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어머니는 늘 바쁘셨다. 다정한 분은 아니셨지만 어머니가 없는 집은 왠지 불안했으니 어머니가 집에 계셨으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고 집에 계시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늘 혼자서 집을 지켰다.
어느 날은 지인의 집에서 모임이 있다며 그날따라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집의 첫째는 오빠의 친구였고, 그 집의 막내는 동생의 친구였다. 각자의 어머니를 따라서 아이들이 함께 놀러 왔고 어른들은 우리에게 알아서 놀라고 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숨바꼭질을 제안했다. 아무리 집이 넓다고 해도 숨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 금세 술래에게 들키고 마는 아주 시시한 놀이였지만 그렇게라도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술래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소리에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숨고, 누군가는 찾아내는 이 놀이가 그렇게도 긴장할 일인가 싶었다. 아무리 진정해 보려고 해도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 술래는 다른 아이를 찾아내고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었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누군가에게 잡힌다는 것이 힘들고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술래가 바뀌고 다시 놀이가 시작되자 나의 두근거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차라리 내가 찾아내는 쪽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술래가 나를 찾아내기도 전에 내 발로 나서서 술래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쫓기지 않아도 되니 괜찮을 거라 안심하며 숨어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이미 숨어본 경험이 있으니 명당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고 숨어있는 아이들 중에 누구를 먼저 찾아내는지가 문제였을 뿐이다.
저 벽 모퉁이 뒤에 한 아이가 숨어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숨어있는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또다시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숨어있는 누군가 막 튀어나와서 나를 놀라게 할 것만 같은 공포에 난, 더 이상 그 놀이를 하지 못했고 그 후로도 숨바꼭질은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 몰래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난을 치면 난 결코 놀라지 않았다. 남들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엄청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너무 놀라서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남들은 그저 뻔히 쳐다만 보고 있는 내가 놀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장난은 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들은 내가 반응이 없어서 재미없다며 그런 장난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정작 나는 심장마비가 올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남들 보기에 전혀 놀라지 않는 사람으로 비쳤다.
숨어있는 누군가를 내가 먼저 인지하게 되는 경우에는 좀 달랐다. 보통의 사람들은 저 모퉁이에 누군가 숨어있다는 것을 먼저 눈치챘다면,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지만 나는 다가가기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쯤이면 튀어나올까, 좀 더 있다가 튀어나올까 하다가 그 사람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그 사람의 그림자만 보고도 내가 먼저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잘 놀라지 않는 내가 장난으로 소리를 지른 걸로 착각하곤 했다.
진짜 공포는 닥쳤을 때가 아니었다. 곧 닥치겠구나 싶은 그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진짜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서울에 왔을 때, 무섭고 외로웠지만 직장을 구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모임에 나갈 돈이 있어야 했다. 직장을 구하고 나서야 서울에 와있던 대학 선배와 연락이 닿았고 만나기로 했다. 퇴근하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양재역으로 갔다. 그렇게 친했던 선배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도 반가웠다. 언니는 다른 선후배들에게도 따로 연락을 했었고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같은 동아리로 엮인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
모이고 보니 대부분 강북에서 직장을 다니거나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임 장소를 굳이 양재역으로 정한 이유는 국정원에 다닌다는 한 선배가 그곳에서 만나길 원했단다. 현재 근무지가 양재동 부근이라고 해서 일반 직장에 다니는 우리가 맞추기로 했단다. 국정원이란 너무도 먼 존재였는데 그런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나에게는 과 선배이기도 했던 그 국정원 선배가 나타났다.
