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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7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기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by 안녕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무언가가 자꾸 나를 방해하는 것처럼, 무얼 해도 자꾸 일이 꼬이고 있었다. 7월의 저주가 다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는 내 생일에 초가 꽂힌 케이크를 앞에 놓고 가족의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연히라도 케이크를 보게 되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 어릴 때 갖지 못했던 인형은 성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걸로 갈증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생일 케이크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름 장마와 함께였던 내 생일은 늘 우울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그런 기대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일이라 바라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에게도 방이 생겼다. 오빠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세를 주던 별채를 오빠가 쓰게 되면서 오빠가 쓰던 방은 내가 쓰게 되었다. 안방보다 더 큰 방이었지만 커다란 원목 장롱 세 개가 들어가 있는 탓에 다소 협소했지만 처음으로 내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꽤 흥분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방은 아궁이가 있는 온돌식 방이었다. 뒷마당을 통해서만 그 아궁이에 갈 수 있었던 탓에 난방을 제외하고는 평소에는 잘 쓰지 않았다. 겨울뿐 아니라 여름에도 장마가 끝날 즈음엔 습기 제거를 위해 한 번씩 불을 때우곤 했었다.

여느 해와 같이 평범한 생일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미 날은 밝았지만 그날은 왠지 모를 답답함에 오래도록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꾸 불러서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이 깼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일어설 힘도 없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이불 주변을 더듬었는데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 목걸이며 묵주반지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두 팔로 그 방에서 기어 나왔고 마루에 나와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온 힘을 다해 어머니를 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토할 것 같았다. 다시 마루 끝으로 기어갔고 문을 잡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마당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가기 위해선 두 다리로 일어서야만 했다. 문에서 손을 떼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내 다리는 휘청거렸다. 동시에 내 몸은 화단 가운데로 쓰러졌고 얼굴은 그대로 흙에 처박혔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을까? 흙에 파묻힌 얼굴로 신선한 공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직은 몽롱하지만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단 곳곳에 장식된 현무암을 용케도 피해서 넘어졌던 모양이다. 온갖 벌레와 이물질이 가득한 그 흙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지만 그때는 그 흙이 너무도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그곳에서는 숨이 쉬어졌다. 조금만 더 그대로 있고 싶었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마루까지 기어서 가기엔 너무나 멀게만 느껴져 일단 나무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일어섰다. 앞은 여전히 뿌옇게 보여서 두 팔을 허공에 대고 바둥거리며 마루를 향해 비틀비틀 한 발을 내딛자 반동에 의해 내 다리는 자동으로 서너 걸음을 걸었고 그대로 마루에 닿았다.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에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바깥의 이상한 인기척에 어머니가 내다보았고 그렇게 난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자꾸 깨우려는 소리가 들렸을 뿐 병원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는 가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날은 제헌절이라 휴일이었고 마침 다음날은 학교에서 해양훈련 현장학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야외활동이 있는 날이라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지만 결국 나는 가지 못했다. 생리 중인 학생들은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도 결석 처리되지 않았지만 나는 개인적인 일로 결석 처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고 맘 편히 입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의 입원은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게 되었고 병문안을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 일은 공공연하게 비밀이 되었던 셈이다.

오빠가 지낼 때는 아무 일이 없다가 왜 하필 내가 처음으로 방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원망도 했었다. 오빠는 항상 운이 좋았고 삶이 순탄해서 나는 그런 오빠가 항상 부러웠다.

오래된 한옥은 늘 추웠던 탓에 나는 따뜻한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렇게 여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고 유난히도 사건, 사고가 많았던 7월이 다가오면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휴일에서 해제되어 평일이 되고 나서야 제헌절이란 이름이 잊혔고 그러자 점차 기억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힘들었던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감당하지 못했던 일은, 어쩌면 퇴원하는 날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병원에선 며칠 더 입원하기를 권했었다. 의사의 만류에도 어머니는 퇴원을 요청했고 나도 학교에 가겠다고 거들었다. 나는 나보다도 병원비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해야 했다.

그때는 아프더라도 학교에 꼭 보냈던 집안 분위기도 있었지만 결석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방침대로 오로지 등교를 위해 최대한 빨리 퇴원하기로 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이른 시간에 퇴원해야 했는데 아침 일찍 오기 힘들다는 어머니는 나중에 따로 와서 퇴원 수속을 하신다며 나에게 먼저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이른 아침 혼자서 병실을 나섰다.

