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아름다운 걸 보면 살고 싶어질 거야.
아니, 죽음의 순간이 오면 살고 싶어졌어.
캄보디아에서 돌아오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또 다른 일을 찾고 있어야 했지만 캄보디아란 나라에 홀려서 몇 년을 그렇게 허비하고 있었다.
쉽게 다가온 기회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꿈꾸던 일이라 오래도록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정말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다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필요 없다잖아!'
캄보디아에 함께 가려다 가지 못했던 마리아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며 가끔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처받은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나에겐 아직 머나먼 일이었고, 그저 꿈같은 일이었다.
'그 먼 유럽을? 그것도 몇 달 동안? 그것도 혼자서?'
여행은 최소 두 명 이상 함께 다녀와야 한다는 그 선입견에서 벗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혼자서 그 긴 여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걷게 될 곳'으로만 점찍어두었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후기를 찾아서 읽고 또 있었다. 좋다와 나쁘다의 판단 기준을 알려면 그 사람의 성향이 중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던 순례자의 후기만 골라서 읽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숙소였다. 순례자의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부르는데 조용하고 고즈넉한 어느 알베르게를, 누군가는 호평을 했고 또 누군가는 혹평을 했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이의 마음에는 들었겠지만 여럿이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이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후기를 읽고 글쓴이가 좋다고 했던 곳을 굳이 찾아갔는데 자신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대부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길의 알베르게는 어디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산과 상황에 따라 맞는 곳을 선택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사람 사는 곳인 만큼 주인의 성향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한국인 순례자가 갑자기 늘어난 만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을 것이고, 그런 한국인에게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현지인은 아시아계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냥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건 그 길에서의 문제라기보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이런 사람 한두 명쯤은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기내에서 있었던 일이다. 비행기에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게 불편해서 웬만하면 기내에선 음료를 잘 마시지 않지만 12시간 넘는 비행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참지 말자고 생각했고, 마지막 식사라는 마음으로 기내식과 함께 맥주를 주문했다.
내가 앉는 좌석은 매번 한국인 승무원이 담당이더니 그때는 백인 아저씨가 담당이었다.
기내식을 선택하자, 음료는 무엇으로 하겠냐고 물었다. 맥주 브랜드는 상관이 없었으므로 "Beer Please~!"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승무원은 "What?"이라며 반문했다.
평소 때라면 민망함에 됐다며 포기했을 나였지만, 그때는 왠지 포기할 수 없었다. 난 내 발음이 이상한가 싶어 억양을 바꾸어 가며 열심히 외쳤다. "Beer~!"
직항이었으니 한국말 '맥주' 정도는 알고 있을 법도 한데, 'Beer'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 승무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 내가 통로에 앉아있었는데 바로 눈앞, 카트 중간 서랍에 여러 종류의 맥주 캔이 잔뜩 들어있는 게 보였다. 특정 브랜드가 보여서 손으로 캔을 가리키며 '하이네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What?'이라고 했다. "하.이.네.켄!"
그래서 보다 못한 내가 직접 맥주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자, 그는 자신의 손으로 내 손을 탁 쳐냈다. 이쯤 되니 이 사람의 의도가 보였다. 내 발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주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그 승무원을 쳐다만 봤다. 아무 말 없이.
그러자 그는 하이네켄 맥주를 꺼내면서 'Beer?' 라며 나에게 맥주 캔을 건넸다. 일반 사람도 아닌 승무원의 이런 행동에 몹시도 불쾌했지만, 하늘 위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그 어떤 항의는 할 수 없었다.
좋지 못한 기억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어느 항공사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통로 좌석에 앉아서 왔던 항공사는 영국항공뿐이란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후기를 통해 그 길이 한결 편하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혼자 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길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제주 올레길을 먼저 걸으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항공료까지 포함하면 국내가 훨씬 더 저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유럽 배낭여행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주 올레길에서 가장 큰 비중은 숙박비였다. 항공료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일단 스페인은 하루 숙박비가 5유로에다 까미노 루트에 숙소가 있어서 추가 교통비가 따로 들지 않았지만 제주도 숙박비는 최소 2만 원대였고 올레길에서 숙소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숙박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루트 부근의 숙소에 머물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비용이 중요했다. 게다가 제주도는 날씨를 예측할 수가 없다. 일정에 맞춰서 숙소를 예약해 두면 숙박비가 아까워서라도 악천후 속에서도 걷기를 강행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다른 고난 길을 애써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결국 제주 올레길은 제주도로 이사 가면 날씨 좋은 날에 하루씩 편하게 걷기로 했다.
