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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2

보이지 않는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애증의 존재




응급실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5인실을 배정받았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밤을 보내고, 혼자 아침을 맞이했지만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밤이었다. 입원을 결정하기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많이 힘들었지만 입원을 결정한 순간부터는 이내 평온해졌다.

보호자 연락처를 묻길래 오빠의 연락처를 남겼지만 내가 죽지 않는 이상, 가족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두었다. 그런데 입원하자마자 어머니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통화도중에 간호사가 와서 쉿! 하고 신호를 보내고는 별일 없다는 듯이 어머니와 통화를 이어갔다. 뜬금없이 제주도에 놀러 오시겠단다. 길게 통화할 상황이 아니라 5월쯤에 놀러 오시라 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밤사이 교대한 간호사는 나의 사정을 모르니 엄마 몰래 놀러 왔냐고 넌지시 묻는다. 어머니는 내가 다친 걸 아직 모르시는데 놀라실까 봐 수술하기까지는 비밀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녁에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몇 달에 한번 전화가 올까 말까 했던 어머니의 전화는 그날부터 이어졌다. 엄마들에겐 그런 촉이 생기는 모양이다.

보호자 면회가 되지 않는 병실이지만 수술 당일에는 4시간 면회가 가능하단다. 면회가 안 된다고 해도 오실 것 같은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어이 오실지도 몰라서 수술 전날, 오빠에게는 따로 연락을 해두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했다.

수술하고 마취가 완전히 풀린 다음날 새벽에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 7시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던 어머니는 그날 아침에 전화가 왔다. 계속 꿈자리가 사나워서 전화를 하셨던 거란다. 면회가 안 된다는데도 당장이라도 오실 듯해서 간신히 말렸다.

일어난 사고에 비해 결과가 심히 참혹하긴 했다. 병원에서는 잘 지냈으나 퇴원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조식을 포기하고 옮긴 비즈니스호텔에서는 취사가 불가능했으니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기엔 힘들었다.

어머니는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집은 서울에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가면 다시는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갈까 하고 고민도 했다. 하지만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그 여정을 생각해 보니 왠지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집을 비웠다고는 하나 언제 집에 오실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불안에 떠느니 마음이라도 편하게 지내자 싶어 고향행을 포기하고 그냥 호텔에서 버텨보기로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제주도로 오시겠단다. 어차피 취사가 힘들면 어머니가 오신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오시겠단다. 외식에도 한계가 있고 어머니 식사를 따로 챙겨드릴 여력이 안 되니 어머니가 드실 음식은 알아서 챙겨 오시라고 했다.

집을 비우는 것에 굉장히 예민해하시던 어머니에게 병원 진료가 있는 날에 맞추어 일주일 간격으로 왕복 항공권을 예매해 드렸다.

그 사이 난 열흘 만에 혼자서 퇴원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도 받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라 그냥 잊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보였다. 사고가 있던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다른 상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든 신경이 부러진 무릎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디선가 심한 피비린내가 나서 힘들긴 했었다.

수술 전 검사에서 빈혈 수치가 많이 떨어져서 빈혈 치료를 함께 받았다. 수술을 하지 못할 정도의 상태였으니 의사는 퇴원하고 나서도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한 달 계약 기간 중, 열흘 이상을 비운 호텔에서는 어머니가 와서 함께 지내는 것에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어머니와의 아찔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계신다고 해서 모든 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1인실에 2인이 지내는 것은 허락받았다고 하더라도 전기, 수도 등이 과하게 사용되면 호텔에서도 당연히 싫어할 터라 조심해야 했다. 어머니는 매일 한 시간씩 온수 목욕을 하셨고 화장실 불 끄는 걸 대부분 잊으셨다. 그때마다 내가 끄고 와야 했으니 나의 할 일이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하루종일 TV를 켜놓으셨지만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서 어머니와 지내는 동안에는 즐겨보던 드라마도 포기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걱정이 되어 오셨다고는 하지만 정작 나를 위한 노력보다는 일상을 즐기고 계셨다.

한쪽 다리를 발끝부터 엉덩이 아래까지 통깁스를 한 상태였지만 샤워도 혼자서 거뜬히 해냈다. 청소를 위해 부직포 밀대까지 사 왔으니 어머니의 도움은 딱히 필요 없었다. 하루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는 듯하여, 내가 할 수 있음에도 가끔은 수건을 빨아달라, 바닥 청소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시골에 가서 생활을 하신다던 아버지가 지금은 집에 와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하니 미리 짐을 싸두고 따라나서기까지 했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 어머니가 혼자만 갈까 봐 외출도 하지 않으시고 종일 기회를 엿보고 있더란다. 어머니가 만류했음에도 따라나서려고 해서 티켓이 한 장뿐이라고 하니 역에 가서 구입하겠다고 했단다. 서울이 아닌 제주도에 가야 해서 기차 티켓이 아닌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그제야 포기하셨단다. 그렇게 간신히 따돌리고 왔다는 어머니의 말에 안도는 했지만 왠지 불안했다. 어머니는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 오셨을지도 모른다.

따로 지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평온하지만 여전히 화해가 가능하다고 믿는 어머니를,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며 자신의 남편을 두둔하는 어머니가 싫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어머니의 이야기 주제는 항상 아버지의 근황에  관한 것이었다. 불편하다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보았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대화의 첫머리는 항상 "네 아버지는..."이었다.

모든 게 불만인 어머니와 매일같이 싸우며 일주일을 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는 티켓을 미리 끊어둔 것에도 불만이셨다. 선약이 있다고 하여 어머니의 동의 후에 그 날짜에 티켓을 예매했음에도, 지나고 나니 어머니는 원치 않으셨는데 나 혼자 일방적으로 예매한 거라고 우기셨다.

그러더니 며느리와 통화를 하면서 옆에 있는 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셨다. 어릴 때는 순하디 순하던 아이가 서울에 가더니 이상하게 변했다며 분통을 터뜨리셨다.

나는 순했던 것이 아니었다. 딱히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어린 딸에게 호스를 휘두르며 매질을 하셨다. 어린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도 무서웠고, 겁에 질려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했었다.

"무서워서,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한 것이지, 그게 어떻게 순한 거예요?"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지만 어머니는 나의 말은 무시한 채 며느리와 통화를 이어가며, 여자 혼자서 세 남매를 키우자니 조금은 엄하게 키웠을 뿐이었다며 항변했다. 그리고 몽둥이를 휘두르면 혹시 뼈라도 다칠까 봐, 대신 부드러운 호스로 매질을 했다는 어머니의 변명에 어이가 없었다.

어린 꼬마의 뼈가 부러질까 봐 걱정이 되어 그렇게 아이의 피부가 터지도록 호스를 휘둘렀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내 말에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대신 며느리에게 그때의 자신을 반성한다고만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끝내 사과하지 않으셨다.

일주일 후, 어머니는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지나고 나면 항상 후회하면서도 함께 있을 때는 여전히 힘든 존재였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이런 외로움이 싫어서 누가 오는 것이 싫었다.

혼자가 되니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혼자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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