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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4. 2024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81

오늘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내일은 불현듯 슬퍼질 수도 있다.

불행도 인정하는 것!
나는 또 불행해질 수 있지만 괜찮다고.
다시 또 불행이 찾아오더라도
견뎌낼 힘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동안 줄곧 이미지로 구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한두 번 만난 사람의 경우에는 옷이 달라지거나 표정이 달라지면 쉽게 구별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 버스에서 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처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신고란 것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가해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으니 설명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입고 있던 옷도 기억하지 못했고, 색깔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이목구비는 흐려지고 색은 옅어져서 그냥 어두운 이미지로 바뀌어 버렸다. 나에게 위험한 사람은 그저 흐리고 어두운 이미지일 뿐이었다.

단순히 놀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잘 아는 사람의 얼굴도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억지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더욱더 그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을 굳이 쳐다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어머니가 제주도에 오셨었다. 오지 마시라고 말렸지만 어머니는 기어이 오셨고 함께 병원에 갔었다.

병원에서 대기 중에 자꾸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함에 주변을 살펴보니 저만치에서 머리카락이 새하얀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둘러 시선을 피했지만 어딘가 낯익어 보였고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잠깐 시선이 부딪혔을 때, 그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씩 하고 웃었는데 마치 나를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늙은 아버지의 얼굴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쫓아오신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고,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해 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도 따라오려고 했었다는 말을 들은 후였다.

어머니의 시선이 가끔 그쪽으로 향하곤 했지만 여전히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혹시 두 분이 계획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잠깐 했지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정신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그 할아버지가 있던 곳을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 소심한 성격이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생겨도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환경 변화가 있을 때마다 성격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는 선입견 없이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까란 기대 심리가 있었다. 매학년 새로 사귄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의 성격이 극과 극으로 달랐던 이유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늘 변화를 시도했다. 이 말은 꼭 해야 한다는 마음에, 수십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할 말을 꺼내보기도 하지만 결론은 늘 후회였다. 그냥 살던 대로 살지 왜 하필 그때 용기를 내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난 예전의 소심한 성격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후회할 일들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하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화를 시도하지만 늘 똑같은 일로 자책하면서 말이다.




작년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버거웠다. 글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거진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중단하기로 했다.

작년 유월, 인사로 마무리까지 했지만 다음번 글을 쓰는 시기가 되자 걱정하는 댓글이 달렸다.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인사가 무색하게, 슬그머니 이야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이면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쓰고 싶은 말이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내내 후회했다.

억지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늘었고, 글을 써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힘들어졌다. 그래도 100회는 채우겠다며 버텼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스트레스가 풀리지도 않았고, 만족할 만한 글을 쓰지도 못했다. 누구를 위한 글일까 싶어 계속 후회했다. 그래서 큰맘 먹고 급하게 중단해 버렸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불안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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