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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2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4

외로움에 대한 각성은 불현듯 찾아온다.

진짜로 받아들이면, 정말 편해진단다.
과연 그럴까?




제주로의 이사는 오랜 시간 공들이며 준비했지만 마지막에 계획이 엎어지면서 많이 엉켰다. 당일 여행을 위해 끊었던 항공권이 결국 제주살이를 위한 티켓이 되었으니 모든 일에 계획적이던 나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이곳에 온 셈이다.

서울에서도 입던 옷만 늘 입었으니 많은 옷을 챙기지 않았고 출근을 염두에 두고 사계절을 지낼 수 있을 정도로만 챙겨 왔다. 그런데 제주의 3월이 은근히 더웠다. 여름에도 긴팔을 입었는데 에어컨을 켜기 전까지는 반팔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구입하자니 서울에 두고 온 내 옷들이 생각났고 부치자니 제주도 택배비가 아까웠다. 그래서 한 번은 서울에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쉬는 날이 일요일 뿐이라, 당일치기는 조금 벅차서 오월의 연휴를 디데이로 찜해두고 있었다.

마일리지 항공권이 아직 두 장 남아있었다. 코로나 덕분에 유효기한이 연장되어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티켓이었다. 언제일지 모를, 마지막으로 서울에 다녀올 때 쓰려고 남겨두었다. 그런 요즘 들어 마리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암투병 중이신 그녀의 아버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가 되든 마리아를 만나러 갈 때 그 티켓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첫 월급날이었다. 이제 누군가를 위한 선물은 사지 않기로 했다. 월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이곳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갔다. 하지만 나중에 짐이 될 거라 생각하니 이마저도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집을 구하는 것은 이미 포기했던 나는 비즈니스호텔에서의 장기투숙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던 삶을 미루어 보면, 아무리 내가 호텔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 지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언제든 혼자 이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두고 온 것들이 생각났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호텔에 들어서자 카톡이 왔다. 마리아에게서 온 부고장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미 마음을 먹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

경조사에 안 간지 정말 오래되었다. 때로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가지 못했고, 때로는 만나고 싶은 이들이 그곳에 있어서 오히려 가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에 있을 때조차 경조사에 가지 않던 내가, 먼 제주에서 굳이 가겠다고 하면 나를 잘 아는 그녀조차 의아해하겠지만 조용히 티켓을 예매하고 짐을 챙겼다.

다음날 퇴근하고 공항으로 갔다. 다시 찾은 제주공항은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곳이 아닌,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인천공항과 같은 곳되어있었다. 제주여행을 위해 도착하는 여행객들과 반대로 난 서울을 향해 떠났다.

그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축의금과 부의금을 내지 않았다. 친구의 결혼식에는 늘 선물을 했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신혼집에 필요한 선물을 사주었다. 대부분 일찍 결혼했으니 그마저도 까마득한 일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의 결혼식은 주로 봉사활동하던 단체에 속한 이들의 결혼식이었으니 이때도 사람들과 십시일반 모아서 당사자가 원하는 신혼선물로 대신했었다. 집들이를 하지 않으면 선물이란 게 애매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집들이 초대를 받지 않을 정도의 친분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의 결혼식에는 선물만 보내곤 했다.

주변에서 축의금 액수로 다투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는 얼마를 냈는데 너는 왜 이것밖에 내지 않느냐'는 그런 다툼이었다. 때로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같은 액수를 내더라도 20년 가까이 지난 후에는 그마저도 문제가 었다. 나는 결혼을 포기했으니 내가 낸 만큼 나중에 받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나중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친분을 따져서 성의를 표시하는 정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도예가 남편에게 살해당한 그녀의 결혼식에는 축의금을 냈었다. 당시 가장 친했으니 돌려받지 않는다고 한들 아깝지 않았다. 결혼 후, 웬일인지 형편이 어려운 듯 보였고 집들이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곧 태어날 아기 시트를 따로 선물해 주기도 했지만 다음번 경조사가 그녀의 장례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고 더 이상 내가 참석해야 할 경조사는 없었던 셈이었다.




