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가에게 연락한다는 것은, 잠깐이나마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마저도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은 연락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별거 아닌 사람이니 그 순간에는 영혼 없는 답을 해주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나의 인사에 반응만 해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 작은 바람을 가지고 시도해 보는 그 노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싶어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하나같이 바쁘다고 했다.
그 순간에, 모든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바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두가 등을 돌린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여유란 것이 없으면 그저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고, 때로는 연락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삐뚤어져 버리기도 한다.
나는 왜 별거 아닌 일은, 별거 아닌 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뜬금없는 연락을 받았을 때 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답을 해주기를, 그 한마디에 누군가는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사고가 난 지 딱 한 달 만에 통 깁스에서 벗어났다. 두 발로 서서 샤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화장실 사용이 한결 수월해져서 좋았다. 그동안 외출을 하더라도 가장 걱정되는 것이 화장실 문제였다. 최대한 물을 마시지 않았고 어딜 가든 신호가 오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퇴원하고 나서도 외출에는 늘 불편함이 따랐다. 그래서인지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는 대학병원에 갈 때만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캐스트 오프해서 좋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무릎이 제대로 굽혀지지 않아서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발가락부터 엉덩이 아래까지 이어진 긴 깁스로 인해 변기에 제대로 앉을 수 없어서 일반 화장실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굳이 이용하려면 장애인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입원 중에도 병실 화장실은 사용하지 못했는데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는 환자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그 공간에 휠체어는 들어가지 못했다. 더구나 무릎을 굽힐 수 없으니 화장실 안에서 다리를 펼 공간이 나오지 않아서 퇴원하는 날까지 복도에 있는 장애인용 화장실을 이용했다.
병실에 있는 환자만 이용하는 병실 화장실과 달리 각층마다 하나 있는 장애인용 화장실은 그야말로 공중 화장실이었다. 우리 층에는 그나마 입원 환자들만 사용하기는 했지만 좀 더 불편한 환자들이 사용하는 곳이다 보니 지저분한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청소를 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화장실에 데려다주는 간호사는 그것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청소하고 써야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체력 소모가 유난히 많았고 다리의 통증 또한 심해졌으니 그 또한 힘들어서 어떻게든 최소한으로 화장실에 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퇴원할 때까지도 부기가 많이 빠지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제주도에 와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중의 하나가 길에다 담배꽁초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는 점이었다. 땅만 보고 걷던 내가 비 오는 그날, 미끄러진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횡단보도 신호가 유난히 짧다는 점이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건너더라도 반대편에 도착함과 동시에 신호는 이내 빨간 불로 바뀌곤 했다. 잘 걷는 나조차 아슬할 경우가 많았으니 나이 드신 분들에겐 짧아도 너무 짧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 제주도의 운전자들은 어느 누구 하나 독촉하지 않았고 다소 느긋하게 기다려 주어서 그건 참 보기에 좋았다.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처음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너무 무서웠다. 어차피 한 번에 건너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혹시 독촉하는 운전자를 만나거나 험한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을 만날까 봐 불안했다.
한참을 서성이다 간신히 용기를 내었고 최선을 다해 움직여 보았지만 도로 중간쯤 도착했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신호는 이미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는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치 신호에 갇힌 기분이 들어서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운전자들이 인내를 가지고 내가 건너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지만 나로선 그조차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도로 중앙에 버스 정류장이 걸쳐있는 횡단보도로만 건너가곤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두 번에 걸쳐서 건너는 편이 안심되었다.
그러다 이제는 횡단보도를 한 번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 때면 중심을 잡기 힘들어서 여전히 불안했다. 체력이 떨어진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튼튼한 보호막이었던 깁스에서 벗어났으니 넘어질까 봐 불안해서 더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내 의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참 좋았다.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일이란 걸 미처 몰랐었다. 다시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입원 기간 중에도, 통원 치료 기간 중에도 의사들은 끊임없이 별거 아닌 수술이었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깁스를 하고 있을 때는 깁스에 의지해서 편하게 걸어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정말 별일 아닌 상황인 줄 알고 일터로의 복귀도 서둘렀던 나였다.