그 선배는 우리 과 복학생이었지만 학년이 달라서 함께 수업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같은 동아리라 신입생이었던 학기 초엔 상당히 어울리게 되었다. 그 선배는 다른 복학생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던 탓에 다들 어른 대접을 해주었고 후배들이 곧잘 따르곤 했었다. 그 선배는 그때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졸업 후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장 친했던 과 동기 하나가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학교 근처에 있던 선배의 자취방에 드나들면서 청소며 빨래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 선배와 함께 다녀서 캠퍼스 커플로 알았으나 알고 보니 그 선배는 이미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남자 혼자서 자취를 하고 있으니 결혼을 했는지조차 몰랐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 동기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동기는 그 후에도 그 선배의 자취방에 드나들었다. 학기 초엔 우리와 어울렸던 그 동기는 어느새 그 선배와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그 선배가 졸업할 무렵에는 혼자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선배가 부인과 별거를 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곧 이혼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붙잡았는지, 아님 선배를 차지하기 위해 동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다리다 버림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남의 일에 신경 쓸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조언을 해줄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지만 반가움보다는 예전의 그 일이 생각나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1차를 마무리하고 2차로 호프집에 가자고 할 때, 지하철 막차 시간이 신경 쓰여 그냥 돌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다들 강북권이라 늦으면 다 같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마저도 아쉬워서 3차를 가겠다는 팀과 헤어져 몇 명은 택시를 탔다. 그 선배가 데려다주고 가겠다며 택시에 함께 탔는데 내가 살던 경복궁이 마지막 경유지가 되었다.
내가 내리면 선배는 그 택시를 타고 바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 선배는 나를 따라서 택시에서 내렸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는데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서 못내 아쉬웠다며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괜찮다며 가라고 했지만 선배는 여전히 따라왔고 계속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계속 걷고 있었는데 집에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가게를 찾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며 그만 가라고 했지만 늦게까지 문이 열려있던 과일 가게를 보자 딸기를 사주겠단다. 싫다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선배는 그 가게로 들어갔고 그때가 기회인 것 같아서 혼자서 인사하고 서둘러 돌아섰다. 하지만 선배는 이내 따라와서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떤 공포를 느꼈고 그 상황이 마냥 무서웠다. 놀라서 얼어붙어있는 나에게 선배는 사람 좋은 얼굴로 딸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건넸다. 그걸 받으면 집까지 따라올 것만 같아서 싫다고 거절했지만 이미 샀으니 그냥 들고 가라며 억지로 손에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돌아갈 마음이 애초에 없었는지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며 집에 잠시만 들어갔다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에게 혼난다며 할머니 핑계를 대고 딸기마저 팽개치고 돌아섰다. 그제야 선배는 알았으니 딸기는 가지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딸기를 받으니 내 팔을 붙잡았고 또다시 횡설수설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이 남자는 집까지 따라올 계획이었구나.'
제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기도 했고 따라오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선배는 사정을 하면 다가왔고 화를 내면 단념하는 척했다. 따라오면 뿌리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치듯 달리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술에 취한 선배는 따라오지 못한 건지, 아님 스스로 포기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선배에 대한 여러 소문이 돌았던 대학 시절에도 나한테는 친절하고 의젓한 모습만 보여주어서 좋은 선배로 기억했으니 내 눈으로 보지 않은 소문에 대해선 애써 무시했었다. 하지만 이 날 이후로는 더 이상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호감을 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어리고 귀여운 후배로 대해주었고 나도 선배를 어른으로 대했을 뿐이다. 과 선배이자 동아리 선배였을 뿐인데 그날은 내가 외지에서 혼자 사는 만만한 여자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해서 라는 그런 변명 따위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선배가 무섭지 않았을까? 사람들 속에서는 철저히 괜찮은 선배였지만 혼자 사는 여자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인 선배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 언니들에게 연락이 와도 그 자리에 나갈 수 없었다. 약속 장소에 그 선배도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 같다.
단칸방에 살고 있을 때라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두려움에 며칠 동안 불안에 떨었던 것 같다. 혹시라도 나를 따라와서 내가 어디에 사는지 확인하고 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그날은 단념했다고 해도 내가 사는 주소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국정원의 이미지가 그랬다. 아는 사람이 국정원에 다닌다니 처음에는 무척이나 든든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 자체가 공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자 힘이 있는 사람이 마냥 무서워졌다. 나의 거절이 그 선배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이 아니었기를 빌었다. 나라는 존재가 끝까지 찾아내야 하는 그런 큰 존재가 아니길 또 빌었다.
지금도 집만큼은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주소를 주변에 함부로 알리지 않았다. 한동안은 인터넷 쇼핑조차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요즘엔 '내 집'이 버거워졌다. 안전 상의 문제가 생겨도 쉽게 이사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 몹시도 부담스러웠다. 혼자 사는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는 임차인 입장이 더 안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 당연하게 제출했던 주민등록 등본에는 집 주소가 적혀 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는 단순한 일조차도 두려웠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나는 그저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잠시 빌려 쓰는 집 주소는 어디든 제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일을 시작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