그러나 나는 영안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은 커다란 철문 앞에서 정신이 들었다. 종합병원 지하,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에 서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둡고 차가운 공기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곳을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왜 거기로 갔고, 거기에는 왜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날 아침의 행적은 기억나지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 정문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나는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영안실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영안실이란 곳이 병원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중학생 여자아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거기까지 가는 동안 어떻게 병원 관계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지 그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병실을 나섰지만 어디서 무얼 했는지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전날에 어머니가 병실에 가져다 두었던 책가방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학용품을 챙기기 위해 집에 들르려고 더 일찍 병실을 나섰지만 정신이 빠진 채 헤매고 다니느라 결국 시간에 쫓겨 바로 학교로 갔다. 그 와중에 지각할까 봐 열심히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필기구조차 친구에게 빌려 써야 했다. 가정 시간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해서 담임이었던 가정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지만 병원에서 바로 오느라 챙겨 오지 못했다는 그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입원했던 걸 알면서도 꾸짖기만 하는 담임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어쩌면 어머니가 선생님에게도 자세한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7월이 다가오면 불편한 기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붉은 숫자로 각인되어 있던 17일 제헌절을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그나마 공휴일에서 해제되고 나서는 잊으려 노력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는 기억들이지만 가끔씩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마다 폐로 들어오던 흙 속의 그 신선한 공기의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각나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했다. 장마전선의 영향 때문인지 다시 그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이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고 정말 몇 년 동안은 아무렇지 않았다. 올해는 우울함마저 잊을 정도로 정말 피곤했고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한순간, 모든 게 터져버렸다.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그때의 기억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누구나 꿈꾸는 평범한 가정을 원했고 그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이, 내 사고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내 아이들을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솔직히 나를 왜 낳으셨는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살아온 세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 혹시나 내 아이들이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 누구도 불행하길 바라지 않았으니 아무리 외로워도 나는 나 하나로 끝내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렇게도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저 아이는 커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불행을 견딜지 걱정이 되었다. 나니까 견뎠지, 저 아이는, 그 어떤 아이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으면 싶었다.

이 세상에는 이미 태어나 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도 출산율을 따지며 인구를 걱정하고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아이의 삶의 질보다 먼 미래의 인류를 생각해서 무조건 낳아야 하는 걸까?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여전히 많은데도 말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많지만 좋은 가정,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비혼을 결정하고 난 이후, 새로운 가정이 아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보살피며 어차피 태어난 세상, 조금이라도 불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나는 사랑이 아닌 정에 약했다. 조금만 친해지면 간이라도 떼어줄 것처럼 행동했으니 그렇게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필요했던 것은 아주 작은 관심과 아주 작은 도움이었으니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름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경제적 자유 (Financial Independence)와 조기 은퇴 (Retire Early)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 F.I.R.E. Movement.

이런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파이어 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빠른 은퇴를 위한 방법으로 극단적인 소비 절감과 저축을 통해 40대 전후에 조기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불필요한 소비에서 벗어나 중요한 것에 집중한다는 가치 전환이 핵심이다.

경제적 자유라는 단어에 흔히들 부자와 혼동하곤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들은 은퇴 후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절약하며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1. 꾸준한 절약과 미니멀리즘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2.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기대 수명까지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예정인가,
3. 취미로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 경우, 저 일로 인한 소득이 전혀 없어도 여전히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가?
4. 위험자산에 투자하지 않아도 경제적 자립에 문제가 없는가?
5. 조기에 은퇴를 하였는가?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으니 다들 부자라고 오해하지만 파이어 족과 부자는 양극단에 있을 정도로 아주 먼 관계다. 파이어 족의 필수 조건은 '극단적 소비 절감'과 '절약의 생활화' 그리고 '충분한 돈'이지 많은 돈이 아니다. 가끔은 나의 삶을 설명해야 하는 단어가 필요하기도 했으니 이런 삶을 지칭하는 말이 생겨서 사뭇 반가웠다.




네 번째 매거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작년 오늘, 내 생일에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많이 두려웠다. 어디까지 나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나를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무얼 써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이제는 정말 중단해야 하나 싶은 고비도 종종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삶에서, 일상에서 일깨워주는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고 떠올랐다. 아직은 잘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변화를 주지 않으면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변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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