그마저도 좌절되자 어차피 일을 할 수 없다면 이것도 기회다 싶어서 관광객 모드가 되려고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다니라는 의미였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의사의 말에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나고 보니 지난 한 달간 누워만 있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오셨을 때조차 외식이라곤 고작해야 '바삭'에서 먹은 치즈 돈가스 그리고 '용꽈배기'에서 사 먹은 꽈배기와 고로케(크로켓)가 전부였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즐기는 방법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밥이 중요하지 않은 나에게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하니 그냥 막막했었다. 주방이 없는 호텔에서 밥을 어떻게 챙겨 먹어야 하는지 몰랐고 매번 나가서 사 먹을 수는 없으니 어느 순간엔 손을 놓아버렸다.
서울에서도 가스불을 켜지 않고 끼니를 해결한 적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오직 밥에 집착하다 보니 당장 해결하지 못해서 실제로 굶은 날도 있었다. 그래서 퇴원을 하고 살이 더 빠졌고 근육이 빠지면서 기력도 잃었다.
한 달쯤 지나서야 서울에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났다. 우유와 시리얼만으로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고 마트에도 베이커리 코너가 있었으니 빵을 배달시켜도 되는 거였다. 서울에서도 유일하게 이용하던 이마트 '쓱배송'이 제주도에도 있었으니 그냥 이용하면 되는 그 단순한 것조차 배고픈 나날을 한참 보내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당장 먹을 우유와 시리얼 그리고 빵을 주문했고 보관이 쉬운 멸균우유를 구입해 두었다. 제주도 택배비를 지불하고 오렌지 한 박스를 주문해서 과일도 먹었다. 서울에서 당연한 일이 여기에선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지난 한 달이 어이없었다.
비로소 배가 불렀다. 남들에겐 그저 당연한 일상이라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말한 거겠지만 나는 해결 방법을 잊은 바보가 되어있었다. 상황이 불편해지면 해결하기보다 버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것이 반복되고, 그 반복이 거듭되고서야 원인을 찾고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뒤늦게라도 해결되었으면 된 거지만 이 또한 며칠이 지나자 소용이 없었다. 더운 날씨에 음식 보관이 힘드니 최대한 빨리 먹어치워야 했고, 그만큼 자주 배달시켜야 했으니 이 또한 결국 내 형편으론 감당하지 못했다. 평생을 다이어트하느라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고열량 음식들로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이 정해져 있다면 선택하기엔 좀 더 수월하기는 했다. 어차피 끼니당 만 원짜리 식사를 해야 한다면, 면보다 고기를 선택했고 그나마 평소에 먹고 싶은 것으로 골랐다. 나에게 특식이란집밥에 갇혀 사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늘 패스트푸드였지만, 제주에서는 그런 프랜차이즈조차도 평가가 엇갈렸다. 이왕이면 많은 이들의 구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곳을 선택해서 가려고 했지만 낯선 곳에 혼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다시 연락드렸다. 제주도에 오시겠냐고 물었지만 역시 어머니는 바쁘시다고 하셨다. 매번 시간 내기 어려운 분이라 어머니를생각해서 일주일 후에 돌아가는 항공권을 미리 예매했다가 구박당한 전적이 있던 터라 다시 만회할 기회를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움직일 만하기도 하고 여유를 되찾고 있었으니 어머니와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고 싶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흐린 날이 며칠 이어지면서 컨디션이 나빠졌다. 물로 배를 채우다가 원인 모를 설사를 하고 하루종일 탈수로 누워 있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며칠 만에 날씨가 좋아졌으니 이내 기운을 차렸고 모처럼 성당에 가고 싶어졌다. 목발을 짚고 가야 하니 남들 눈에 띄는 그 상황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다들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며 교중미사에 갔다. 나로 인해 불편할 텐데도 다들 느긋하게 기다려주었고 눈에 띄지 않게 배려해 주었다.
성당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날은 본당의 날로, 점심을 준다며 먹고 가라고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 아무리 공짜 식사라 하더라도 평소의 나라면 마다 했을 일이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한지 너무 오래된 터라 기꺼이 동참했다.
그 순간에는 마치 제주도 어느 마을 잔치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낯선 이들 속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다. 정신없이 먹고 나서 내가 비운 그릇을 보고는 그만 울컥할 뻔했다. 어쩌면 그 자리가 조금 편한 자리였다면 아니 주변의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 성당에서 펑펑 울었던 그날처럼 말이다. 배고픈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은 상상 이상의 의미였다.
매일 무언가를 먹으며 배를 채우고는 있었지만 늘 허기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날은 고작 국수 한 그릇으로, 오랜만에 든든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