다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돌아갔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나는 후기를 읽을 때 가급적이면 사진을 참고하지 않았다. 예쁜 풍경을 보면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했지만 풍경에 현혹되어 그곳에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위험을 간과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최악의 상황이 있는지였고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였다. 그 예쁜 풍경 한 컷을 찍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찍은 사진 속 풍경 대신 그 길을 보았다.
'부드러운 흙길은 걷기에는 좋겠지만 비가 오면 진창길이 되겠구나!'
'자갈길은 발목에 무리가 되겠지만 비가 오면 물웅덩이에는 빠지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며 그 많은 글들을 읽다 보니 그 길이 너무 친숙하게 다가왔다. 결론은 베드 버그만 잘 피하면 나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 같았고 그래서 떠날 용기가 생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캄보디아에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 길을 무사히 완주하고 돌아오면 내 건강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지 않을까란 기대도 내심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보여주려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건강 문제는 결국 거절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30일 만에 다녀왔다는 사람도 있었고 50일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정이 짧은 사람은 달리기 시합하듯이 일정에 맞춰 서둘러야겠지만 여유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좋은 곳이 그곳이었으니 기간으로 경쟁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혼자서 보냈던 나의 생일을 그곳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도착일을 생일에 맞추어 44일간의 일정으로 까미노를 준비하게 되었다. 6월 1일 생장에서 출발하면 하루하루 날짜를 세기도 편할 것 같았다. 내 생일에 맞추어 완주했고 내 생일에 완주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까미노를 무사히 다녀왔다.
'첫 번째 매거진 : 산티아고 가는 길'
그 길은 분명 고난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치거나 베드 버그에게 뜯기는 일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매 순간이 힘들었다. '이 길을 왜 걷고 있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그때는 하루에 걷겠다고 미리 정해두었던 거리 때문에 힘들었고 그 끝이 언제쯤 나타날지 알 수 없어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뻔히 눈앞에 보이는 마을이 신기루 마냥 한 시간 넘게 걷고 또 걸어도 그대로였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걷는 거리를 줄이면 정말 좋은 배낭여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년 만에 다시 그 길을 걸었다. 이 길을 두 번이나 걷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때는 캄보디아와 관련된 모든 인연이 완전히 정리된 후였다. 두 번째라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뻔히 아는 상황이라 짐을 줄일 수 있었지만 대신 일정이 늘어나면서 짐은 다시 늘어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만만해지자 욕심이 생겼고 2년마다 걸어보겠노라 계획하기도 했다. 다음번엔 '은의 길'을 걸어보겠노라 다짐하고 이번엔 포르투갈 길까지 이어서 걷기로 했다.
첫 번째는 까미노에 모든 걸 집중했고 프랑스 파리로 입국해서 출발지인 생장 피에드포르로 향했지만 파리의 에펠탑조차 보지 않았다. 순례길을 걸으러 갔으면 그와 관련된 일정만 있어야 했던 나의 고집. 그래서 그게 또 다른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파리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에펠탑을 보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에 내키지 않는 파리에서 머물기로 했다. 어릴 때는 꿈꾸던 도시였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환상이 깨어졌던 곳이었다. 그 도시를 알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머무는 것이 내 고집이었으니 파리에서도 일주일을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마다 도시를 옮기며 프랑스 남부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네덜란드를 경유해서 프랑스 파리로 입국했지만 두 번째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친구의 초대로 런던을 경유하기로 했다. '내 사랑 마리벨'의 추억이 있는 도버 절벽이 보고 싶어서 유로스타로 파리로 이동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런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락두절로 인해 런던 일정은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빠져버린 런던을 차마 포기할 수 없어 그냥 일정대로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을 계획하게 되면 최소 한 달 전부터 다른 약속을 만들지 않았지만 출발하기 딱 일주일 전에 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내 여행 일정은 이미 6개월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고 3개월 전에 이미 모든 예약이 완료되어 있었지만 여행 일정 중에 결혼식 날이 잡히면 여행을 취소하라는 압박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주일 차이로 비켜났다. 