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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5

죽는 일이 사는 일의 일부라는 걸 결국 나도 알게 되겠지.

by 안녕
우연히라도 오는 행운은 없었다.




예전에 필리핀 마닐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일정 이후에 딱히 관광을 할 여건이 아니라 근처 유명한 호텔 카지노에 구경을 가게 되었다. 회사 임원 두 명이 게임을 하겠다며, 나에게 10달러 정도를 주고는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운과 관련된 것에는 절대 돈을 쓰지 않는 나는 그 돈조차 아까웠지만 슬롯머신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왠지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근처에 있던 한 손님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일행도 얼떨결에 따라왔는데 갑자기 그 기계에서 잭팟이 터졌다.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경우도 있구나 싶었지만 다시 반복될 일은 없겠다 싶어서 그냥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가 다가가는 그 순간에 딱 맞추어서 터질까 싶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 갔던 일행이 돌아왔는데 순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들이 내 부근으로 다가올 때, 딱 맞추어서 코인을 넣고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잭팟이 터졌다.

그 순간 예기치 못한 행운이 나에게 찾아왔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건 속임수라는 것을 확인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슬롯머신마다 다르겠지만 몇천 번 스핀 할 때마다 한 번꼴로 나온다는 잭팟이 어떻게 하루에 두 번씩이나 터질 수가 있을까? 비록 다른 머신이긴 하지만 한 공간에서 연이어 터지는 슬롯머신을 보니 '도박은 역시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난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았다. 내 앞에 쌓여있는 코인을 모두 돈으로 바꾸었다. 지켜보는 누군가는, 잭팟이 터진 내가 더 큰돈을 쓰기를 바랐겠지만 이미 난 그들의 '수'가 보였다.

하지만 나의 행운을 지켜본 일행이 내가 딴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잃었다. 그것이 카지노가 살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우연히라도, 행운 같은 것은 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늘 불안했다. 이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쩜 어떤 일이 또 생길까 봐 불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1393을 눌러보는 일이 늘어만 갔다.

남의 불행을 보며 나름 위안을 받았던 삶이었지만 점점 더 각박해지는 사회가 마치 범죄만 일어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 그조차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우순경 사건은 과거에 분명 있었던 일이지만 나조차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기억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범곤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2011년 노르웨이 테러를 저질러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량살인을 저지른 총기 살인범이었다.




1982년 4월 26~27일 경상북도 의령군 궁류면 일대에서 우범곤 순경에 의해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남 부산 출신으로 해병 복무 중 특등사수로 뽑히기도 했던 우범곤은, 순경으로 임용된 후 1981년 4월 11일부터 1981년 12월 30일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지만, 인사 과정에서 탈락하여 경남 의령으로 좌천되었다.

1981년 12월 30일 오후 5시,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에 살던 전 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9일에 전 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런데 전 양의 가족들은 동거 전부터 두 사람의 교제를 극력 반대했는데 이유는 바로 우범곤의 술버릇이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욕설은 기본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등 심하게 행패를 부려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 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 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8개 등을 탈취했다.

• 밤 9시 40분 -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26세 남자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궁류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조준 사격하여 장을 보러 온 마을 주민 3명을 살해했다.

• 밤 9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 우체국으로 가서 여성 교환원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22시 34분)가 가능했다.

• 밤 10시 - 그는 곧 압곡리 매실 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하였고, 주민 4명 인근 마을의 2인을 살해했다.(전양은 생존했지만 전 양의 가족을 살해.)

• 밤 10시 10분 -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다. 심지어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 밤 10시 50분 - 그는 평촌리의 한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라고 말하고는 문상을 한다는 핑계로 부의금 3천 원(오늘날의 4만 원가량)을 내고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여기서 문제의 난폭한 주사가 또 발동,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문상객 한 명이 상갓집에서 버릇없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자 이에 격분해서 총기를 난사, 상주 일가족 등 12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다.

• 27일(다음날) 새벽 5시 35분 - 그는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알고 지내던 주민의 민가에 침입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우범곤의 범행 중 가장 악질적인 점은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무차별로 살해했다는 것으로, 민가에 침입해서 숙제를 하던 어린아이를 사살하는가 하면 평촌리 상갓집에서 20여 명을 사살하고 난 뒤 피바다가 된 현장을 떠나려다 뒤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안 죽은 게 있어?"라면서 되돌아가서는 그대로 아기를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이 집의 상주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중 우범곤 때문에 어머니와 세 자녀, 어린 조카까지 모두 잃고 하루에 장례를 3번이나 치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상갓집 상주는 언어장애가 있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터라, 장례를 치르는 내내 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상주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주민들이 대신 곡을 해주며 함께 오열했고,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도 특히 이 상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고 다니는 동안 한 택시 기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빨리 불 꺼요, 지금 불 안 끄면 다 죽어요"라며 위험을 알렸고, 택시 기사의 말대로 불을 끈 집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택시 기사는 이후에 안타깝게도 우범곤에게 사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간발의 차로 미처 불을 끄지 못한 집들도 변을 당하고 말았다.

