보디아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내려놓을 즈음에 희망고문은 다시 이어졌다. 프놈펜으로 가셨던 신부님이 '그곳' 원장 신부로 부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불러주겠노라 말씀하셔서 그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신부님이 한국에 잠시 오셨고 이제 곧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요한과 함께 나가서 스테이크를 대접해 드렸다. 그런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언제 불러주실 거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진실이 알고 싶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고 W가 나의 봉사자 파견을 말렸다는 얘기를 돌려서 해주셨다.

"자매님, 아프시다면서요?"

처음 캄보디아에 갔을 때 수술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혹시나 싶어 W에게만 미리 얘길 해두었다. 아무 일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을 직접 보았고 한국에서도 자주 만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녀를 오로지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큰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을 했다. 어쩜 그런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부님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진리인 상황에서 나의 말은 곧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신부님도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셨는데 나라고 건강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결정 난 셈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신부님을 만난 이후에도 내가 별다른 말이 없자 W는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리고 신부님을 다시 만났는지 자꾸 확인했다. 그녀는 신부님이 나에게 진실을 얘기했는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비밀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난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더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W가 한국에 왔다고 해서 스케줄을 물어보았는데 웬일인지 답을 해주지 않았다. 집에 오면 온다, 아니면 안 온다는 얘기만 해주면 나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데 W는 메시지만 읽고 답이 없었다. 메시지를 다시 보냈지만 여전히 답이 없으니 걱정도 되었다가 짜증도 났다. 그런데 며칠 후 답이 왔다. 갈 때 되면 자연히 연락할 텐데 왜 자꾸 보채냐며 화를 냈고 자기의 스케줄을 왜 나에게 알려주어야 하냐는 그 메시지에서 W의 분노가 느껴졌다. 이제 와서 필요 없어졌다고 스토커 취급을 하는 듯한 메시지에 나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혹시 내가 보낸 메시지가 오해를 할만한 글이었나 싶어 다시 살펴보았고 심지어 지인들에게 그동안의 메시지를 보여주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냐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내가 호구였던 거라고 했다. 내 느낌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잘 곳이 필요해서 연락을 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앞에서는 필요에 따라 원하는 걸 얻어내고 뒤에서는 나를 부적합한 사람이라 얘기했던 사람, 그때서야 뭔가 잘못된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고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다. 그렇게 W와의 인연은 그 메시지로 끝이었다. 아니 그조차도 그녀가 끝내버린 셈이다.




캄보디아에는 한국인 봉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교류가 전혀 없었다. W의 말에 의하면 별다른 할 일없이 머물고 있는 거라고 했다. 잦은 설사로 밥도 거의 따로 먹었던 탓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이가 가장 많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던 그녀가 W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을 리도 없었다.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물밑 작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던 무렵이었다. 탈이 나서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던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한국에서 먹었던 달걀국을 먹으면 속이 편해질 것 같은데 자기를 위해 끓여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픈 사람을 외면할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흔쾌히 끓여다 주었다. 물론 곧 쫓겨날 그녀가 불쌍한 이유도 한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지나가다 그 모습을 뒤늦게 본 W는 왜 그걸 끓여서 갖다 바쳤냐며 질타를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W도 종종 간식을 만들어 달라 요청했었고 난 그냥 평소대로 했을 뿐인데 그게 왜 그렇게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하고 의아했었다.

W가 소개해 준 남자를 만나 결혼했던 친한 동생은 그 남편에 의해 아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W를 떠올리게 되었다. W는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나에게 그 사람을 소개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섬뜩한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텐데 캄보디아에서 강제 입국당하던 그 시기에, 때 맞춰 결혼식이 있었다. 본인 덕분에 좋은 남자를 만났으니 옷 한 벌을 사달라고 했었다. 그녀가 좋은 남자라고 소개해 주었던 사람이 모두의 공분을 샀던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범인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개비로 받았던 상품권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어쩌면 아무런 생각도, 관심도 없는 건 아닐지...

그때 계획대로 출국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하곤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상황을 잠자코 지켜만 보던 요한이 뒤늦게 얘기를 꺼냈다. 캄보디아에 가겠다는 열정으로 그들에게 지나치게 휘둘리며 사는 내가 안타까웠다며, 이렇게 된 게 차라리 잘 되었다고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게 어쩜 사람을 만만하게 봐도 된다는, 어떤 여지를 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능력이 되면 그냥 다 퍼주는 성격이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나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는 일이 많았던 것은 정말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청소년 상담사로도 활동했다던 그녀에게 오랜 기간 의지했었고 그녀의 말이 정답이라 생각했었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을 아들처럼 챙기는 모습에서 주변도 좀 더 챙기지 않을까 하는 어떤 작은 기대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노후에 자기를 부양해 줄 아들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지난 몇 년간의 시간들이 허무해졌다. 싫어하는 사람을 안 보고 살면 착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면 정말 착하게 살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사람을 피하다 보니 어느덧 내 곁에는 커피 한잔 사줄 사람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들키지 말아야겠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닌,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브런치를 카카오톡과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작가 카드 발급 등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아직은 선택 사항이지만 언젠가는 카카오 스토리처럼 자동으로 카카오톡 계정과 연결시켜 버릴지도 모르겠다. 내 가족, 내 지인들이 내 매거진을 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네 번째 매거진에서 발행된 모든 글들을 삭제할 수밖에 없다. 다시 숨어 지내야 할 그날이 빨리 오게 될까 봐 왠지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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