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어질 거예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질 거예요. 그게 필요해요, 난.
나는 늘 날씨를 확인했다. 그리고비가 오지 않는 날에 주로 약속을 하고외출했다. 궂은날에는 굳이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진료 예약일처럼 이미 정해져 있는 일정은나도 어쩔 수 없었다.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 속에 병원 진료일에는 매번 날씨가 좋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징검다리 연휴가 있던 오월의 첫 주에는 담당 교수의 외래 진료일이 목요일하루뿐이라서 나를비롯한 '일주일치 환자'가 그날 하루에 집중되어 있었다.처음에는대기시간을 걱정하고 있었지만하필 그날,비까지 온다고 했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 이후, 비 오는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다. 고산동산에 가면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만 지나다녀서인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트라우마 없이 그 길을 잘 지나다녔지만 솔직히 비가 오는 날에도 괜찮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비 오는 거리가 아무렇지 않다는 걸 미리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나에겐 늘첫 시도가 중요했으니 컨디션이 좋은 날에 먼저시도해보고 싶었다.
진료가 있는당일, 전국적으로 비가 왔고 제주에도 항공편이 결항되는 등 험한 날씨가 이어졌다. 천둥번개가 요란했으니 비가 그치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목발을 짚고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우산 하나가 추가되면 얘기는 달라졌다. 아무래도 외출은 힘들 것 같아서 병원 진료일을 변경하려고 하니 꽉 찬 일정으로 한 달 후에나 가능했다. 그래서 연휴가 끝나는 대로 병원에 가서 사정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월요일이 되어 병원에 갔지만 교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당일 진료 허가를 받은 후에도 오랜 시간을대기해야 했다. 원무과에서 접수 및 수납하고, 영상학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또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정이 어떻든 예약일을 지키지 않은 나의 잘못이니 당일 진료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모든 환자들의 진료가 끝나고 마지막에 내 차례가 온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기하는 중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단체장이었다. 병원이라고 하니 먼저 나의 상태를 확인하곤 이내 본론으로 이어졌다. 점장 몰래 매장에 가서 밥을 먹고, 때로는 음식을 챙겨가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난 할 말을 잃었다.
배고픈 이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단체였으니 다쳐서쉬는 직원이 가끔 와서 밥을 먹고 간다고 하여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때로는 나조차 당연한 듯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처음엔 점장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먹었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듯 따로 허락받지는 않았다. 물론 점장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에 가서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 또한 점장에게 따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월요일이면 직원들에게 전해 들었으니 내가 다녀갔음을 모를 리는 없었고 그 또한 별말이 없었으니 암묵적인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토요일에 갔을 때였다. 일주일 내내 날씨가 좋지 않더니 주말에 드디어 햇살이 비쳤다.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러 밥을 먹으러 갔다. 가서 보니 점장이 드디어 주 5일 근무에 성공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점장은 없었지만 나 대신 홀을 관리하고 있던 남직원 K와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던 여직원 J가 반겨주었다. 나의 상태를 물으며 걱정해 주었고 같이 밥도 먹었다. 내가 누룽지를 잘 먹었다는 말을 J에게 들었다며 K가 뜬금없이 누룽지를 챙겨주었다. 전날에 남은 밥으로 누룽지를 만들어서 숭늉을 끓였으니 남은 밥이 많으면 많을수록 누룽지도 많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갓 만든 누룽지가 맛있어서 먹은 거였지, 만들어 놓은지 며칠 지난 누룽지를 굳이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성의를 봐서 받아왔지만 그다음엔 슬그머니 놓고 오기도 했다.