한 시간 동안 화기를 사용해 마을 4개를 오가면서 수 십 명을 살상한 전대미문의 살상 사건에도, 당시 한국 경찰은 대응은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 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 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밤 22시 50분경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한편 마을에 살던 의령군 공무원의 사건 전파를 받고 의령경찰서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휘하 전투경찰 30명이 자정 무렵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는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 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 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 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하고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도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 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밤 22시 24분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적어도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 없이 주민 살상이 진행되었고 속수무책으로 종료됐다.

우범곤이 26일 23시경부터 다음날 자폭하는 새벽 5시경 사이에 무려 6시간가량 딱히 범행을 실행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있었는데, 만약 그가 쉬지 않고 계속 날뛰었다면 이때 경찰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피해가 몇 배로 훨씬 커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우범곤이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 살인을 저지르다 보니, 시골 사회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다. 조상 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가족들을 모두 잃고 일가 중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나이 어린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는데, 20세 이하의 희생자가 무려 16명에 달했으며 그중 생후 1개월 된 갓난아기를 포함해 10세 이하의 희생자는 6명이었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첫 번째 희생자인 청년과 우체국에서 피살된 교환원 아가씨는 미혼으로 사망한 것이 비통하게 여겨져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4월 26~27일 즈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 해이로 인해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노르웨이 연쇄 테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경찰인 우범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어도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 중인 것으로 인식했다.

우순경 사건은 대량 학살급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하루 뒤 조간신문이 아닌 석간신문에 보도됐는데, 이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이후 주재기자 제도가 금지되어 연합통신 타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합통신이 보낸 것도 내용이 엉성해 뉴스 당일 오후에 기자를 파견하고 나서야 자세히 알려졌다. 사건 몇 달 후 '충견 바둑이 오보 사건'을 계기로 주재기 자제 재도입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한편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 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궁류 지서장 허창순, 의령서장 최재윤을 파면·구속 기소하고 관계자 수 명을 직위 해제시켰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는 책임을 지고 문책성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체육부 장관이었던 노태우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사퇴까지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의령군을 찾아 주민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는 한편, 국가 차원의 대책위원회를 열어 대대적인 보상을 실시했다. 사건이 일어난 의령군 등 서부 경상남도 지역은 대구경북과 함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민주정의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으므로 전두환으로서는 아무리 간선제를 한다 해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유족들에게는 대학 등록금 및 의료비 지원 방안이 이루어졌고 궁류면에 대한 인프라 구축 사업 역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먼저 의령읍~정곡면 간 11km 국도를 새로 포장한 뒤 군도였던 의령~궁류 간 12km 도로를 지방도로로 승격해 경상남도 예산으로 새로 포장했다. 또한 마을 안길 포장, 교량 가설, 주택 개량, 농로 개선 등 총 12개 부문 환경개선 및 생산기반 시설 사업이 진행되었고, 평촌마을 위쪽에 벽계저수지 및 보가 설치돼 궁류면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주민들의 절반 이상이 궁류면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 사건으로 경찰공무원 임용 규정이 개정되어 경찰공무원 응시자에 대해 고졸 이상부터라는 학력 제한 규정이 제정되었으며, 인적성 검사와 전과 등에 대한 조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우범곤은 전문대 중퇴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학력 제한이 예전부터 있었다 해도 충분히 응시할 자격이 되었다.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에서는 형법 직무유기 관련 중요 판례로 "... 직무 유기죄가 성립하려면 주관적으로는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과 객관적으로는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다만 직무집행에 관하여 태만, 분망, 착각 등 일신상 또는 객관적 사정으로 어떤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에는 형법상의 직무 유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조치가 다만 적절하지 못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형법상 직무유기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직무유기죄는 불성립되었다. 그리고 파면 처리되었던 것도 징계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무효가 됐다.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는데도 테러가 아닌 경찰이 저지른 범죄인 데다 사건 백서조차 편찬되지 않은 대한민국 공권력의 역대급 흑역사라서 대중매체에선 잘 안 다룬다. 그나마 2008년 7월 15일 tvN <범죄의 재구성>과 2011년 11월 6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각각 다뤘다.

2018년 7월 5일 KBS2 <속 보이는 TV 인사이드>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당시 생존자, 피해자 가족의 인터뷰와 재현 영상으로 구성했고 현재는 당시와 달라졌지만 당시 실제 장소를 찾아가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 외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무기고도 볼 수 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1년 11월 25일 방송분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뤘다. 당시 우범곤의 살육을 목격한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가 방송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우범곤이 근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본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크든 작든 사고를 칠 여지가 있는 사람을 해임하거나 해서 조기에 걸러내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데 그쳤던 당시 경찰의 안이한 인사조치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제작진이 방송 준비를 하면서 경찰청에 질의를 했는데 경찰청 공식 답변은 56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건 이후 부상의 정도가 심각하여 사망한 사람의 수는 집계하지 못하였다.라고 추가 답신을 보내왔다고 한다. 당일 사망자 수만 세고 그 뒤의 사망자 수는 집계하지 않은 즉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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