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에 유독 민감했다. 좋아하는 숫자가 분명했으니 약속을 잡아도 내가 좋아하는 숫자의 그 날짜에 만났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우리가 만난 날을 기억하기 쉬웠다. 새로운 날짜는 또다시 내가 좋아하는 숫자가 되기도 했다.
글을 쓸 때조차 끝맺음은 0이 좋아서 일부러 맞추어서 마무리하기도 했다. 10회를 지나서 다시 새로운 1회가 시작되었다면, 20회가 될 때까지 '그 시간'을 번 거라 생각했으니 그렇게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10년 전에도 힘든 시기를 거쳤고 이번에도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을 미리 하면 생각보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습관적인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직원이 다쳤다고 자르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치료 잘 받으며 기다리라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나의 퇴사가 결정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 달간 그 결정을 보류한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거라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다. 이 글이 70을 채울 즈음이면, 그 또한 끝날 것 같다.
이번에 뜻하지 않은 택배 선물을 받았다. 처음엔 데워먹을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 또한 나로선 아쉬웠으니 결국엔 감사하게받기로 했다. 일하는 곳으로 배송받기로 했는데 점장에게미리연락해서 택배가 갈 테니 찾으러 갈 때까지 냉동실에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핫도그, 피자빵, 찐만두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대용식이 왔다.그들도 좋아하는 것들이라 다 같이나누어 먹어도 되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했던 나는 나름의 꼬장을 부리고 싶었지만꼬인 감정을 그렇게풀려던 나 자신이한심스러워서 이내포기하기도 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오전에 다녀오려고 했지만가는 길에 들른 은행에서 업무가 길어지면서 본의 아니게늦어졌고 점심시간이되어 도착했다. 굳이 밥을 먹고 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도착하자마자 점장이 대뜸 점심을 먹자고 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나는 어느새 직원들 숟가락을 챙기고 있었다. 그날 메뉴는 김치짜글이와 케일 장아찌였다. 평소처럼 밥 두 숟가락을 떠 왔고 다 같이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너무 맛있었다.
일할 때는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했지만 쉬는 동안에는 늘 허기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매장에만 가면 왠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먹고 와서 탈이 나는 것보다 챙겨 와서 집에서 편하게 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 음식을 가지러 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서였던 걸까?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밥 한 그릇을 떠 와서 먹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언젠가 오렌지를 사들고 매장에 간 적이 있었다. 매번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가져갔지만 오히려 예의상 먹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제주도에 살면서 노란 과일은 안 먹는다며 K가 대놓고 무시하자 평소에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점장에게는 드시라고 말하기조차 겁이 났다. 그때는 그런 거절이 마냥 싫었다. 그래서 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에 오렌지를 가져다 껍질을 깠다. 자몽처럼 붉은빛 과육인 카라카라 오렌지라고 설명하니 자몽을 좋아한다는 점장이 슬그머니 가져다 먹었다. 그리고 맛있다며 연이어 드셨는데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평소에 좋고 싫음이 분명한 점장에게 핫도그를 좋아하시냐 물었더니 점장은 답 대신, 고기가 들어오면 냉동실이 비좁을 텐데 언제 다 가져갈 거냐고 되물었다. 그날 다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다 챙겨 오기엔 그 또한 눈치가 보였다.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점장의 답은지금은 배가 부르다고 했다. 놔두고 오자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 같고, 다 가지고 오자니 먹을 것 하나 안 남기고 가져갔다고 할까 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것조차 눈치를 보던 나였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있으니 집에 가서 데우지 왜 여기서 데우느냐고 점장이 물었고 나는 전자레인지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K가 편의점에 가서 데우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거기서 구입한 음식이 아닌데 어떻게 그러냐고 하니 다른 것을 사면서 같이 데우면 된다고 답했다.다른 곳에서 구입한 음식을 들고 편의점에 가야 하는데 그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냐고 하니 자신은 평소에도 그런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다 못한 점장이 K에게 한소리 했다.
결국 먹어도 그만,안 먹으면 다음에 갔을 때 가져올 정도로만 남겨두고 돌아왔다. 점장에게 오늘 점심 잘 먹었다고 톡을 보냈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먹었다는 말은 없었지만 나중에 가서 보니 종류별로 하나씩 없어진 걸 보니 꺼내먹었던 모양이다. 그래,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다.