그렇게 큰 일을 치르고 돌아오니 컨디션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출국하는 날 새벽까지도 열이 나서 아슬했다. 하지만 죽어도 가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강행했고 런던에서 다시 살아났다. 늘 들었던 안개 낀 런던이 아니었다. 소나기가 자주 내리긴 했지만 대부분 파란 하늘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둥둥이라, 런던 체류 내내 기분이 좋았다. 런던 중심부에서 그리니치까지 걸어서 이동했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일정도 나름 괜찮았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에서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다. Jacobs Inn Hostel에서 부킹닷컴에서 예약했던 금액이 아닌 웃돈을 요구했다. 호스텔에 항의하자 도리어 우악스러운 주인아주머니가 나와서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했던 호스텔 직원에게 내 예약서를 집어던지며 악을 쓰더니 갑자기 나를 보며 '씨익' 웃던 그 모습은 마치 마귀할멈을 보는 것 같았다. 혼혈이었던 그 아주머니는 호스텔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아프리카계 흑인 아저씨들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쭈글쭈글 주름 진 어두운 피부를 가리려고 잔뜩 펴 바른 화장품이 하얗게 붕 떠있었는데 그 얼굴이 동화 속 마귀할멈처럼 보여 유난히도 무서웠다. 그 상황에서 참는 게 답이라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어쩜 까미노 전에 어딘가를 들렀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이콥스 인 호스텔에서 베드 버그에게 망신창이가 되었고, 그날 이후 모든 일정은 고스란히 지옥이 되어버렸다. 무사히 목적지까지만 가자는 마음으로 버티고 버텼다.
'두 번째 매거진 : 두 번째 까미노 그리고'
그렇게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 프랑스 길을 두 번이나 걷게 되었다. 첫 번째는 겁에 잔뜩 질린 채 걸었지만 모든 게 좋았고, 두 번째는 만만한 마음으로 떠났으나 망신창이가 되었다. 무릎까지 망가진 채 걷다 보니 포르투갈 길은 포기해야 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봉사자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고 다음을 위해 알베르게 봉사자, 오스삐딸레라가 되기로 결심했다. 무비자 기간인 90일에 맞춰 다시 오면 좋을 것 같아 협회에다 문의를 했는데 2주간만 가능하단다. 고작 2주를 위해 유럽을 다시 오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앞으로 1년간은 지원자가 있다는 그 말에 낙담했다.
'여기도 힘들겠구나!'
처음이라 힘들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긴장을 했지만 프랑스 길의 시작점인 생장 피에드포르에 가면 나 같은 초보 순례자가 많이 있었다. 그렇게 불안한 동반자들과 자연스레 같이 걷다가 일정이나 걷는 속도 등이 맞으면 끝까지 함께 걸으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각자의 일정으로 걸으면 된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 구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느 날은 더워서 힘들고 어느 날은 추워서 힘들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첫 번째 순례길에서 힘들었던 것은 도착 예정일을 미리 정해 두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도착지인 산띠아고 데 꼼뽀스테라에 일찍 도착하면 '피스떼라 길'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유롭던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 일정만 조율하면 세상 편하고 안전한 여행이 되겠다 싶어 두 번째 까미노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순례길에서는 그 길이 만만했고 그 길을 안다고 자만했었다. 결국 살아서 돌아온 게 기적이 되었다. 만만한 마음과 욕심 때문에 유럽 배낭여행을 하고 갔었고 베드 버그라는 변수로 인해 출발 자체가 고비였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그것만 극복하면 된다고 자만했지만 무릎 부상과 악천후 속에서 한여름에 저체온으로 사망 직전까지 갔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절벽으로 떠밀려 죽을 뻔했다던 구간을, 첫 번째는 화창한 날 걸었는데 그 넓고 편한 길을 왜 위험하다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는 비가 오던 날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비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날이라 다들 하루 쉬라고 말렸지만 무릎 부상으로 아스또르가에서 이틀을 머물고 출발했던 탓에 그날은 걸어야 했다.
그리고 난 그 계곡에서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렸다. 비옷이 바람을 잔뜩 머금어 거대한 낙하산이 되었고 그 힘을 버텨내지 못했다. 두 다리로 바람을 버티다 보니 무릎 상태가 더 나빠졌다. 결국 아슬한 상황을 여러 번 겪다가 결국 비옷을 포기했다. 차가운 비에 흠뻑 젖은 채 걸었고 살이 에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았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뻔히 아는 알베르게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몸이 따뜻해졌다. 내 몸 주변으로 투명한 막이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물방울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고 그 안이 너무 포근하고 따뜻했다.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게 느껴졌다. 히말라야에서 눈 속에 파묻혀 죽었던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잠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이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포근하고도 아늑한 따뜻함이 내 몸을 감쌌고 난 눈을 감았다.