갈 때마다 권하는 그 성의를 거절하기도 힘들어서 병원에 누워 있으니 누룽지는 생각나지 않고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생라면이 그렇게도 생각나더라며 빙빙 돌려서 말했다. 그러자 K가 라면사리 몇 개를 챙겨 가라고 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져오면 비상식량이 될 것 같기는 했다. 나중에 점장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걸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K의 여자 친구가 본사 사무실 직원이니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점장님이 아시면 혼난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랬더니 '점장님도 안 계신데 뭐 어떠냐'며 K가 가져가라고 했다. 당장 먹을 것도 아닌데, 주방에서 쓰기 쉽게 봉지를 뜯어놓은 라면사리는 오래 보관하기 힘들어서 싫다고 거절하니 봉지를 뜯지 않은 것도 있다며 직접 가지고 와서 챙겨주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성의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매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왔지만 점점 날씨가 궂은날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고 싶지 않은 날이 늘어나면서, 식빵을 사다가 치즈와 옥수수 통조림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토요일에는 회식이 있었다. 굳이 불러주시니 참여하기로 했지만 하필 회식장소가 '제주 내리막'이었다. 제주도민 사이에 유명하고 지금은 관광객에게도 소문난 곳으로 여느 곱창집처럼 가격이 비싼 곳이었다. 회식비로 1인당 3만 원이 지원되는 상황에 곱창도 못 먹고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참석하면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라 불렀다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사람이 그리운 나에겐 불러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다만 날씨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날씨가 개어서 매장으로 갔다.
회식 때 많이 먹을 거라고 다들 점심을 굶고 있었는데 나는 뭐라도 배를 채우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하필 밥이 없었다. 어묵을 볶아서 라볶이라도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좋아하지 않는 라면을 굳이 넣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어묵만 먹었지만 아무래도 나트륨 과다라, 먹다 말고 밥을 따로 2인분만 지었다. 그런데 밥을 가지고 테이블로 가보니 이미 테이블은 치워져 있었다. 그동안 내가 먹은 그릇을 치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상황에 조금 당황했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못했다. K는 평소에 청소를 열심히 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그 상황이 사뭇 불편해졌다. 지어놓은 밥을 놔두고 오면 그 밥으로 누룽지를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되면 또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식초와 설탕으로 간단하게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샌드위치에 넣어서 먹을 양파 한 알도 챙겼다. 그런 것들을 문제 삼고자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설마 했었다.
K가 본사 사무실에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얘기했으니 좋은 의도로 말했을 리는 없었다. 나의 복귀를 원하지 않던 그녀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얘기했고,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단체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상황이었다. 가서 밥을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일부러 점장이 없을 때만 골라서 갔다고했단다. 점장이 없을 때 가서 먹고 챙겨간 것들이 혹여 점장 몰래 행하려던 의도였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나의 복귀가 점장 손에 달려있는데 그런 행동으로 혹여 점장 눈밖에 나지 않을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점장의 의도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오픈식 때 사다 두었던 커피가 있었지만 처음엔 내가 먹을 커피는 직접 챙겨갔었다. 하지만 먹어도 된다고 하여 직원과 같이 먹었고 그러다 사다 둔 커피가 떨어졌다. 마트에 가는 점장이 사 오기를 기다려 보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커피는 사 오지 않았다. 돈을 받고 일하는 주제에 커피를 사달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그냥 내가 커피 200개 한 박스를 사들고 갔었다. 생색내는 것에 민망했던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점장에겐 따로 얘기하지 않았고 커피를 즐겨마시던 직원에게만 내가 사 온 것이니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고 말해두었다. 그런데 뒤늦게 커피 박스를 발견한 점장이 이게 뭐냐고 나에게 따져 물었다. 커피가 떨어져서 사 왔다고 말씀드리자 이내 표정이 변했고 직원이 먹는 건데 안 사줄 것 같아서 직접 사 왔냐고 한소리 하셨다. 어디까지 사달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사 간 것뿐인데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셨나 싶어서 순간 당황했다. 그 정도의 권한이 있는 자신을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한 걸까 싶었다.