나의 글은 항상 어둡고 우울하다. 그냥 나의 상황, 일상을 적었을 뿐이었으니 그건 그냥 내 삶 자체가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서 벗어나고 싶은 의욕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 누구나 그런 불행, 한 두 가지는 겪으면서 산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나로선 더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늘 나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약속했다.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비굴하지 않도록 존엄하게 가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대신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했고 어떻게든 그 끈을 놓지 않도록 무엇 하나라도 미련이 남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저지를 뻔했다. 그날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사정도 해 보았지만 이미 결론을 내린 그들은 내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랬는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또 어떤 짓을 더 당할지 몰라서 그게 더 두려웠다. 복직을 하더라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들 하나같이 똘똘 뭉쳐서 한 사람을 공격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다친 죄밖에 없었다. 그게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나고 보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싶어 궁금해졌다. 이미 그들의 의도를 알았으니 이제 그만두자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해야 했지만 억울해서 그냥 떠나기 싫었다. 어떻게든 복직해서 일하다가 스스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솔직히 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니 나 자신이 너무 힘들어졌다. 그런 나를 말려야 했으니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질책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의 복직 시기가 다가오자 그것을 막기 위해 벌어지는 이 소란스러움을, 단체장은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점장이 단체장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곳에선 나보다 K가 더 필요하고, 여자보다 남자가 더 필요한데 나는 앞으로도 요양이 더 필요한 사람이니 나를 위해서 나의 복직을 말려달라고 했단다.
내가 그만두면 이 소란스러움도 해결될 거라 판단한 단체장마저 끝내 나에게 조심스레 퇴사를 권유했다. 규정대로 나를 복직시킨다 해도 이 소란스러움은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나를 생각해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거라고 했다. 퇴사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며 자신을 믿고 기다리라던 분이었다. 공정할 거라고 믿었던 그분마저 그렇게 나오니 다소 억울하고 실망스러워서 처음엔 싫다고 거부했다. 그래서 한 달 후, 정해진 그 휴직 기간까지 서로 더 고민해 보는 걸로 매듭지었다.
점장에게 그동안의 부족함과 사과를 전하며 만나서 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매몰차게 말하면서 마치 모든 게 결정된 것처럼 못 박았다. 순간 화가 났다. 그래서 점장에게 다쳐서 쉬는 직원은 자르지 않는다는 단체장의 약속을 믿는다고 했다. 또한 임시라곤 하나 이미 일하고 있는 청년 또한 구제할 방법을 찾아 다른 쪽으로 연계하든 어떤 식으로든 일을 계속 시킬 거라고 해서 미안하지 않다고 전했다. 아직 한 달간의 시간이 남아있고 그때까지 결정이 보류된 걸로 아는데 혹시 나만 모르게, 나의 퇴사가 이미 결정된 거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점장은 당황한 듯, 그런 건 아니라며 단체장이 기다리라고 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결정될 때까지 자신도 기다리겠단다.
생각이 많아진 나는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바로 단체장에게 전했다. 서로 불편한 상황에 질질 끌 필요가 있을까? 포기하긴 싫었지만 내가 버틴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나도 마음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결정하고 앞으로의 인간관계를 위해 다시 한번 점장에게 만남을 부탁했지만 여전히 단호하게 거절했다. 복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점장에게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만나서 정식으로 전하려고 했지만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
단체장에게는 형식적으로라도 휴직을 연장한 후에 퇴사하는 걸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어딘가에 소속된 상태로 정리하는 편이 조금 더 견디기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제 끝났다. 나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포기했다는 것을 아직 공식적으로 전달받지 못한 점장에게 다시 톡이 왔기 때문이다. K를 다른 쪽으로 연계한다는 말이 걸린 모양인데 나보고 다른 곳으로 가라며 이제는 대놓고 오지 말라고 했다.
뭐지? 이쯤 되니 내가 모르는 일이 더 있는 걸까 싶었다. 아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이제는 정말 궁금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상대하기 싫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왜 이런 걸까? 다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니 나도 이젠 내가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사라지면 이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조용하겠구나 싶어 그날밤은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3회가 남았다. 그래, 조금 더 버티는 건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