'조금만 이대로 있자!'
하지만 누군가 내 배낭을 잡아끌더니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 난 절벽 끝에 가까스로 매달렸다. 누군지 알고 싶어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살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얼어붙은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구나!'
그 순간, 죽으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살겠다고 버티고 있는 내 모습이 어이없었다. 언제 죽어도 좋다던 내가 뜻하지 않은 죽음의 순간이 오니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순간이 온 셈이다. 그래서 난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꽁꽁 얼어붙은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모두 안녕!'
그런데 발이 땅에 닿았다. 그 상황이 또 어이가 없었다. 바로 발아래가 땅인 것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해 그렇게 버티고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절벽 아래는 바람이 불지 않아 따뜻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쳤다. 산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그 길을 따라 기분 좋게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자꾸 소리를 질렀다. 무시하려다 왜 그러나 싶어 뒤돌아 보는데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길에서 잠이 들었던 거였다. 그렇게 나는 지나가는 가디언즈에게 구조되었다. 그때부터는 현실이었다. 온몸이 칼에 베인 듯 아프고 쓰라렸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그 길은 하늘이 허락해야 하는 길이었다. 한번 걸어봤다고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었다. 해마다 거길 가겠다던 마음은 그날로 접었다. 파리에서 생긴 일은 피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날씨와 관련된 것은 앞으로도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힘들 때마다 그날을 생각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가장 포근했던 그날, 히말라야 같은 추운 곳에서 조난자들이 왜 그토록 쉽게 삶을 포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잠들면 안 된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고통보다 곱절로 행복한 순간이니 죽어도 좋다는 말이 쉽게 나왔다.
'이렇게라면 죽어도 좋아!'
그래도 그 길은 어느 곳보다 훨씬 괜찮은 곳이다. 혼자서는 겁이 나고 같이 갈 여행 동무는 구하기 어려운 예비 순례자는 그런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고 싶다.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다. 영어를 못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는 영어를 못하는 순례자가 훨씬 많았으니까. 외국인이니 당연히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영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서툰 영어로 말을 건넸는데 'What?'이라고 반문해서 내 영어가 잘못된 거라 생각하고 주눅이 들었지만 사실은 그들도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다시 되묻는 것뿐이었다.
거기서 처음 사용해 보았던 인덕션이나 하이라이트 사용법을 나에게 물어보는 외국인도 많았다. 라이터로 불을 켜야 하는 수동식 가스레인지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았다.
가끔은 전혀 다른 언어가 그 사람의 감정을 통해 들리기도 했다. 한 번은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있는데 반대쪽에 동양인 부부가 나지막하게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 대화를 듣고 '음, 아저씨가 잘못했네.' 그렇게 속으로 참견을 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들은 한국인 부부가 아니라 중국인 부부였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었다. 언어가 달라도 감정이 전해지면서 순간 한국말로 대화하는 걸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또 한 번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인 커플인가 보다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서양인 커플이었던 적도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도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에겐 힘들었다. 대신 선택했던 제주 올레길, 그 길을 걷겠다는 계획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적당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잠만 잘 원룸을 구하려고 보니 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싶었지만 뒤늦게 전세 사기를 당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전세를 구하지 못해 집을 샀고 매매가 되자 한 달 뒤, 건물 내 미분양 세대가 전세 매물로 나왔었다. 사실 좀 아까웠다. 한 달만 버텨볼걸 후회도 했었다. 하지만 뒤늦게 전세로 나온 그 세대에 살았던 사람은 7년을 고통받다가 재판을 거쳐서 전세금 일부를 간신히 받고 이사 나갔다.
내 인생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완전히 잘못된 게 아니었고, 잘 된 일 같다가도 잘못된 일이 되기도 했다. 필리핀 마닐라 호텔에서 슬롯머신으로 땄던 돈은 다음 필리핀 여행을 위해 필리핀 페소로 받아왔었는데 몇 년 후 필리핀 화폐 개혁으로 인해 휴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매사 섣불리 강행할 수가 없었다. 강행하기는 겁나고 안 하면 불안했다. 내 옆에 아무도 없는 지금, 그런 일까지 당한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예민한 이런 성격 탓에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가는 게 중요하다, 일단 아무 집으로 이사 가고 보자.' 란 생각을 나도 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