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Apr 1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3

아름답지 않은 세상, 아름답게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고산동산의 아찔한 기억




잊을 건 잊고 별일 아닌 거라 우기며 살아보았지만, 그건 또 다른 자학이었다.

왜 그런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남아있는지, 누군가 물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자, 서울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아직 집이 있으니 간단한 일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내 삶은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극단적인 선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무던히 버티는 중이었다.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나에게 자꾸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제주에서도 버티기 힘든 일이 자꾸만 생겼다. 몸이 아픈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힘든 건 견디기 힘들었다.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다들 자기 욕심을 채웠다. 나는 번에도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야 할까? 내가 봐도 내가 참 짠하다. 어쩌면 다들 그럴까?

때로는 나 자신에게 그들을 이해할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며 그렇게라도 애써 적응하려고 했다. 나 자신과의 싸움 끝에 3월이 되어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렇게라도 마음이 편해지니 다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거였다.

평소에도 그 언덕은 신경이 쓰였다. 고산동산이 무슨 뜻일까 하며 지나다녔었는데 한자로 동산 대신 언덕 邱를 쓰는 걸 보니 그 언덕이 고산동산인 모양이다.

'고산동산은 이도광장과 광양광장을 연결하는 구간으로, 경사도가 심해 빙판길로 변할 경우 교통 대란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옛 제주세무서 사거리인 이도광장에서 제주시청 방향으로 이어지는 200m 구간에 열선 인입 공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처음 그 언덕을 마주했을 때 아찔했다. 매일 아침마다 저곳을 올라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도 구간이 짧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오르니 짧게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적응되었다. 눈이 오면 어쩌나 불안했지만 겨울엔 따뜻했고 어느덧 봄이 되어 안심하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던 그날도 땅만 쳐다보며 걸었고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걸었다. 그랬음에도 난 그 길에서 미끄러졌고 결과는 참혹했다. 무릎뼈가 두 조각이 나면서 반쪽은 허벅지 쪽으로 이동했고 반쪽은 종아리 쪽으로 이동하면서 주변 인대를 찢어놓았다. 그때 스스로를 원망했다. 왜 더 조심하지 않았는지 원망하고 또 원망했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다.

열흘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치료나 재활은 따로 필요 없는지 수술 부위의 상처 소독을 위해 한 번씩 병원에 가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퇴원한 다음날, 바로 일하던 곳으로 갔다. 평소에도 걸어서 다니던 그 길이 그날따라 너무 멀고 힘들었다. 돌아오는 길이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내가 괜찮음을 빨리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특히 점장의 반응이 남달랐다. 나의 등장을 달갑지 않아 하는 것은, 그저 나의 기분 탓이려니 했다. 그렇게 그날은 아무 일없이 돌아왔다.

며칠은 작은 움직임에도 힘들었다. 아파도 운동해야 한다고 해서 참고 견뎠다. 움직임이 늘어나자 하루가 다르게 다리의 부기가 빠졌고 퇴원하고 일주일쯤 지나자 깁스 속의 공간이 부쩍 늘어났다. 내 팔이 쑥 들어갈 정도였다.

상처는 문제없이 아물고 있었고 2주 만에 실을 뽑으러 병원에 갔다. 이때 깁스를 풀고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처음엔 깁스를 왜 다시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때가 되니 단숨에 이해가 되었다. 부기가 얼마나 빠졌는지 다리가 그냥 쑥 빠질 정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뼈는 문제없이 잘 아물고 있었지만 상처는 아직 실을 뽑기엔 무리란다. 작은 상처조차 몇 달은 걸렸는데 수술 상처가 고작 2주 만에 아물기를 기대한 것은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새로 깁스를 하고 나니 다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깁스가 다리를 지탱해 주니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증이 없어서 운동하기에도 한결 편해졌다.

그제야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날엔 한라산도, 제주 바다도 멀리까지 보였다. 그렇게 제주의 풍경을 보며 비로소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 좋은 날, 호텔에만 있기 힘들었다. 일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더 지켜보기로 했는데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인지 몸은 더 가벼워졌다.

사고가 난 지 딱 한 달째 깁스를 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깁스를 푼 후에, 상황을 보고 출근하려고 했지만 왠지 바로 출근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사무실에 출근 의사를 전달했다. 직원을 관리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웬일인지 그날따라 답 대신, 그녀의 보고를 받은 단체장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몇 달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한 달 만에 복귀하겠다고 하니 다들 놀란 모양이다.

사고가 일어난 후로, 나는 낙인찍혔단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혼자 걸어서 병원까지 찾아간 무모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괜찮다고 하는 말도, 괜찮지 않은 거라 미리 의심부터 할 거란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특별히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일을 해도 무리는 없어 보였는지 일단 단체장에게 출근 허락을 받았다. 단, 깁스를 풀더라도 임시로 출근하면서 점장이 나의 상태를 최종 판단하는 걸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

그러자 답이 없던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제주도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나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단체장의 결론에도 이의를 제기하며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나의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그녀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아 보였지만 나도 우길 형편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괜찮은지 나도 불안했다. 무릎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고 한 달 만에 다시 일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다시 매장을 방문했다. 목발을 짚고 갔지만 다치기 전에 걸어가던 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다. 이번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퇴원하고 처음 방문했을 때는 두 시간 걸려서 도착했고 도착과 동시에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40분 만에 도착했고 두어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며 동선을 체크해 보았다.

모처럼의 외출에 피곤하기는 했다. 복귀 초반에는 격일 근무 같은 배려라도 해주면 좋을 테지만 이제 그런 요구는 할 수도 없었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든 내색을 보이면, '거 보라며 좀 더 쉬라'는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사이 점장만 홀로 주 5일 근무가 실현되어 있었다. 주 5일 근무를 위해, 자신이 쉬는 토요일엔 나에게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주방일을 도우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었다. 내가 싫다고 거부해서 점장은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였는데 그때 사고가 났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흔쾌히 그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으니 점장은 내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무실 직원의 남자친구가 이곳에서 나 대신 근무하기 위해, 그리고 점장의 주 5일 근무를 위해서는 내가 출근하지 않고 이대로 퇴사하는 편이 나은 상황에서, 오로지 그들의 판단에 따라 나의 근무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에게 나의 출근에 대한 결정부여되었다는 것을 알고 부담스러워하던 점장은, 그날이 오기도 전에 단칼에 나의 출근을 거부해 버렸다. 나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몇 달은 더 쉬고 나서 일하러 오라고 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왜 매번 이렇게 힘든 걸까?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2013년 3월에는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십 년이 지난 2023년 3월에는 제주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십 년 후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그동안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만약 그럴 필요가 없다면, 그냥 버티지 말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