음료를 마셔도 되냐고 물을 때마다 그걸 왜 묻냐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그까짓 음료 얼마 한다고? 먹어도 된다! 고 허락해 주었으니 매번 점장한테 물어보는 것도 가끔은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면, 차라리 점장이쉬는 토요일에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고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탄산음료를 좋아하는 K는 점장이 있든 없든 따로 허락받지 않고 음료를 꺼내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요일에 가보니 홀에만 있어야 할 K는 항상 주방에 있었다. 애연가인 그들은 수시로 홀이랑 주방을 비워놓고 같이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이런 상황을 점장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고 괜한 잔소리로 서로 불편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둘이 꽁냥 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방해가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괜히 불편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대하는 K의 행동이 눈에 띄게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회식이 있는 그날은 술을 마시니까 차는 두고 다들 버스 타고 갈 줄 알았는데 K가 차를 가지고 회식 장소로 간단다. 하지만 가는 길에 점장을 태워서 가기로 했다는데 자기 차에 4명은 못 탄다고 따로 버스 타고 오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 직원이 있으면 일부러 태워줄 만도 할 텐데 싶었지만,원하지 않는 도움은 나도 굳이 받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그랬더니 졸지에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게 된 J가 왜 승용차에 4명이 타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K는 차가 작아서 다 못 탄다고 얼버무리더니 그냥 가버렸다. 나 때문에 버스 타고 가게 된 J는 그 상황을 실망스러워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K도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눈치가 보여서 솔직히 이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K의 여자 친구에게 퇴사를 권유하는 연락을 받았었다. 복직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나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싶었지만 본사의 지시가 아닌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었기에 싫다고 거절할 수 있었다. 남자친구를 위해 나를 내쫓고 싶어 하는 그녀, 계속 일하고 싶어서 내가 못마땅해진 K.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니 그들의 의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딱히 증거가 없었다. 자격지심이라 할 수 있어서 나조차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던 터였다.
어머니는 나의 끼니를 걱정하셨다. 언제든지 매장에 가서 밥을 먹고 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점장이 맛있는 걸 챙겨주시고, 점장이 없을 때는 직원들이 잘 챙겨준다고 안심시키던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부러졌던 무릎뼈는 다행히 잘 붙었다고 했다. 두 달이 되기도 전이니 복직을 원하는 나의 마음처럼 회복이 빨랐다. 물론 주변 조직은 여전히 재활이 필요한 상태이긴 하지만 이제는 스프린트 없이 목발만 짚고 다녀도 된다고 했다. 바깥에서만 목발을 짚고 있었고 매장에선 그냥 걸어 다녔으니 다음 달 중순쯤엔 복직을 시도해 보려던 참이었다.
나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하면서 무언가 보람도 되는 일이 필요했다. 여러 봉사 단체로부터 청년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심지어 기회를 줄 것처럼 이것저것 요구만 하다가 결국 연락을 끊은 곳도 있었다. 대놓고 후원금만 요구하는 곳도 있었으니 그렇게 오랜 시간 방황하다가 10년 만에 간신히 이곳을 알게 되었다.
무보수로 일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봉사자로 먼저 활동해 보니 직원만큼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아니었고 가끔은 오히려 봉사자라서 무시받는 일도, 상처받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교통비라도 받고 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낫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힘든 일을 당해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참기에 편했다. 지난 회사 생활에 비하면 정말 단순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생활하고 혹시라도 남으면 나중에 따로 기부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적은 보수에 불만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그 또한 금액보다는 같이 일하는 직원과의 역차별에 발끈했었던 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고 보니 잠깐이라도 왜 그런 욕심을 가졌나 싶어 후회했었다. 소소하게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난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아직은.
오랜 직장 생활을 하고 보니 사람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풀었으니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는 처참하게 버려졌다. 그래서 나에게 사람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환경과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이 주어진다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름 모든 역경을 견디며 잘 버티어 냈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욕심을 버리니 이내 안정되었다. 드디어 이곳 생활에 적응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그 사고가 있기 며칠 전,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그날따라 노을이 참 예뻐 보였다. 방안 가득 퍼지는 햇살, 지는 해를 바라보며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고 나도 이제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불현듯 '아니면 어쩌지?' 했지만 실제로 그건 폭풍전야였던 모양이다.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내 자리를 넘보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고 한때는 입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내 느낌이 잘못된 거라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현실이 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병원 생활을 거쳤지만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병원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을 때 왠지 공감되고 편했다.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통증만이라 감사했고 덕분에 푹 쉬고 있으니 이 또한 다행이라 생각했다.
두 달째 쉬고 있으니 이미 쉬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다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루종일 서서 하는 일에 간신히 적응했었는데 다시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사뭇 불안하지만 지금은 복직을 할 수 있을지, 복직을 하더라도 예전처럼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적응하고 익숙해졌을 때, 또다시 내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지만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