토요일 밤에 서울에 도착했다. 검은 정장을 꺼내 입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내가 기억하는 장례식장은 유가족이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상조회사 직원이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 일손을 거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나는 그야말로 문상 온 하객으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같이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발인을 보고 제주로 되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녀에게도 미리 말해두었지만 갈 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그녀가 그제야 요즘엔 밤을 지새우지 않고 자정이면 자러 들어간다고 하여 다소 난감했다. 게다가 화장터 일정이 오후로 잡혀있어서 저녁이 되어야 장례가 끝난다는 일정을 들으니 마지막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결국 혼자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새우고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큰 마음을 먹고 갔었지만 그런 나의 노력은, 남들에겐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녀는 가장 친한 지인이었지만, 그녀에게 나는 그냥 지인이었을 뿐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5일 만에 사고가 났다.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 후, 마리아가 제주도로 여행을 온다고 했다. 여행 일정으로 바쁠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서귀포로 넘어갈 때 하루 묵어가겠단다. 아직 제주도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인이 제주에 온다니 같이 다닐만한 곳을 알아보았다. 나도 이제는 제주가 궁금해졌다.

숨은 맛집도 알아두었지만 굳이 미리 얘기하진 않았다.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하면 바쁜 와중에도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그냥 놀러 오라고 하면 잘 오지 않았다. 한때는 그렇게라도 부르기도 했지만 밥만 먹고 가버리면 왠지 야속해서 그마저도 하지 않았더니 방문마저 뜸해졌었다. 이번에도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밤에 와서 자고 다음날 오전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제주도에 오기도 전에 이마저도 취소해 버렸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 잠깐 들르겠다고만 했다.

그래도 밥 한 끼는 먹여서 보내야 할 것 같아 근처 맛집을 찾아놓고 기다렸다. 같이 점심은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오후 2시 비행기라는 말에 이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부탁한 짐이 있었는데 내가 바쁘면, 호텔 프런트에 맡겨두고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그마저도 없었으면 그냥 서울로 돌아갈 셈이었던 모양이다.

제주에 오면서 굳이 나에게 소식을 전한 것은, 내가 제주도에 있는데 말도 없이 다녀가기엔 눈치가 보여서 말했던 거였지,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각자 여행 스타일이 다르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와의 여행을 꺼리는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가끔은 내가 이상한 여행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남들은 어떤 여행을 하는지가 궁금했고 이번에는 그녀의 여행 스타일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밥을 먹고 유명한 곳에 들리고 군것질을 하면서 유유자적으로 다녔다는 얘기를 들으니 조금은 의아했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과 스타일이 다른 친구와 함께 여행 가서 은근히 힘들었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그 친구들과 함께 여행 다녔지만 그 친구들이 바쁠 때조차 나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의아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더 편해서겠거니 하고 넘겼다.

결국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는 날, 공항에 가기 전에 호텔에 잠시 들렀다. 이번에는 친구가 아니라 나도 아는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마무리했단다. 출발 전에는 내가 모르는 친구와 함께 제주도에 온다고 했었다. 그리고 서귀포에 살고 있는 친구와 일정을 보내고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지나고 나니 아니었다. 전날의 숙취로 힘들어하면서 방문했으니 애써 준비한 크루아상과 오렌지는 먹을 상태가 아니었고 비행기 시간이 되자 그냥 가버렸다.

지난 시절,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아파하던 나를 걱정해 주었고, 그런 사람들은 만나지 말라고 조언하던 그녀였다. 결국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다. 그 결과 지금 나에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마지막 지인이었다.

혼자서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을 호텔에만 있던 나를 잠시나마 꺼내주길 바랐지만 결국 그녀에게 나는 그냥 남이었던 모양이다.

하루정도는 자고 갈 줄 알았는데, 밥 한 끼는 먹고 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의 가장 친한 지인도 그렇게 떠나갔다. 이제 나를 위해 슬퍼해 줄 사람은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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